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메인보드 유상수리 과정에서 재사용된 부품을 새 부품인 것처럼 속여 교체했다는 사실이 보도돼 파장이 일었다. 삼성전자는 방송 다음날 즉각 사과했지만 소비자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MBC <시사매거진 2580>은 13일 ‘A급 정품이라더니…’ 리포트를 방송, 삼성전자 PC 수리과정에서 중고부품이 새 제품으로 둔갑했다는 점을 보도했다. 다수의 소비자들이 A급 정품으로 교체될 줄 알고 유상수리를 했지만, 실제로는 R급(재사용된 제품, 리퍼비시) 제품이 사용됐던 것이다. 이번 보도를 통해 소비자들이 두 배 가격을 들여 오히려 수명이 더 짧은 제품을 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MBC '시사매거진 2580' 13일자 보도 (화면 캡처)

책임 떠넘기기, 어설픈 해명… “삼성에서 몰랐다는 건 말이 안돼”

삼성전자 서비스센터는 ‘혹시 교체 시 사용된 제품이 R급이 아니냐’는 취재진의 물음에 “R급은 아닙니다. 새 보드에요”라고 잘라 말했지만, 같이 제조번호를 확인해 본 결과 이전 제품번호가 나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전 제품번호가 나왔다는 것은 고객에게 한 번 판매됐던 제품이라는 의미다. 이에 서비스센터는 R급과 A급 메인보드가 포장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서비스센터에서 일했던 전·현직 직원들의 말은 달랐다. 그들은 특정 메인보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중고부품이 A급으로 둔갑됐다고 털어놨다. 한 직원은 “고객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크다. 하지만 말하면 저희가 회사에서 문책을 당할 수도 있어서…”라고 말했다.

취재진이 특정 메인보드에서 이 같은 ‘둔갑’이 일어났다는 점을 지적하자, 삼성전자는 “전국 서비스센터에 나가 있는 해당 메인보드 대부분이 R급임을 확인했다”면서도 “핵심 부품인 메인보드 수리는 협력업체가 맡고 있다”고 말했다. 일단 과실 책임을 협력업체에게 넘긴 것이다. 협력업체 쪽에선 오히려 “R급, A급은 잘 모르겠다. 우리는 포장만 하니까”라고 맞받았다. 이후 삼성전자는 A급, R급이라는 표시만 보지 내용물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 몰랐다고 설명했다.

서비스센터 직원들은 이미 이런 사실을 충분히 본사 쪽에 알렸다고 꼬집었다. “수원으로 교육을 가면 교육 담당자분들한테 얘기를 했다. A급으로 수리해야 되는데 R급으로 되고 있다고… 삼성에서 그걸 몰랐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정태명 성균관대 정보통신대학 교수도 “쓰던 제품은 아무래도 열이나 먼지 때문에 수명이 어느 정도 감소됐다고 봐야 한다”며 “리퍼비시된 제품을 신제품이라고 파는 것은 명백한 사기”라고 일침을 가했다.

몇 차례의 어설픈 해명 끝에 삼성전자는 비로소 공식입장을 내놨다. 삼성전자는 “저희 회사의 관리 소홀로 A급과 R급이 일부 혼용되어 사용됐습니다. 관리 소홀로 인한 저희 회사의 책임을 통감하고 이번 문제 보드의 혼용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위에서 발생했는지 재제조 업체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방송 다음날인 14일, 공식 블로그에 사과문을 게시했다.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이번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깊이 반성하고 있다. 책임을 깊이 통감하며, 앞으로 이런 잘못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문제가 된 모델의 A급 유상수리를 받은 모든 고객을 대상으로 수리 금액 전액 환불을 실시하겠다고 덧붙였다.

