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대문과 주변 지역(왼쪽) 장충체육관과 자유센터 (오른쪽)

1.

동대문은 서울의 좌청룡인 타락산과 명당수인 청계천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보물 제1호인 동대문은 바깥으로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아서 서울 도성의 4대문 중에서 가장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의 동대문과 옹성은 모두 1869년에 전면적으로 개축한 것이다. 그리고 1899년 5월 17일에 서대문 밖 경교와 청량리를 오가는 전차가 개통되었는 데, 이 전차는 동대문의 홍예문과 옹성 출입구로 다녔다. 이 전차의 운행을 위해 동대문 바로 안쪽에 전차 차고를 설치했고 그 옆에 작은 화력 발전소를 만들어서 전기를 공급했다. 지금 이 자리는 주차장, 의류상가, 식당가 등으로 바뀌었다.

▲ 동대문, 전찻길, 발전소 연기 (1900년대 초)

위 사진에서 오른쪽의 검은 연기는 바로 전차에 전기를 공급하던 화력 발전소에서 배출하던 것이다. 전차는 동대문의 홍예문과 터져 있는 옹성 북쪽을 통해 오갔다. 위의 오른쪽 사진에서 옹성 북쪽의 아래에 설치된 전찻길을 볼 수 있다.

동대문을 경계로 길의 이름이 바뀌는 데, 안쪽 길은 종로이고 바깥쪽 길은 왕산로이다. 종로 쪽으로 한 블럭을 가면 광장시장이 있고, 왕산로 쪽으로 한 블럭을 가면 동묘가 있다. 보물 142호인 동묘의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동쪽의 관왕 묘)이며, 고대 중국의 장군인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중국식 사당으로서 임진왜란 뒤인 1602년에 명나라의 칙령에 따라 지어졌다. 왕산로는 동대문에서 청량리 네거리에 이르는 길로서 1966년에 조선 말의 의병장이었던 왕산 허위(1854~1908)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1908년 1월 13도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창의군의 1만명 병력이 양주에 모였는데, 창의군의 군사장이었던 허위를 대장으로 300여명의 선발대가 청량리 정도까지 이르렀으나 서울 공격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허위는 6월에 일제에게 잡혀서 10월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동대문 북쪽으로는 낙산을 경계로 이화동과 창신동이 있다. 이화동에는 희대의 독재자 이승만이 귀국해서 살면서 친일파와 손잡고 정권을 장악할 계획을 추진했던 이화장이 있다. 창신동에는 세계 최대의 의류시장인 동대문 시장을 유지하는 작은 의류 공장들과 배달업체들이 밀집해 있다. 동대문 남쪽으로는 여러 시장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동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자 한다면 미리 지도를 보고 어느 시장으로 갈 것인지 결정하고 가는 것이 좋다. 그런데 동대문 시장이라고 하면 워낙 의류가 유명해서 ‘패션시장’ 지도도 상세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사실 종로 5가에서 퇴계로 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광장시장, 방산시장, 중부시장 등도 모두 크게 보아 동대문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광장시장은 음식이 유명하고, 중부시장은 건어물이 유명하다.

▲ 2006년 동대문 의류 시장 지도(왼쪽) 2011년 동대문 의류 시장(오른쪽)

2.

도성은 낙산을 내려와서 동대문을 지나 시체를 내보내던 광희문을 지나 남산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두 개의 물길을 지나야 했다. 하나는 청계천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지류였다. 이 때문에 동대문 남쪽으로 두 개의 수문이 만들어졌다. 문이 다섯 개인 ‘오간수문’과 문이 두 개인 ‘이간수문’이 그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오간수문은 1907년에 철거됐고 이간수문은 비슷한 시기에 매립됐다. 그리고 10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고 두 문이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2003년 이명박이 ‘청계천 복원’을 한다면서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아스팔트를 걷어내니 어렵게 남아 있던 ‘오간수문’의 흔적들이 나타났다. 이명박은 광통교와 수표교의 복원에 이어 임꺽정이 서울을 탈출하는 통로로 이용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간수문의 복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아름다운 오간수문을 복원하는 것이 ‘청계천 복원’의 중요한 과제였으나 이명박은 일제와 박정희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남아 있던 오간수문의 흔적마저 청계천에서 모조리 없애 버렸다. 그 옆의 벽에 어설픈 모형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이명박의 ‘청계천 복원’은 사실 복원을 빙자해서 자연과 역사를 파괴한 ‘청계천 개발’이었다. 이 때문에 나와 여러 단체의 대표들은 2004년 봄에 이명박을 서울지검에 형사고발했다(홍성태, 󰡔생태문화도시 서울을 찾아서󰡕, 2005 참고).

