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일보를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지피지기 운운하며 두 눈 부릅뜨고 날마다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해부하듯 샅샅이 뜯어보는 이들도 많겠지만(열독률 수식 상승의 일등공신 되겠다!), 솔직히 조선일보를 보면 머리가 어지럽다. 체한다. 이런 신문이 1등인 것이 불편하고 창피하다. 뜬금없는 얘기가 아니다. 조선일보 지면은 독자에게 ‘늘’ 싸늘한 공포감을 심어준다(‘주입’한다!).

“KBS는 ‘조선중앙TV’ 서울출장소인가?” 섬뜩한 제목의 이 사설이 말하려는 바는 명확하다. 이런 선정적인 제목은 아주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독자에게 각인된다(그래서 할 말은 하는 신문?). 조선일보 애독자들의 10년 묵은 체증을 한 방에 펑 하고 시원하게 뚫어준다. 그런데 아무리 사설 내용을 몇 번이고 읽어봐도 KBS가 왜 조선중앙TV와 등가에 놓일 수 있는지 ‘논리적으로’ 납득할 길이 없다. 조선일보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KBS와 조선중앙TV를 ‘동지’로 본 모양이다.

▲ 조선일보 7월4일자 사설.
선동에 가까운 자극적인 표현을 끌어다가 ‘비판’ 대신 ‘증오’와 ‘저주’를 서슴없이 퍼부어대는 조선일보식의 이런 수사가 사실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조선일보는 무엇이 힘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힘. 오로지 힘만이 이들의 유일한 진실이다. 힘이 있는 것만이 조선일보에게는 진실한 것이다.”(김정란)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이런 태도는 정당한 비판은커녕 흠집 내려는 대상을 얼러 깔아뭉갠다는 점에서 몽둥이만 들지 않은 심각한 언어폭력이다. 폭력의 세계에서는 힘 있는 자가 이긴다. 힘이 지배하는 세계에 이성과 합리와 토론과 대화와 타협이 자리할 곳은 없다.

조선일보가 그토록 힘주어 강조하는 법치와 공권력도 결국은 힘의 산물이다. 촛불시위가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들고 공권력 경시 풍조를 조장한단다. 그러면서 국민의 준법의식을 수십 배, 수백 배는 더 후퇴시키는 재벌총수들에 대한 법원의 관대하기 이를 데 없는 집행유예 판결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땅 투기하고 위장 전입하는 부적격 인사들을 장관에 청와대 수석에 앉혀도 별 말이 없다. 그들에게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그 힘에 눈높이를 맞춘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신문을 가진다.”(유시민) 전 세계 역사에 특정 언론이 이토록 오랫동안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던가. 십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친다. <조선일보를 아십니까?> 필자들은 묻는다. “조선일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

▲ '조선일보를 아십니까' 책표지
요는 KBS와 조선중앙TV를 동일시하는 과정에 작용하고 있는 예의 그 ‘색깔론’이다. ‘색깔론’은 조선일보가 꽤 오랜 시간 아주 일관성 있게 견지해온 의식구조의 핵심이다. 대한민국은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신성한 헌법으로 보장된 나라. 하여 조선일보가 말할 자유 역시 ‘원칙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내가 누리는 만큼 남에게도 똑같이 보장해주려는 자세를 전제로 한다. 그 자유는 나와 반대되는 쪽에서 말할 자유도 존중할 줄 아는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비판 위에 서 있다. 거친 언어폭력으로 상대를 윽박지르고 ‘낙인’ 찍는 태도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장된 자유를 향유하려는 자의 정당한 자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념(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이 나라에서 조선일보는 다른 이념을 자신들의 ‘적’을 처리하는 데 마구 휘둘러 왔다. 적으로 매도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판결까지 내버린다. “그것은 한 사회의 논리적 합의과정을 파괴해버리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전체주의적인 발상을 닮았다.”(김민웅) 한완상, 최장집 두 사람에 대한 조선일보의 마녀사냥식 사상검증은 지금 돌이켜봐도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문제의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합법적인 정부 하의 촛불시위와 군부독재 시절의 6월 항쟁이 어떻게 똑같을 수 있느냐며 한껏 핏대를 세운다. 과연 조선일보가 이런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조선일보의 역사를 보면 한 마디로 ‘부끄럽다’는 것밖엔 달리 할 말이 없다. 일제 시대에는 친일, 군사독재 시절에는 친독재, 어느 때는 어용언론, 또 어느 때는 비판언론… 이성적인 기자들과 반이성적인 지면,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기자들과 반민중적인 지면…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도무지 과거에 대한 반성을 모른다. 부동의 1등 신문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수십 년에 걸쳐 다져온 조선일보의 놀라운 생존능력. 그 도저한 자본의 논리. “먼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룩하고 1위 자리를 쟁취한 선발주자의 기득권. 기득권을 가진 자에게 이자가 붙고, 이자가 붙고, 하는 빈부의 악순환.”(최보은) 카멜레온에 비견되는 놀라운 변신술을 뽐내온 조선일보는 진정 우리 시대의 모니퇴르! 그래서 “조선일보는 ‘하나의 언론’으로 대접하기에는 너무나 결함이 많다.”(김동민)

이것이 “KBS는 ‘조선중앙TV’ 서울출장소인가?”라는 선동적 사설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1등 신문의 태도치고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울뿐더러, 책을 읽은 뒤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그럴까? 어느 필자가 해답을 준다. “조선일보의 편집방향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의 편집진이 천박한 파시스트들이라면 가능하다.”(손석춘)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힘과 자본의 논리에 기대어 스스로 기득권이 된 언론은 어느 필자의 말대로 ‘사회적 흉기’라 불려도 좋을 것이다.

출간된 지 10년이나 된 이 책의 문제의식은 아직도 그대로 유효하다. 조선일보가 힘주어 말하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도 결국은 독자 국민의 것일 터.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특정 언론을 겨냥한 최초의 비판서인 이 책에는 조선일보가 제대로 된 언론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여러 필자들의 마음이 함께 담겨 있다. 조선일보가 유독 비판받는 이유가 되는 ‘1등 신문’이라는 사실은 ‘죄’이기도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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