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사회>, 최태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13년 9월 2일 발간

작년에 내가 발행, 편집하는 잡지가 <월간잉여>라고 말했을 때 웃음을 터뜨리는 이들이 왕왕 있었다. 장난치지 말라며, 그런 잡지가 정말 있냐며 정색하는 사람도 있었다. '잉여'라는 말에서 어딘지 장난기가 느껴졌나 보다? 하지만 올해 들어 '잉여'라는 언어의 위상은 변한 것 같다. 진지 빨고 잉여를 논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출판계도 잉여잉여하고 있다. 올 4월 발간된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부제는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 생활'이었다. 9월에는 <잉여사회 >라는 책이, 10월에는 <속물과 잉여>라는 책이 나왔다 .
이 중 <잉여사회 >는 일종의 '잉여학' 개론서로 보인다 . <잉여사회 >의 저자 최태섭은 잉여들이 흔히 치는 '드립'을 반영한 소제목 ('20대 개새끼론 ,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찰진 소리 있나니 ...''후로게이들의 역사 ' '우린 안 될 거 야, 아마' 등) 아래로 잉여의 개념과 등장배경을 펼쳐내고 ‘잉여 현상’에 대해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일자리 수를 줄여가고 "노동의 전인적 착취를 위해" 비물질 노동을 일반화시키고 있다. 이는 노동자로 하여금 스펙경쟁에 몰입하게 만든다. 정규직 노동자가 되고 싶은 청년들은 학력을 취득하고 언어공부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인사 담당자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인성' '태도'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방식'들을 자신의 내면에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는지 경쟁하게 된다 . 하지만 이렇게 준비된 인재들도 값싼 노동력으로착취당하거나, 착취당할 기회마저 박탈당한다.
그리하여 잉여의 존재가 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잉여'라고 자칭하며 자조한다. 자조의 움직임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가장 활발히 드러나는데, 병맛(병신스러운 맛 ) 코드의 웹 게시물이나 웹툰도 그 예로 볼 수 있다. 병맛은 "함량 미달에, 개판 오분 전이며, 무식해 보이고 , 정말이지 '병신'같은데, 뭔가 불가항력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견딜 수가 없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들의 발밑에서 점점 강하게 느껴지는 불안한 흔들림과의 연관 속에 존재"하며 우리를 "'ㅋㅋㅋ'의 연대로 이끌기도 하지만 끝 모를 적대의 최전선으로 밀어넣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설정된 대상들에 '함께' 적대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며 자존감을 얻는 '일베'는 후자에 속한다.
현실에서의 나는 현실에 대해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소외되고 미미한 존재이므로 가상으로의 도피를 감행했다. 그리고 이 가상은 오로지 현실원칙의 침범을 막아냄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현실에 대해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접촉이 불가피하다. 어떻게 하면 나의 가상을 망쳐버리지 않으면서도 현실과의 접촉을 통해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인가.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도 같은 답변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바로 커뮤니티를 통해 , 즉 가상의 연대성을 지키고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통해 이 영향력의 증폭이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현실에서도, 또 가상에서도 혼자의 힘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힘이 사이버 공간에서 익명적 존재들의 결집을 통해 생성되기 때문이다. (p.200)
하지만 잘못 설정된 대상에 대한 공격성 표출이 삶에서 실질적인 이득으로 결실 맺기란 어려운 일이다. "근본적인 불안과 불만"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을 통해 과거 10명이 할 일을 혼자 떠맡게 된 사람이 과로로 죽어가는 동안, 다른 9명 은 손가락을 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과로로 쓰러질 때만 나머지 9명 중 1명에게 과로할 기회가 주어진다 "고 작가가 설명한 현재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불안과 불만을 안고 끝없이 경쟁하며 살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 속에 살아가는 99%는 잉여가 남의 얘기만은 아니다 .
사람들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 "너희들이 진짜 잉여냐"는 물음에 이토록 힘을 쏟는 이유는, 막연한 불안감의 실체를 마주하고 나와 그것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듯이 어떤 절대적인 진실이 나타나서 모든 혼란을 평정하고 모든 사물과 사람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진짜 잉여와 가짜 잉여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흐름과 경향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들의 시대가 더 많은 잉여들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유 지되고 있다는 것, 이 문제가 특정한 누구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들(99%)'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p252-p253)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자신은 다를 거라는 자의식 과잉에 빠지지 말고, 박탈감으로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말고, 두 눈 부릅뜨고 현실을 직시하고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며 계속 생존해나가라고.
쉽지 않은 주문이다 . 하지만 <월간잉여 >와 함께 한다면 가능할 지도 ...
한 기고자가 <월간잉여 >에 투척한 글 일부를 공유하며 글을 맺는다.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월간잉여의 공이 컸다. 일단 추석모임과 크리스마스 파티로 오갈 데 없는 영혼을 구제해줬다. 사생대회에서 만나는 월잉인들도 반가웠다. 무엇보다 정기적인 독자위원회 모임으로 일요일에 스케줄을 만들어줬다. 이런 오프라인 모임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잡지에서 만나는 사연으로도 어딘가에 살아있는 잉여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지만,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보면 뭔가 다르다. 나만큼이나 짠하고 안 된 인간들이 모여 함께 치맥을 하다보면 인류애랄까, 박애랄까 아무튼 정체모를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 마치 비밀결사조직 같은 느낌이 랄까. 죽고 싶을 만큼 외로운 순간에는 함께 호흡하고 말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난다.

가장 큰 성과는 월간 잉여를 통해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 누가 그랬는데 이미 쓰여진 슬픔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고 했다. 친구들은 저만치 앞서가는 데 나만 혼자 섬이 된 것 같은 데서 오는 외로움, 불안, 두려움 그리고 잉여로 만든 세상에 대한 분노까지 글로 싸지르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잉여 생존기를 보내주는데 머릿수 하나 더 보탠다고 쪽팔릴 게 뭔가. (중략) 세상은 나를 잉여로 만들었다. 아무리 노크해도 원하는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까지 스스로를 가혹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 매일 피터지게 경쟁해야 하는 대한민국 에서 이십 년 넘게 살아남은 것만 해도 대견한데 더 이상 뭘 하라고 몰아세운단 말인가. 비판받을 건 세상이지 내가 아니다. 그러니까 너그러워지자. 측쿠시 ‘잉여부대 탈영병 , 측쿠시입니다’, <월간잉여 14호> p.79

잉집장

<월간 잉여>는 잉여를 위한 잉여에 의한 잡지입니다. 14호까지 발간됐습니다. 이름만 월간 잉여임. 갈수록 발행텀이 길어지고 있음. 발행인 겸 편집인이 개털인데다 게으른 탓입니다. 그 발행인 겸 편집인이 저임. 최근 이상한 웹진 커뮤니티 사이트도 만들었는데 놀러오세요. http://ingch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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