▲ 오간수문 (왼쪽) 1900년대의 오간수문 (오른쪽)

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 중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임금께서 오간수문에 친히 오셔서 일하는 것을 보는 모습을 그린 그림). 영조 36년(1760년)의 준천을 기념해서 제작한 기록화. 부산박물관 소장. 연인원 2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소들을 부려가며 청계천의 모래를 파내 쌓았더니 작은 모래 산이 생겼다. 여기서 지금의 ‘방산동’이 유래되었다.

이간수문은 이명박에 이어 서울시장이 된 오세훈이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의 건축을 강행하면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간수문은 100년 전에 없어졌으나 이간수문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물은 흐르지 않으며 주변은 너무 답답하게 개발되어 이간수문이 무슨 장식처럼 보인다. 이명박은 자연과 역사를 내세우고 ‘청계천 복원’을 한다면서 실은 ‘명박천 건설’을 했고, 오세훈은 이명박을 흉내내서 ‘한강 르네상스’를 한다면서 이른바 ‘한반도 대운하’의 말단인 ‘한강 운하’를 강행한 동시에 ‘디자인 명품 도시’를 내걸고 세빛둥둥섬(1천억원), 서울시 신청사(3천억원),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 5천억원) 등 희한한 건물들의 건축을 강행했다. 이 세 건물들은 엄청난 세금을 써서 건축된 반생태, 반경제, 반문화, 반시민의 건물들이며, 세금의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 이 세 건물들을 하루빨리 전면적으로 감사하고 개축해야 한다.

DDP는 조선 때에 훈련도감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던 하도감이 있던 곳이다. 여기에 1925년에 동대문 운동장이 들어섰다. 오세훈은 이 땅의 역사를 완전히 무시하고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공원을 짓고자 했다. 2007년 말에 오세훈은 시민들의 비판과 반대를 무시하고 근현대의 체육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근대 유적인 동대문 운동장을 파괴해 버렸다. 오세훈은 근대 문화재인 서울시 청사의 태평홀마저 파괴해 버린 ‘밴달리스트(vandalist, 문화 파괴자)이다. 그런데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파자 이간수문을 비롯해서 많은 유물들과 유적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서울시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공원을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었으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의 건축은 계속 강행했다. 설계를 맡은 자하 하디드는 이 땅의 역사를 완전히 무시하고 내부의 효용도 완전히 엉망인 사실 조형물이라고 해야 할 희한한 건물을 설계했다.

▲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조감도(왼쪽)과 현재 모습 (사진=서울시)

희한한 DDP를 지나 겨우 남아 있는 옛 골목길을 통해 광희문 쪽으로 가면 골목이 끝나는 신당동의 길가에서 독특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김중업(1922~1988)의 ‘서 산부인과’(1965년)이다. 임산부처럼 둥글고 부드러운 외관의 이 건물은 노출 콘크리트를 이용한 형태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김중업은 잉태된 아기를 돌보고 출산을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산부인과의 특성을 콘크리트라는 거친 재료를 써서 이렇듯 따뜻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건물의 진정한 특징은 평면도를 봐야 더 잘 드러난다. 이 건물의 평면은 엄마의 뱃속에 있는 아기와 귀두를 드러낸 ‘남근’과 ‘고환’의 모습이다. 김중업은 성에 대한 금기를 넘어서 성기가 생명의 기관임을 잘 보여주었다. 길 건너에는 조선 시대에 시체를 내가던 광희문이 있다. 그 문 밖에는 사실 곳곳에 공동묘지들이 있었다. 김중업은 이렇듯 전통적인 죽음의 땅에서 아주 흥미로운 생명의 건물을 건축했던 것이다.

▲ 서산부인과 건물(왼쪽)과 평면도 (사진=http://blog.daum.net/_blog/photoImage.do?blogid=0AMo2&imgurl=http://cfile202.uf.daum.net/original/117D241B4ACF1DBB01F1D4)

3.

