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1년차 국정운영의 방식이 이색적이다. 민주적 리더십이나 관료주의 시스템을 통한 통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전면에 등장하는 국졍운영도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은 여러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28일 오전 정홍원 국무총리가 대국민 기자회견에 나서면서 박근혜 정부는 세 명의 리더(?)가 각기 다른 역할을 담당하며 국정운영을 이끄는 ‘트로이카’의 모습을 보여줬다.

홍보하는 정홍원 총리
무엇을 해도, 심지어는 해외순방을 해도 존재감이 없던 정홍원 총리가 박근혜 국정운영 방식의 나팔수를 자청하고 나섰다. 총리실의 역할이 참여정부 때 생겼다가 사라진 국정홍보처의 그것을 따라가는 모양이다. 정 총리는 국회가 정쟁을 그만두고 민생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쟁이 어째서 심해졌는지 생각해 본다면 대단히 무책임한 비판이다. 국정원 등 각 권력기관들의 선거개입 의혹으로 국회가 공전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대해 청와대와 여당이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이 오직 정부는 민생을 생각하는데 의회는 정쟁만 한다는 구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정홍원 총리 측의 공식적 입장은 총리가 해외순방 기간에 이와 같은 부분을 고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해외순방 중에 국내정치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궁색하다. 국내에선 해외업무를 생각하고 계실까? 이는 해외를 나갔다 온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급히 대국민기자회견에 ‘동원’된 상황이 멋쩍어 만들어낸 변명일지도 모른다.
기자들은 정홍원 총리의 기자회견이 전날인 27일 오후 8시 경에야 문자로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는 이 기자회견이 총리실에서도 급작스럽게 기획된 것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갑자기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총리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닐 수가 많다. 정홍원 총리의 민망한 ‘홍보 플레이’의 이면에도 요즘 자주 거론되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입김이 서려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 이유다.
▲ 정홍원 국무총리가 28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경제와 현안 문제에 대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대국민 담화 발표를 마친 뒤 브리핑룸을 나서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총리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뉴스1)
김기춘 비서실장, 통치하되 정치하지 않는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요즘 들어 ‘통치의 축’으로 거론된다. “대통령은 해외순방만 하고 내치는 김기춘이 한다”는 허탈한 소리도 나오는 형국이다. 개각 이후 김기춘 실장은 다른 청와대 참모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실세로 여겨지고 있다. 청와대 참모들이 내각 위에 있으며 그 핵심에 청와대 비서실이 있다는 진단이 많다.
공식적인 업무는 그저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도 김기춘 비서실장은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항명 파동이 있었다. 진영 전 장관이 국민연금에 대한 자신의 소신과 그 소신이 꺾일 경우의 사퇴 의중을 청와대에 거듭 전달했다고 주장하면서 김기춘 비서실장을 축으로 한 청와대 비서실이 내각의 대통령에 대한 소통을 가로막고 있으리라는 전망이 대두되었다. 물론 김기춘 비서실장은 자신은 진영 전 장관으로부터 아무것도 전달받은 바가 없다고 발뺌했다. 하지만 잔영 전 장관의 사정을 아는 관계자들은 “진영 전 장관은 조용하게 사퇴하려고 했는데 청와대 측에서 자꾸 나쁜 모양으로 끌고 가서 ‘항명’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최근 채동욱 전 검찰총장에 대한 ‘찍어내기’ 논란도 김기춘 비서실장의 ‘작품’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조선일보>에 주도적으로 정보를 흘렸고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통해 그를 감찰하게 하여 사퇴시켰다는 식의 사실여부를 떠나 검증하기 힘든 가설까지 등장했다. 특별수사팀장이 특수통에서 공안통으로 바뀌고, 새 검찰총장이 들어서는 과정에서도 여야의 쟁점은 ‘김기춘’이다. 검찰총장 후보가 비서실장의 측근일 거라고 공방을 하는 형국이니, 민주화 이후 위상이 낮아졌던 청와대 비서실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김기춘이 통치를 한다”는 말은 사실 ‘농담 같지 않은 농담’, ‘진담이 아니었으면 좋겠는 진담’이다. 이제 임명된 지 몇 달 안 되는 비서실장이 여기저기에 자기 사람을 꽂아 넣으며 정국을 주도하는 모습에선 박근혜 정부의 여의도 정치에 대한 지극한 멸시와 혐오가 보이기 때문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통치의 축’ 내지는 ‘통치의 핵’으로 지목되는 상황은 ‘정치 없는 통치’ 혹은 ‘공작정치’의 유산을 보여준다. 박근혜 시대의 서글픈 단면이다.
▲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이날 그는 채동욱 사태에 청와대는 관여한 바가 없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뉴스1)
박근혜 대통령,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청와대 비서실장이 통치를 하고 있다면 대통령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조섞인 얘기지만, 입헌군주제정체하 영국 군왕을 가리키는 말인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가 제일 그럴 듯해 보인다. 하지만 영국의 사례가 ‘의회민주주의의 제도적인 외곽으로서의 영국 입헌군주정체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라면, 한국의 경우는 ‘측근의 공작정치를 방조하는 한국 대통령제 하의 특수한 개인’을 설명하는 말이라는 것에서 더 갑갑하다.
혹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외치를 맡고 있다고 보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이나 중견국협의체를 제안하는 등 외교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인의 안보 외교 정책구상을 근본적인 틀에서 뒤흔드는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외교구상에 맥없이 따라가는 실정에서 실질적인 업무를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잦은 해외순방은 외무부의 헤게모니 싸움과 정치를 잊고 싶은 대통령의 심리가 결합했을 때 나오는 상황이란 지적도 있다. 행정부 조직 간의 알력관계를 알고 있는 한 관계자는 “외무부는 원래 대통령이 밖으로 나가야 힘을 받는 조직이다. 그래서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억지로 해외순방의 이유를 만들어 갖다 붙이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의 해외순방이 ‘세일즈 외교’로 선전되는 것에 대해 그 관계자는 “역사적으로 세일즈 외교 안 한다는 대통령이 있었나”라면서 “기업인들을 많이 데리고 가기는 하지만 대체로 기업인들이 대통령 따라 가서 계약을 수주하는 게 아니라, 미리 합의된 계약 수주를 순방시기까지 늦춘다. 박근혜 정부의 세일즈 외교라는 것도 과거에 비해 특별할 것도 없고, 무슨 효과를 지닌 외교행위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는 “외무부가 그렇기 때문에 청와대가 견제를 하여야 하는데 보통 청와대가 잘 견제를 안 한다. 청와대 비서관들도 사실 대통령이 밖에 나가 있어야 더 편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비서관이) 따라나가든 안 따라나가든 마찬가지다”라고 지적했다. 외무부와 청와대의 구조상 대통령의 해외순방은 필요 이상으로 장려되게 되는데, 대통령이 국내 정치를 싫어하고 머리나 식히고 싶어 할 경우 순방은 더 늘어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정국이 경색되어 있고 주말에 제1야당이 ‘헌법 파괴’까지 운운하는 가운데 코리안시리즈 3차전에 가서 유유하게 시구하는 모습은 공작정치 바깥에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현임 대통령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사건이라 하겠다. 비민주적 리더십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트로이카가 한국 사회를 질주하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3 한국야쿠르트 세븐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 두산베어스와 삼성라이온즈의 경기에 앞서 시구를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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