반도체 공장서 일하던 피해자 소식에 ‘삼성전자’ 이름은 빠져

민주당 은수미 의원은 시민건강증진연구소와 함께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진료비 청구 자료(건강보험공단 제공)’를 분석한 결과, 반도체 산업 종사 여성노동자의 자연유산 위험도가 비경제활동 여성에 비해 최대 1.8배나 높았다고 13일 밝혔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공정 근무 노동자들의 난치병에 대해 “개인 질병일 뿐 직업병은 아니다”라는 태도를 고수하는 가운데, 여성의 생식보건 문제가 통계로 처음 정리된 결과라 주목을 받고 있다.

보통 일요일에 나온 보도자료는 신문사들의 월요판과 아침 방송뉴스에 반영된다. 하지만 꾸준히 문제제기되고 있는 반도체 산업 종사 여성들의 질병 문제를 다뤄 유의미했던 이 통계 결과는 14일 오전 현재 KBS <뉴스광장>에서만 보도됐다.

▲ KBS 뉴스광장 14일자 보도. 반도체 공정 근무 노동자의 사연에서 '삼성전자'라는 설명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화면 캡처)

KBS <뉴스광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7년간 근무한 박민숙 씨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박민숙 씨는 퇴사 후 3년 만에 임신했지만 자연유산을 겪었고 불임 치료 끝에 겨우 임신했다면서 “7년 불임인 친구, 10년 불임인 언니도 있다. 아픈 사람이 더 이상 안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리포트에서는 피해자가 삼성전자에서 근무했다는 내용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삼성전자를 연상시키는 로고조차도 노출되지 않았다. 은수미 의원은 이를 두고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불임, 종양, 갑상선질환을 앓고 있는 피해자 소식, KBS 아침뉴스에서 ‘삼성전자’ 이름은 빼고 방송. 산재보험료감면액이 868억 6천만원으로 1위인 삼성의 힘 탓일까요?”라는 글을 트위터에 게재했다.

13일에는 “삼성전자 등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가 보통여성보다 최대 84%나 더 많이 자연유산하고 불임, 기형아출산에 암까지 발생. 방송 부탁하니 KBS만 아침뉴스에서 다룬다고. 재벌의 이익보다 여성과 아이들의 목숨이 중합니다. 제발 보도해주세요”라며 보도를 호소하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 관련 보도를 호소하는 은수미 민주당 의원의 트윗

‘이윤 극대화’ 좇는 삼성의 ‘민망한 민낯’

부품 수리 중 벌어진 과실과 반도체 공정 근무 노동자의 피해 사례. 언뜻 보면 서로 별로 관계없는 일 같지만, 둘 사이를 연결 짓는 삼성전자의 핵심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윤 극대화’이다.

과거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근무했던 이원재 전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은 <미디어스>의 삼성 관련 좌담에서 “전무님, 그렇게 이야기하면 이윤이 안 남습니다”라며 사원이 전무에게 따지는 모습을 떠올리며 ‘이윤 극대화’가 지상과제가 된 삼성을 목격했던 경험담을 털어놨던 바 있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의 지상과제는 언제나 ‘이윤 극대화’였고, 그것이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 글로벌 기업 삼성은 가격이 절반 수준인 R급으로 유상수리하면서 A급의 가격을 받았다. 소비자를 속이더라도 비용을 최대한 줄여보자는 심산이었을 테다. 반도체 공정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난치병 발생도 근본은 다르지 않다. 노동자들은 안전교육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보호도구도 없었으며, 환기시설도 갖추지 않은 노후화된 시설에 계속 노출됐다. 2007년 황유미 씨의 백혈병 사례가 이목을 끌자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삼성은 본질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상황 자체를 막는데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여전히 삼성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분기마다 매출 신기록과 순익 신기록을 세웠다는 뉴스가 새롭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부품을 속여 팔고, 불리한 보도에선 회사 이름을 지우는 것으로 대응하는 '글로벌 기업'의 민낯을 보자니, 어쩐지 '글로벌 기업'이라는 그 거창한 칭호가 한없이 민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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