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시야는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된 것 같다. 큰 이야기들은 어딘가 허황되고, 정밀성을 결여하거나 의도에 의해 왜곡된 것처럼 느껴진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를 꾸밈없고 소소하게 살아가는 일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할 ‘일상’은 우리가 지켜야할 궁극의 가치로 보인다. 정치는 스쳐 지나가는 것이며 가능한 범위 내에서 참여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올바르다고 여겨진다.

나 역시 그러한 삶의 방식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혹은 그러한 시야가 허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런 회의를 가지고 펼쳐보게 된 것이 <나치시대의 일상사>(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의 일상사>, 김학이 역, 개마고원, 2003)다. 나치시대를 지배했던 일상의 느낌과 반응을 기술한 이 책에는 나치가 급부상한 원인이 소개되어 있다.
나치 독일을 생각할 때 가장 놀라운 점은 나치가 단기간에 부상하여 정권을 획득한 사실이다. 나치당은 1930년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란한 이슈를 일으킨 것에 비해 지지는 보잘 것 없었다. 가령 1928년 5월 선거에서 나치는 전체 국민의 2.6%의 지지밖에 받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 선거인 1930년 9월 선거에서 나치는 총 18.3%의 지지를 얻으며 급부상했다. 이는 “독일 역사상 한 정당이 이룬 가장 엄청난 도약”(라파엘 젤리히만)이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정당과 정당 사이에서 벌어진 그 어떤 입당 파동도 필적 할 수 없는 규모”(마르틴 브로샤트)였다. 이 도약은 거품이 아니었다. 2년 후 치러진 1932년 7월 선거에서 나치당은 총 37.4%의 지지를 얻고, 부르주아 중도 정당과 우익정당의 유권자 75%를 흡수하는 위력을 보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나치시대의 일상사>의 저자 포이케르트는 패전 후 나치당에 대거 참여했던 사람들을 주목한다. 나치에 가입했던 사람들은 하위계층으로 분류되는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중간계층, 정확하게는 하위 중간계층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존재가 대단히 위태로웠거나 아예 좌절해버린”,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점포의 포기, 패전 이후 사회 복귀의 실패, 직장이나 직종의 잦은 변경, 반복되거나 장기화 된 실업상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요컨대 나치당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전엔 중간계층으로 분류되던 이들이었으나, 경제적 요인에 의해 하위 계층으로 떨어져 본인의 사적 영역에서 밀려났다고 느끼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나치당에 참여한 이유로 세 가지가 꼽힌다. 첫 번째는 나치가 주도한 운동이 그들의 비관적 삶을 좀 더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투쟁과 운동은 사람들의 공허한 시간을 채워주었고, 스스로를 거대한 기계의 필수적인 부품으로 인식할 수 있게 했으며, 당의 사무를 보조한다거나 행진 대열에 서는 것에 고귀한 의미를 부여해, 그것이 지도자를 위한 희생이며 운동의 최종승리를 위한 기여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p45) 말하자면, 사적 영역이 붕괴된 현실에서 나치의 대의에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선동적인 강령을 실천하는 삶의 방식에서 매력적인 ‘일상’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운동의 성격에 있었다. 나치당이 제시한 정책은 일관성이 없는 것이었고(가령 나치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운동에서는 ‘피와 흙’의 전통적인 관념을 제시하고, 도회지 노동자들을 대할 때는 변화의 열망만을 제시하곤 했다), 이데올로기 또한 조악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운동의 형식이었다. 나치의 운동은 감정과 의지를 극도로 분출시키는 형식에 준종교적인 의식이 결합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나치의 집회란 무언가가 벌어지고 고조되며 격렬한 방식으로 청산되고 신적인 진정성이 나타나는 형태를 띠었다. 사람들은 이를 특별한 의미체로 받아들였는데, 그것의 핵심은 “전망과 기회가 결핍된 세대의 생활세계와 대조되는 격상된 의미 내용”(p48)이었다. 말하자면, 비참한 현실을 일거에 전복시키고 신적 의지가 담보된 ‘유토피아’로 도약하고 싶은 열망, 최소한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나치 운동이라는 의식(儀式)을 통해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이유로는 나치 운동을 통해 자신의 개인사적인 상처와 분노를 공격적으로 터뜨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치 돌격대의 경우에서처럼 나치의 집회는 자주 가투로 나타났는데, 이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정당성과 불가피함 또는 무자비함을 강조했다. 가령, “폭력은 언제나 상대방이 먼저 저질렀고, 그렇기 때문에 이에 더욱 무자비하게 대응하는 것이 정의롭고 정당하다”(p48) 같은 가투 후 사후진술은 공격성을 타인에게 전가시키고 분출시키는 매커니즘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나치의 부상은 사적 영역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원민중적인 감정을 폭발시키면서 일어났다. 이들을 추동한 것은 박탈의 좌절감을 일소시키고, 현실을 혁명적으로 전복하며, 사회현실에서 받은 상처를 분출하는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단지 사적 영역에서 밀려났다는 감정만으로 이러한 현상이 추동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좀 더 근본적인 혼란이 내재해 있었다.
