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이스>는 두 가지 이유에서 개봉을 기다렸던 영화입니다. 첫째는 린다 러브레이스의 삶을 소재로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린다 러브레이스를 무려(!)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연기했다는 것입니다. <클로이>에서 관능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애간장을 태웠던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다른 것도 아니고 역사에 길이 남을 포르노 배우로 출연한다고 하니 눈길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영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아만다 사이프리드에 대한 음흉한 시선의 관음증이 주로 작용했었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목구멍 깊숙이>에 출연했던 린다 러브레이스에게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화제를 일으켰던 포르노의 배우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죠. 하지만 <러브레이스>는 둘 다 만족시켜주질 못했습니다.

<목구멍 깊숙이>와 린다 러브레이스

본명이 린다 수잔 보어맨인 린다 러브레이스는 극장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초기 포르노 영화 중 하나인 <목구멍 깊숙이>로 하루아침에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항간에는 <목구멍 깊숙이>가 6억 불에 달하는 수입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인플레이션을 적용한 수치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들인 금액이 6억 불이라고 합니다. 믿기지 않아서 자료를 찾아보니 이것은 낭설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미국 전역도 아닌 일부에서만 개봉했는데, 관람료를 5불로 잡고 계산하면 1억 2천만 명이 <목구멍 깊숙이>를 봤다는 것입니다. 세계은행의 자료를 보면 1972년~1973년의 미국 인구가 2억 명이 조금 넘습니다. 즉 산술적으로는 미국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이 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저 이버트는 과거의 극장이 마피아와 엮여서 포르노와 매춘 등의 불법적인 사업으로 번 돈을 세탁하는 용도로 이용됐다고 합니다. 다른 기자와 관계자들도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일축한 걸 보면 이쪽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겠네요. FBI 추산으로는 비디오 테잎을 판매한 것까지 합하면 1억 불 가량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어쨌든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허무맹랑한 소문마저 진실처럼 퍼질 정도로 <목구멍 깊숙이>의 파장이 대단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뉴욕 타임즈'도 장장 다섯 페이지에 달하는 기사를 실었었다고 하니 사회적으로 큰 이유가 됐던 건 틀림없습니다. 덩달아서 린다 러브레이스도 포르노의 아이콘처럼 떠오르며 주목받았는데, 정작 더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건 그걸 부정하면서였습니다.

<러브레이스>는 린다 러브레이스가 그렇게 포르노 세계에 발을 들이고 빼기까지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영화는 아직 린다 보어맨이었던 시절에 그녀가 문제의 척 트레이너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포함하여 초반부는 아주 무난하게 흘러갑니다. 마치 겉으로 널리 알려진 린다 러브레이스의 삶을 보여주듯이 외부의 시점에서 관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반부에 다다르면 스릴러/미스터리 영화의 반전을 만납니다. 조금 전까지 무탈하게 포르노의 여왕으로 등극한 것처럼 보이던 린다 러브레이스를, 이제 그녀의 시점으로 보여주면서 이면에 있었던 진실을 목도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이 구성 자체는 극적이고 그럴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러브레이스>를 허망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영화도 외면하는 진짜 러브레이스의 실체

<러브레이스>의 첫 장면은 폐인의 몰골로 욕조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린다 러브레이스를 보여줍니다. 이어서 인터뷰로 보이는 몇 가지 내레이션이 들리더니 마지막에 "진짜 러브레이스는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의미심장하죠. 이를테면 <러브레이스>를 통해 포르노 배우로 알려진 린다 러브레이스의 진면을 보자는 제안인 셈입니다. 이 시도는 참 좋았습니다. 문제는 영화가 린다 러브레이스를 포르노 배우로든 인간으로든 제대로 현미경을 들이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반부터 지나치게 매끄러운 전개가 어리둥절하게 하더니, 반전처럼 작용하는 중반부의 전환도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한 채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넘어가고 맙니다. 이런 방식이 마지막까지 쭉 이어집니다.

사실상 <러브레이스>는 린다 러브레이스를 거의 무의미하게 허비하고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러브레이스>는 포르노 배우로서의 린다 러브레이스는 보여줄 수도 있을지언정, 인간 린다 러브레이스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분실한 채로 제작하고 만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러브레이스>의 감독이 선댄스 영화제 등에서 다큐멘터리로 주목을 받았던 롭 엡스타인과 제프리 프리드먼이란 걸 알면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1시간 30분이라는 짧은 런닝타임을 할애해서 이 영화를 만든 목적 자체가 무엇인지 궁금할 지경입니다. 특히 정작 중요하게 다뤘어야 할, 포르노 세계에서 은퇴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서 정착한 후에 '시련'이라는 자서전을 내고 포르노 세계를 비판한 린다 러브레이스는 없다시피 합니다.

지금과 같은 완성도는 정말 의아합니다. 두 감독들의 전작 다큐멘터리들을 볼 때, 분명 린다 러브레이스는 얼마든지 사회학적으로 중요하고 미묘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소재입니다. 꼭 그렇게 거창하게 나가진 않겠다고 해도 좋습니다. 사회적으로 볼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린다 러브레이스의 기구했던 팔자를 다루는 것도 가치는 있습니다. 그러나 <러브레이스>는 둘 중 어떤 것에서도 만족할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래서야 관객들이 수박 겉핥기로 알려진 린다 러브레이스의 삶 외에 무엇을 더 볼 수 있을까요? 각본과 편집이 워낙 엉망이라서 감독의 의욕조차 엿보이질 않습니다. 정말 그들은 린다 러브레이스가 폭력적이고 돈에 환장한 남편을 만나서 험난한 삶을 산 여자로만 생각한 건지 의문입니다.

★★☆

덧) 샤론 스톤이 린다 러브레이스의 엄마로 출연했습니다. 분장을 따로 한 탓인지 마지막까지 못 알아볼 뻔했네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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