광희문을 지나 장충동으로 들어서서 도성의 자취를 찾아 골목길을 걷는 것도 아주 재미있다. 장충동에는 도성 위에 들어서 있는 집들이 많다. 이 동네의 개발은 1908년에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설립된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그 본사는 지금 을지로 2가 명동 쪽에 있는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었다.)가 장차 서울의 동쪽을 개발할 계획을 갖고 땅을 사들이는 것으로 시작됐다. 동척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중국 침략을 노골화했던 1931년에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본래 공동묘지가 있던 장충동과 신당동을 개발해서 이곳에 저택들과 문화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은 만주사변에 따라 서울로 진출한 일본인이 늘어난 것에 대응한 개발이었으면서 1926년의 조선총독부, 경성부 청사, 경성제국대학 등의 완공에 따라 북촌으로 일본인의 진출이 늘어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변화였다.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가 개발한 장충동 1가의 저택들은 해방 뒤에 재벌들의 저택으로 바뀌었다. 현대의 정주영이 이곳에서 살다가 그 집을 동생에게 주고 청운동으로 옮겼으며, 삼성의 이병철이 살던 집은 여전히 세째 아들인 이건희의 소유로 되어 있다. 2005년에 이병철의 저택은 공시지가 65억8000만원으로 전국 2위였는 데 2012년에는 92억원을 넘어서 7년만에 무려 37억원이나 올랐다.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는 장충동에는 부자들을 위한 저택들을 짓고, 신당동에는 중산층을 위한 ‘문화주택’을 지었다. 경성전기도 신당동, 청구동 등에 임직원을 위한 사택으로 문화주택을 지었다. 지금 신당동에서 가장 유명한 집은 박정희가 1958년에 매입해서 5.16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집인데, 이 집도 1930년대에 지어진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의 문화주택이다.

오랫동안 장충동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장충체육관이었다. 장충동 1가 이병철의 저택을 지나 길을 건너면 바로 장충동 2가 장충체육관이다. 국내 최초의 국제 규모 실내 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은 1963년 2월 1일에 개관했다. 이곳은 무엇보다 1960-70년대 최고의 대중 스포츠였던 프로레슬링과 권투 경기로 널리 알려졌다. 장충체육관은 1960-70년대의 문화사에서 참으로 중요한 곳이다. 또한 장충체육관은 정치적인 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박정희의 유신독재, 전두환의 학살독재 등이 모두 이곳에서 대통령의 형식을 취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87년 6월 10일 민중항쟁이 시작되던 그 시간에 이곳에서 전두환 일당의 민주정의당은 대통령 후보로 전두환의 반란 동지 노태우를 추대했다.

장충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장충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1900년에 고종은 1985년의 을미사변 때 순국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장충단(충성을 기리는 제단)을 세웠다.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당연히 이 제단을 폐지했고, 1919년에는 장충단 지역을 사람들이 쉬고 노는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만주사변을 일으킨 다음 해인 1932년에 일제는 장충단 공원의 동쪽 언덕에 조선 침략의 최고 지도책이었던 이토오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당인 ‘히로부미 사’(박문사)를 세웠는데,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떼어다가 그 정문으로 만들었다. 해방 뒤에 박문사는 외국 사절들을 접대하는 영빈관이 되었고, 1973년에 신라호텔이 영빈관을 인수해서 영업을 시작했으며, 흥화문은 1988년에야 경희궁으로 돌아갔다.

보도를 걸어 남산으로 올라가면 박정희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자유센터(1963년)와 반얀트리 호텔(본래 타워호텔, 1969년)을 만나게 된다. 그 건너편 숲 속에는 국립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자유센터는 이승만이 1954년에 만든 관변단체인 반공연맹의 건물로 지어졌다. 반공연맹은 1989년에 해체되었고, 정일권 등이 1989년에 그 후신인 관변단체로 자유총연맹을 만들었다. 그래서 현재는 자유총연맹이 자유센터를 소유하고 운영한다. 타워호텔은 2010년에 반얀트리 호텔로 바뀌었는데, 현대그룹(현정은 회장)이 2012년 6월에 이것을 인수했다. 이 호텔은 남산이 응봉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능선에 거대한 콘크리트 말뚝을 박아놓은 것 같다. 남산의 경관을 심하게 해치고 사유화한 대단한 흉물이다.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은 김수근의 초기 건축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자유센터는 파도를 연상하게 하는 타원형 콘크리트 지붕이 눈길을 끌고, 타워호텔은 사방에 세운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이 만드는 단단한 인상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둘 다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상당히 어설퍼 보인다. 자유센터의 마당에는 2011년 8월 25일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다. 이승만 무리는 1956년 8월 15일 남산에 무려 25m 높이의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4.19혁명 직후 시민들이 이 세계 최대의 동상을 박살내 버렸다. 이승만은 친일파와 손잡고 반공을 내세워서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였던 희대의 독재자이다. 4.19혁명 당일에만 무려 186명을 죽였는데, 그 중에는 어린 여중생도 있었다. 또 다시 이승만을 찬양하는 자들이 설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사회 퇴락의 징후이다.

▲ 남산의 이승만 동상(왼쪽) 탑골공원에 있던 이승만 동상(오른쪽)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