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를 향한 열기는 치솟을 대로 치솟아 천공을 뚫고도 남을 테니 서두는 생략하겠습니다. 간만에 미괄식 구성으로 가보죠. 거두절미하고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그래비티>는 자연과 과학과 인간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영어 단어 중에 'breathtaking', 즉 숨이 막힌다는 표현은 이런 영화를 보고 써야 한다는 걸 배우는 시간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비티>를 보는 동안 얻게 되는 시각적 체험은 길예르모 델 토로의 말마따나 '이전에 없었던 것'입니다. 종종 배경이 하나의 캐릭터처럼 중요한 영화가 있다고 말했었는데, <그래비티>가 바로 그렇습니다. 알폰소 쿠아론은 우주를 단지 캐릭터를 두는 공간에 그치도록 좌시하지 않고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래비티>에서 알폰소 쿠아론과 엠마누엘 루베즈키 등이 협력하여 이룬 기술적인 성취도는 그걸 단단히 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그래비티>는 우리가 극장에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최고의 체험을 제공합니다.

★★★★★

덧 1) 가능하다면, 아니, 가능하게 만들어서라도 아이맥스로 보시기 바랍니다. 무리하라고 강요까지 한다면 아이맥스 4D로 보세요. 왜인지 예매가 뜨질 않아 보지 못했습니다만 저는 조만간 아이맥스 4D로 한번 더 보려고 합니다.

덧 2) 알폰소 쿠아론은 윌 스미스가 아들의 생일선물을 만들어 비판을 면치 못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성과를 거뒀습니다.

아직 보시지 않았다면 이하는 가급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결론은 토했으니 이제 좀 차분하게 가겠습니다. <그래비티>는 각종 영화제에서 미리 선을 보이면서 갖은 극찬을 다 이끌어냈던 영화입니다. 이를 반영하듯이 북미에서 개봉하자마자 박스 오피스 1위를 질주하니 국내 개봉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지사! 어제는 사무실에서 도망이라도 나와 극장으로 얼른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퇴근시간이 되어 나오는 길에는 영등위 관계자분께서도 극찬했다는 얘길 듣고 아주 환장하겠더군요. 제게 저 얘길 전해주셨던 분이 저를 보고 하셨던 표현을 빌자면 "똥줄이 탔습니다" 학창시절에 과학을 딱히 잘한 건 아니지만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는 관심이 유독 많았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직접 닿을 수 없는 욕구를 영화로 해소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비티>는 처음부터 화면에 펼쳐진 거대한 우주공간과 그 속에 담긴 지구를 처연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습니다. 왜 <그래비티>가 이토록 아름다운 지구를 거듭하여 화면 가득히 담았는지는 나중에 차차 밝혀집니다. '파란 별'을 제외하면 온통 암흑 천지인 우주에서 맷과 라이언 등은 허블 망원경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맷은 우주유영을 즐기면서 시종일관 떠들고, 반대로 신중한 라이언은 그게 거슬려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런 대비의 의도 또한 나중에 밝혀지죠. 라이언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지만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발생합니다. 폭발한 러시아 위성의 파편이 맷과 라이언의 우주선을 덮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절체절명에 빠지고 맙니다.

사실 <그래비티>의 이야기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우주에서 사고를 당한 두 사람이 생과 사를 넘나들면서 겪는 상황입니다. 내러티브도 사실 단순하다면 단순합니다. <그래비티>가 'Size Does Matter'라고 주장하면서 담은 광활한 우주와 지구가 각기 뭘 은유하고 있는지도 간단합니다. 바로 사(死)와 생(生)입니다. 여기에 다소 상반된 면을 보이는 맷과 라이언이 더해지고, 각기 다른 성격(특히 라이언)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면 <그래비티>가 보여주려는 것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왜 <그래비티>가 1억 불이라는 거액을 투자해서 우주로 진출했는지, 왜 몇 년 전에 시도하려다가 기술적 한계에 부딪혔던 걸 포기하지 않았는지 명확해집니다.

이걸 설명하고 이해하려면 <그래비티>의 도입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비티>는 자막으로 우주 환경에 대한 간략한 묘사로 시작합니다. 이 문구 중 마지막은 “우주에서 생명체는 살 수 없다”입니다. 이런 우주에서 맷과 라이언이 사경을 헤맨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이언이 어떤 인물인지 밝혀지면서 <그래비티>의 상황은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라이언은 딸을 갑작스레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로 잃으면서 삶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차에 타면 멘트 없이 음악만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들을 정도로 외부와의 소통마저 단절하고 살았습니다. 그랬던 라이언이 원천적으로 생명과 가장 먼 동시에 죽음과 가장 가까운 우주에서 당한 사고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면서 소통과 관계의 의의를 전파하고자 했던 맷에 의해 삶에 대한 끈질긴 집착과 의지를 다시 발현합니다.

