‘기황후’ 의 제목은 ‘기황후’ 이지 말았어야 했다. 이는 제작진과 작가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이며, 오점이다. 사실 제목 하나만 바꿨더라면, 기황후가 아닌 다른 허구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더라면, 지금까지의 논란을 굳이 등에 업지 않았어도 될 드라마다. 역사의 인물 중 한 사람, 그것도 주인공이어서는 안될 사람을 중심에 세운 것은 엄연히 ‘기황후’ 제작진의 판단착오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50부작으로 예정된 장편드라마를 단호히 접어야만 할까? 이미 2회까지 나간 상황에서 실수였다고, 착각했다고, 잘못했다고 고개 숙이고 물러나야만 할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이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다지 바람직한 처사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이 작품에 자신의 생계를 건 이들은 도대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현명하게 생각해보자.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 물을 엎질렀다고 아무리 다그치고 혼을 낸다고 해도 그 물이 다시 컵에 담아지진 않는다. 지금 상황에서 ‘기황후’ 제작진이 해야 할 일은 기황후를 주인공으로 삼은 실수에 대한 깊은 성찰의 사과다. 그리고 대중들은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논픽션이 아닌, 픽션으로 이 작품을 접하면 된다.

앞으로 ‘기황후’는 역사적 고증에 해당되는 자막이나 주석을 가급적 배제해야 할 것이다. 고려와 원나라의 시대적 상황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모든 것을 바꾸는 데 한계는 분명히 있겠으나, 배경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 ‘기황후’ 입장에서는 절실하다. 더 이상의 논란을 가중시키지 않으려면 이런 작업은 불가피하다고 여겨진다.

충혜왕을 왕유로 바꾼 것처럼, 기황후를 다른 허구의 인물로 바꾸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인 듯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다. 많은 수정이 요구되겠지만, 아마도 실수를 만회하는 길은 이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원, 주진모, 지창욱이 그리는 로맨스를 위해서라도 이들의 신분은 모호해져야만 한다. 하지원이 기황후 역할임을, 주진모가 충혜왕 역할임을, 지창욱이 원나라 16대 황제 순제 역할임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그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가상의 인물로, 가상의 로맨스를 그려내는 이들이어야만 한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보통 드라마에서 주인공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케미는 크면 클수록 호재다. 그런데 ‘기황후’ 에서 주인공들의 로맨스는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논란을 짊어진 캐릭터들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원-주진모-지창욱, 이 세 배우로 연결된 러브 트라이앵글이 벌써부터 반짝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 세 주인공이 펼치는 사극연기는 훌륭하다. 누가 사극 전문배우들 아니랄까 봐,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원의 ‘다모’를 잊을 수가 없다. ‘황진이’ 에서의 그녀의 연기는 또 어떠했는가. 아직 영화 ‘조선미녀삼총사’가 개봉하진 않았지만 이 역시 그녀의 사극 카리스마가 기대되는 작품이다. 그녀와 사극의 만남은 언제 봐도 자연스럽다.

장군이나 왕의 역할에 주진모만큼 어울리는 배우도 없다. 드라마 ‘비천무’ 영화 ‘무사’ ‘쌍화점’ 등에서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의 존재감을 노골적으로 피력했다. 지창욱도 자신의 짧은 필모그래피에 ‘무사 백동수’ 라는 사극을 남겼다. 탁월한 연기였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기도 했고, 사극이 어울리는 배우라는 소리를 듣게 해준 작품이기도 했다. ‘기황후’ 의 주연배우들은 이렇게 사극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로 뭉쳐졌다.

당연히 사극 로맨스도 기가 막히게 잘 그려낼 수밖에! 하지원과 주진모가 함께 거문고를 켜는 장면은 한 폭의 그림이며, 주진모가 하지원을 번쩍 들어 안는 장면 역시 왠지 모르게 가슴을 설레게 한다. 첫 회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들의 케미는 벌써부터 무르익어가는 듯하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은근히 달아오르게 한다.

하지원과 지창욱의 첫 만남도 드라마틱하다. 하지원의 처소에 몰래 숨어든 지창욱에게 칼을 겨누는 장면. 살짝 긴장감이 감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이들의 만남도 꽤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나약해 보이는 남자와 강인해 보이는 여자의 첫 대면. 묘하게 어울리고 이들의 두 번째, 세 번째 만남에 알 수 없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하지원은 주진모와도 지창욱과도 아련한 사랑의 감정을 연기할 가능성이 크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버릴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또한 주진모와 지창욱의 연기가 이들의 삼각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가기도 할 테다. 그들의 눈빛연기 역시 점점 더 절박해지고 애달파지기만 할 테니까.

논란에 빗대어 보면 이들의 삼각관계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것을 극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것이 논란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허구를 강조하고 역사적 사실을 들추지만 않는다면, 아마도 이들이 그리는 사극 로맨스는 역대 최고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순애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치정이 가미된 옛날 옛적 위태로운 사랑이야기. 사극 로맨스의 진수는 ‘기황후’ 에서 나올 확률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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