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사람의 자율주의자가 쓴 책이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이름인 맛떼오 파스퀴넬리의 『동물혼』(원제 Animal Spirits, 원서 출간은 2008년)이 그것이다. 파스퀴넬리는 1974년생인 젊은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그의 책이 본격적으로 소개됨에 따라 현재 자율주의 맑스주의가 젊은 세대의 이론과 실천을 끌어당길 정도로 견인력이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동물혼’이란 기이한 개념은 케인즈가 처음 제시한 것이다. 케인즈는 “주식시장의 배후에서 투쟁하고 경기순환을 압박하는 비합리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힘들을” ‘animal spirits’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파스퀴넬리는 이들 야수적 힘들이 다중의 어두운 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보고 그 힘들을 무시하거니 외면할 것이 아니라 ‘사보타지’의 힘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는 ‘동물혼’을 케인즈와는 다른 함의와 의의를 가진 긍정적인 개념으로 전환시켜서 다중의 대안적인 주체성을 모색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으로 사용한다.

▲ 맛떼오 파스퀴넬리(갈무리 제공)
파스퀴넬리는, ‘동물혼’ 개념이 “인류의 양가적이고 갈등적인 본능을 인정”하면서 “비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생산의 삶형태적 무의식을 드러”(50-51쪽)내리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혼을 지닌 동물들의 몸을 “그 신체의 모든 변이들-인지적, 정동적, 리비도적, 신체적[변이들」속에서 기술되는 다중들의 생산적 엔진”(51쪽)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산 노동의 또 다른 이름”인 ‘동물몸’에 대해 지적 담론이 “무지한 채로 있는 동안, 자본주의는 그것으로부터 곧바로 돈을 흡수하고 제국은 그 동물적 에너지를 제국적 경호의 힘으로 전환”(51쪽)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저자에게 ‘동물몸’과 ‘동물혼’은 실천적으로도 반드시 인식해야 할 대상이다. 이에 그는 ‘동물혼’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다중이 선하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물력이 자본주의의, 아니 더 나아가 새로운 파시즘의 어두운 재료가 되기 전에 생산적인 동물력을 회복”(53-54쪽)하는 것을 이 책의 목적으로 삼은 파스퀴넬리는, 데모크라시(민중-정치)는 데몬-크라시demon-cracy(악마-정치)로, 즉 “공통적인 것을 다스리기 위한 자연적 본능들의 양가성을 긍정하는 정치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독특한 생각으로 나아간다. 파시즘으로부터 다중의 악마적 측면을 구해내어 자기가치화의 힘으로 전화시키자는 파스퀴넬리의 생각은 매력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악에 지나치게 접근한다는 면에서 위험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렇다고 그가 악을 찬양하는 심미주의나 낭만주의로 빠진 것은 아니다. 이와는 달리, 그는 “‘과잉충동’을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해독제로, 하나의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는”(65쪽) 방안을 사유하면서, 악을 환대함으로써 악을 ‘억제’한다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카테콘’ 개념을 끌어온다.

파스퀴넬리는 ‘카테콘’ 개념을 “권력의 현재懸在적이고 잠재적인 내용을 포착하고, 자기의 독을 바꾸어 누그러뜨릴 수 있는” 권력과 욕망의 양가적인 “머리 둘 달린 존재의 모델”(69-70쪽)로서 받아들인다. 이를 보면 그가 다중의 동물혼을 활성화하고자 하면서도 그 동물혼에 내재되어 있을 독성을 찬양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책이 의도하는 바는, “자연적 본능들이 어떻게 과학 기술 기반의 보다 비물질적인 형태들 속에서조차 현대 생산의 물질적 토대의 일부를 이루는지 연구”-테크노크라시의 합리성 역시 “대중들의 본능적 충동들만큼이나 동물적”이라고 그는 보고 있는데,-하는 동시에 “포획의 국가 장치보다는 동물혼의 자율적이고 생산적인 힘을 강조하는 것”(77쪽)이다.

파스퀴넬리에 따르면, ‘데몬크라시’란 다중의 동물적 활력(에너지)을 제거-‘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청교도주의가 그러한데-하지 않고 다중의 양가성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정치다. 그것은 “머리 둘 달린 윤리의 분자적인 다이어그램”(70쪽)인 ‘카테콘’을 제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구축과 제조는 ‘분자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불안정하다. 그래서 “비르노는 마침내 다중이 가장 불안정한 동물, 즉 자기파괴적 본능들과 자기조직화 형태들-갈등으로서의 언어와 제도로서의 언어-에 의해 교차되는, 그렇지만 두 극들 사이에서 일종의 포스트모던적 결정 불가능성에 의해 분절되는 갈등적 히드라라고 선언”(68쪽)했다고 비르노의 생각을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다중은 머리 둘 달린 독수리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머리를 잡아먹으면서 스스로 증식하는 히드라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파스퀴넬리는, 미셸 세르에게서 빌려온 ‘기생체’라는 개념적 동물 형상에 대해 논하고 있다. “기생체는 경제와 과학기술의 비대칭성들을 위한 분자적 모델을 제공”하여 “경제의 상이한 지층들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들을 이해하기 위한 시의적절한 모델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경제, 지식, 과학기술의 생물학적 뿌리들을 미생물의 수준까지 내려가 기술함으로써 비르노의 시각을 확장”(86-87쪽)하는 개념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기생체 되기’가 주목되는데, 그 기생체는 “새로운 공유지에 대해서도 역시 금융적 술수를 부림으로써 시장을 부패시키는, 투기와 지대의 신흥 체제”에서 “다중의 산 노동을 착취”(88쪽)한다. 그렇지만 “기생체의 신진대사를 기술하는 것은 또한 정치적 행동의 새로운 좌표를 암시”(88쪽)하는 것으로, “전술적 동맹에서 전략적 사보타주로 이동하는 또 하나의, 정치적으로 양가적인 다이어그램”(89쪽)을 그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위에서 언급한 개념적 동물형상들-기생체, 히드라, 머리 둘 달린 독수리-이 현대 자본주의와 정치의 동학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상술하고, 이에 저항하는 사보타지의 문법은 무엇일 수 있는지 모색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변모하고 있는 당대의 자본주의의 문화와 정치 체제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동물혼’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급진적으로 분석하면서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걸어가면서 묻는다’는 사파티스타의 태도를 이어받는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어떠하고 현재 길이 어떻게 놓여 있으며 다른 길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이 세계 안을 걸어가면서 묻고 생각할 때 다른 세계는 유물론적으로 사유되고 상상될 수 있을 것이다. 『동물혼』은 그러한 유물론적 사유와 상상력을 힘껏 발휘한 한 젊은 자율주의 이론가의 역작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야성적인 ‘동물혼’에 천착하여 대안적인 사고와 저항의 방향을 사고하는 저자에게서 젊은이다운 혈기를 느낄 수 있었다. 파스퀴넬리가 성장했을 때의 환경일 디지털 문화와 미디어 스케이프 문화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점도 그러한 느낌을 더했다. 그러나 동물혼의 저항적이고 구성적인 힘을 얻기 위하여 동물성의 또 다른 면인 파시즘에 지나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허나 현재 세계의 젊은이들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올바름’에 어떤 전망을 두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한국에서도 젊은이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논리로 자신들을 설득하고자 하는 486 세대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더 나아가 인지자본주의 체제에서 고통 받고 있는 젊은이들 중 일부는, ‘일베 현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디지털 파시즘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라도, 한국인 역시 파스퀴넬리의 주장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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