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직무능력검사’(SSAT) 13일 국내외 84개 고사장에서 일제히 치러졌다. 하반기 5500명을 공개채용할 예정인데 시험응시자는 9만2천여명이었다. <조선일보>는 작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자수가 66만명이었고 ‘국민 자격증’이라 불리는 공인중개사 시험 연 응시자수가 15만명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국내 최대 기업의 입사 시험 규모가 '사회현상'이 될 정도로 커진 것”이라 평했다.

삼성에 입사하고 싶은 이의 숫자가 9만2천여명에 그칠 리 없다. ‘9만2천여명’은 그 수십 배를 넘는 입사희망자 중 본인이 희망을 실현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이들의 숫자일 것이다. 입사시험의 유형이 회사별로 달라지고 있어 희망 회사 시험유형을 따로 공부하는 현실에서 ‘9만2천여명’이란 숫자는 적은 것이 아니다. 삼성은 그렇게 우리 사회에 하나의 표준으로 기능한다. 대기업 정규직의 상징이며 피라미드의 최상단이다. <조선일보> 기사에 나왔듯이 SSAT 시험은 이제 ‘삼성 고시’라고까지 불린다.
▲ 14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
하지만 그 ‘표준’은 매우 특별한 ‘예외’다.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이었고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이었던 경제평론가 이원재는 그의 저서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에서 한국 사회를 100명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비유한다. 그럴 경우 이 마을에선 59명이 일을 하고 있고 그중 28명이 정규직, 14명이 비정규직, 17명이 영세자영업자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매출액 상위 2000개 기업에서 일하는 이는 3명, 우리가 이름을 알 만한 559개 상장 제조기업에서 일하는 이는 단 1명이다.
559개 상장 제조기업은 한국 경제 GDP의 11%를 점유하지만 고용인구로는 1% 밖에 점유하지 못한다. 삼성은 이 1%를 559개 기업이 나눈 어느 몫만을 고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삼성 내부에서도 “삼성에는 두 개 계열사 밖에 없다. ‘삼성 전자’와 ‘삼성 후자’다”라는 농담이 있는 등 사실상의 위계서열이 있다.
즉 ‘삼성이라는 표준’은 ‘삶의 표준’이 아닌 ‘동경의 표준’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 ‘동경의 표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삶의 표준’의 질을 낮추고 있다. 민주당 민병두 의원실의 최병천 보좌관은 과거 <미디어스>의 좌담에서 “한국에서 대기업 정규직이 되면, 사실상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복지가 잘 되어 있다고 평하는 북유럽 수준의 복지를 경험한다. 대기업 회사 복지가 그렇게 잘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퇴사하고 나면 전부 다 사라진다. 사실 복지라는 건 퇴사를 하고 난 다음부터 필요한 것인데 말이다”라고 평했다.
또 최 보좌관은 “경제주체에게 혁신을 요구하려면 ‘리스크’(위험)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리스크’를 개인이나 기업이 모두 감당하라고 하면 도전이 어려워진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는 ‘자본의 리스크’만 관리해준다는 것이다. 개인은 해고를 당할 경우 홀로 헤쳐 나가야 하는데, 대기업은 비정규직과 협력업체에게 손실을 전가할 수 있는 구조다”라고 지적했다.
삼성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자본주의적 과제, 근대적 관계가 실현된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경제 평론가 이원재는 삼성, 특히 삼성전자는 이윤극대화라는 잣대를 가지고 부하직원이 상사에 대해서도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조직이라고 설명한다. 사장이나 상사의 의견에 토 달 수 없고 절대복종하는 한국 사회의 여타 기업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삼성은 근대적 과제를 다하지 못했다는 현실에 놓여 있다. 근대적 관계로 본다면 회사와 노동자의 관계가 계약관계여야 하는데, 삼성은 ‘무노조’를 표방하는 노무관리로 노동자를 감시하는 시스템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는 삼성 역시 사회 각 부문으로 ‘위험을 전가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9월 16일 고용노동부는 삼성전자서비스가 파견법(파견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고용노동부는 원청과 협력사간 업무가 모호한 문제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고용노동부 발표 이후 30일 삼성전자서비스는 근로감독 결과에 대한 후속조치로 협력사 상생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수시근로감독 결과가 고위 공무원의 입김으로 막판에 뒤집어진 것이란 주장이 제기되었다. SSAT 시험에 9만2천여명이 응시한 그 13일, 민주당 은수미 의원은 삼성전자서비스 수시근로감독에 참가한 고용노동부 A근로감독관의 녹취록을 공개했다.
이 자료에서 A감독관은 "보고서 발표가 한 달 연기되기 전까지는 (분위기가) '어떻게든 우리가 해 나가자, 잡아나가라'였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우리가 바람이 들어가지고 이거 불파(불법파견)다, 그랬는데 갑자기 실장 보고가 들어갔다, 거기서 바람이 빠져 버렸다"고 말했다. 또 그는 "나는 접근도 할 수 없는 고위 공무원 입김이 내려온 것"이라며 "이마트는 안 그랬다, 분위기가 180도 확 바뀌어버렸다"고 설명했다.
이 의혹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삼성이 한국 사회를 대했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것은 사실이다. 삼성의 행동은 그들 조직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이다. 파견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것보다는, 고용노동부 고위 공무원에게 상품권을 건네주며 관리하는 것이 이윤극대화에 도움이 된다. 공장 위생조건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노동자가 백혈병에 걸리더라도 산업재해 판결을 받지 않도록 손을 쓰는 것이 이윤극대화에 도움이 된다. 과거 김용철 변호사가 현 황교안 법무부장관 등 많은 검사들에게 상품권을 줬듯이 관료들을 관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렇게 삼성의 이윤극대화를 위해 행동하는 것은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다. 삼성은 자신의 모든 위험을 사회로 전가한다. 태안반도에 기름을 흘려도 삼성은 최소한의 비용만을 생색하며 낼 뿐 사태는 국민 성금과 청년들의 자발적인 노동력으로 수습된다. 그렇게 해서 삼성은 글로벌경제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게 되었고 직원들은 북유럽 시민 못지않은 복지를 누리지만 그 대상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내부의 간접고용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입장에서 삼성을 동경하는 것은 합리적인 일이다. 하지만 사회 전체의 문맥에서, 사회문제의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엔, ‘동경의 표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삶의 표준’을 파괴하는 비합리적인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
지난 십여년간 대기업들은 자신의 위험을 사회에 전가했고 사람들은 삶이 점점 더 팍팍해진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제는 중소기업 협력업체도 간접고용된 비정규직도 대기업 본사에 착취당하는 영세자영업자들도 더 내줄 것이 없다.
삼성 등 대기업이 계속해서 안이하게 이들을 쥐어짜서 경쟁력을 확보하려 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다. 삼성은 승승장구할 때 미래를 고민해야 하며 이 사회의 구성원들도 대기업이 글로벌경제에서 얻은 성취를 사회 전체로 ‘흘러내리게 할 방도’를 고민해야 한다. 마침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14일 저녁 <JTBC> <뉴스9>에 출연해 삼성의 '노조무력화' 전략 관련 문건의 내용을 전격공개한다고 한다. 이런 내용들을 예의주시하고, 일단은 이번 환노위 국정감사에서 ‘삼성 증인’을 채택할 수 있도록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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