이것이 결국 알폰소 쿠아론이 <그래비티>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 즉 살아간다는 것과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가장 극적인 고찰입니다.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극한의 우주에서 역으로 삶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에서 참 아이러니한 영화죠.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래비티>의 우주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래비티>는 '파란만장한 우주여행'이 아니라 '아케론을 건너고 있던 라이언의 회귀'에 더욱 가깝습니다. 또는 우주공간에서 구사일생으로 우주선에 도착해 마치 편안히 영면을 맞이하는 인간처럼 보이다가 이내 어머니의 자궁에 잉태된 태아로 돌아가는, 물리적인 죽음은 아닐지라도 관념적인 죽음에 이르렀던 라이언이 환생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가 <그래비티>입니다.

사실 <그래비티>의 각본은 아쉬운 면이 더러 있습니다. 캐릭터를 좀 더 견고하게 구축했어야 한다거나, 맷과 라이언이 뜻밖에도 재회(?)하는 장면에서의 대사는 일부 작위적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극복하고 있는 것이 경이적일 정도로 훌륭한 기술을 발판으로 삼은 알폰소 쿠아론의 연출입니다. 삶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은 숱한 영화에서 시도했던 것이지만, <그래비티>만큼 시종일관 극적인 표현으로 채운 것은 전무하다고 확언해도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건 알폰소 쿠아론이 기술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이 영화를 기술로 시작해 자연을 거쳐 인간미 가득한 드라마로 귀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비티>가 단지 기술력의 과시에 그쳤다면 이렇게까지 탄복하지 않았을 겁니다.

알폰소 쿠아론은 1억 불을 소비하고 기술의 한계까지 넘으려고 몇 년을 기다린 끝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바타>를 보고서야 자신이 구상한 영화의 제작이 가능하겠다고 판단한 알폰소 쿠아론은, 비로소 <그래비티>를 완성하여 관객을 향해 “자, 봐라. 이토록 아름다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줄곧 망각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시이 마모루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렸던 <스카이 크롤러>와 겹쳐졌습니다. 일부러 전쟁을 유지하여 역으로 평화를 추구하게 만드는 모순적인 세계에서 주인공은 홀로 읊조리면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항상 지나는 길이라고 해서 늘 경치가 똑같은 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일까? 아니 그것뿐이니까 안 되는 것일까?"

<그래비티>로 알폰소 쿠아론이 전하고 싶은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역사상 가장 격정적이고 찬란하게 전달하고자 우주를 무대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래비티>는 이것을 완벽에 가깝도록 구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공간적으로는 규모를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무한하지만, 서사적으로 허락되기에는 협소하기도 한 우주를 최적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덕분에 미약한 인간은 방대한 우주와 대비를 이루면서 보잘것없는 존재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 우주만큼 거룩한 인간의 의지를 역으로 강조하여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맷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빠지고도 우스갯소리를 잃지 않은 것도, 리얼리티는 떨어질지언정 이런 의미에서 가히 허용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제시한 도입부에서 말했다시피 <그래비티>의 기술적 성취도는 어떤 경지에까지 도달했습니다. 특히 맷이 젯팩을 타고 우주유영을 하는 장면은 대체 어떻게 촬영한 것인지 경이적일 따름입니다. 카메라가 라이언을 정면에서 잡았다가 서서히 미끄러지듯이 접근하여 시점 촬영으로 갔다가 다시 빠져나오던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알폰소 쿠아론 특유의 롱테이크는 우주라는 공간과 맞물리면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무중력인 공간적 특성을 관객에게 실감나도록 표현하는 데는 이 롱테이크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렇게 눈이 호강하는 기술력을 드라마와 조화시켜 이룬 성과가 <그래비티>니, SF 영화의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어찌 감탄을 마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맷과 라이언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 등은 과학적 오류가 보이기도 했으나, <그래비티>는 구태여 그걸 들먹이면서 흠집을 내고 싶은 생각조차 사라지게 합니다.

■ 중력(Gravity): 1. 지구 위의 물체가 지구로부터 받는 힘. 지구와 물체 사이의 만유인력과 지구의 자전에 따른 물체의 구심력을 합한 힘으로, 그 크기는 지구 위의 장소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며, 적도 부근이 가장 작다. 2. [같은 말] 만유인력(질량을 가지고 있는 모든 물체가 서로 잡아당기는 힘) -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

3. 생의 의지를 상실한 사람을 일깨워 나락으로부터 다시 끌어올리는 힘 - 출처: 내 생각, 불만 있으면 담배도 사셈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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