나치의 부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제정에서 근대적 사회로 이행한 1920년대의 동요에 주목해야 한다. 포이케르트는 이 시기 일어난 변화를 “근대화 과정에 의해 초래된 동요”로 정의한다. 이때 일어난 동요는 생산관계부터 성적(性的) 지위까지, 사회 계층구조부터 세대 간 관계의 변화까지, 사회적인 영역에서 개인적인 영역까지 아우르는 전 사회적인 혼란이었다. 문제를 한층 더 과격하게 만든 것은 이러한 혼란이 단계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최단기간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효과가 대단히 도발적이었고, 삶의 굴절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전사회적 변화를 “체제의 파탄과 몰락의 원인”으로 인지하도록 만들었다.
즉 변화의 인과관계가 너무 복잡했고 압축적이었기 때문에 변화와 혼란이 ‘체제의 실패’로 단순화 된 것이다. 따라서 적대의 대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설정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실패한 원인으로 ‘음모론’이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즉 “유태인, 자본가, 볼세비키”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배하는 실체이며 이들이 독일인의 삶을 파탄내는 원인이 된 것이다. 이는 회생의 조건으로 반유대주의, 반자본가, 반공산주의를 가시적인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나치당의 표어와 일치했다. 결국 근대화 과정의 혼란은 체제의 실패와 음모로 환원되었고, 해결책은 “단발의 과격한 타격”으로 설정되었다. 단순명료한 원인과 효율적인 해법이 나치의 원민중적인 운동의 특징이었고, 이는 혼란에 지쳐 있던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포이케르트는 여기에 한 가지 원인을 더한다. 당시 사회적 명사들과 기존 부르주아 정당들은 나치당을 파트너로 인정했는데, 이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나치당을 신뢰할만한 정당으로 인식하게 했다. 문제는 왜 명사들과 기존 정당들이 나치당을 파트너로 인정했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헤게모니의 위기에 직면한 구엘리트”가, “한편으로 그들의 권력을 보장하기 위해 새로운 독재적 메커니즘을 필요로 했고, 다른 한편으로 하위의 사회계급들의 동의를 얻어낼 새로운 헤게모니 기관을 필요로 했”음을 지적한다.
즉 자본주의의 구조를 유지한 채 기존 헤게모니를 대체할 새로운 대의체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는 정치체를 재편해야 하는 과정이었고, 무너져가는 부르주아 정당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당시 나치밖에 없었다. 기존 정치세력의 해체와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세력의 부재가 히틀러 정권의 출현을 압도적으로 현실화시켰던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정리한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적 위기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고, 그 특수 양태는 패전과 미완의 혁명으로 취약해진 부르주아 헤게모니 체제가 간전기에 해체되던 와중에 노동운동 역시 다수의 합의를 도출해낼 만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다.” -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김학이 역, 개마고원, 2003, p60
나치의 부상은 세 가지 원인이 중첩되어 나타난 것이다. 경제적 요인에 의해 사적인 영역에서 부당하게 박탈당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퇴행적인 대중운동, 혼란으로 인지된 전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상적 정치세력의 부재. 이 원인을 되새기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사적인 전망의 허약함이었다. 당시 나치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 속에는 혼란스러운 현실을 일소하고 평화롭고 안락한 ‘일상’을 되찾고 싶다는 대중의 소박한 희망이 놓여 있었다. 매일 아침 일터에 나가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저녁에는 가족과 평범한 식사를 하고 싶다는 사적 영역의 욕구가 퇴행적인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악몽으로 변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사회는 개인에게 선택과 책임을 무겁게 묻는 것만 같다. 평범한 직장과 평범한 하루와 평범한 인간관계라는 ‘일상’을 위해, 우리에게는 적절히 조절되는 경제와 신뢰받는 정치세력들의 온건한 투쟁과 반동적인 이데올로기를 경계하고 선택하지 않을 책임이 주어진다. 그리고 어떤 요소가 파괴될 때, 이를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리고 해결책을 모색할 이성적 탐색과 합의 그리고 희생을 감수할 의지가 요청된다.
이러한 것이 ‘일상’으로 축소된 사적인 시야 속에서 가능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변해버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정치경제의 거시적 변화를 인지하고 퇴행적 이데올로기를 거부할 지성과 연대의 의지를 갖출 수 있을까? 총력전과 유대인 학살이라는 결과를 맺은 독일의 역사를 읽으면서 해보는 씁쓸한 생각이다.

고덕영

2006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용돈이 궁한 탓에 한 번 사면 오래 읽을 수 있는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그런 책들을 오독하다 보니 '인문 딜레당트'로 '전락'하여 이런 저런 책을 뒤적뒤적하며 나락에 빠진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로 인문 쪽 책을 건너다닌다. 한 아이의 아빠이자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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