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종영한 ‘현시연 2대째’ 여자5 남자2다. (애니플러스)

타자를 접하는 두 가지

사람이 자기와 다른 것, 타자를 받아들이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직접 그 사람과 접촉하면서 스스로 인지의 틀을 구축하고 이해하는 방법과 (문자 그대로 둘 사이를 매개하는) ‘매체(media)’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의 거대화된 사회에서 개인이 인식하는 인식해야만 하는 세계는 무한정 넓어졌지만, 인간의 눈과 귀가 수백 킬로미터 거리에서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며 사람을 일일이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주어진 시간이 늘어난 것도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거의 모든 타자를, 인지가능할 정도로 적당히 솎아주고 정리해주는 매체를 통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매체는 형식적으로는 감각기관의 연장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내가 아닌 어떤 누군가가 제공해준 타자에 대한 해석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기술이 더욱 발달함에 따라 형식적 한계는 갈수록 돌파되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거의 모든 사람과 거의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것이 사실상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 기술로 극복가능한 형식차원의 한계와 달리, 매체가 갖는 내용적 한계는 보다 근본적이다. 모든 타자에 대해 직접 부딪혀서 이해한다는 이상적인 방법이 불가능한 이상, 남은 방법은 둘뿐이다. 아예 타자들을 이해하는 것 즉 사회적 감각을 포기하고 완전히 고립하든지, 매체 즉 다른 누군가의 해석에 의존하는 것이다. ‘어떤 누군가의 해석’인 이상, 왜곡과 조작의 논란에서 언제나 자유로울 수 없다는 치명적인 한계에도 매체가 요구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현시연>의 오타쿠 해석

<현시연>의 오리지널 만화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10년도 더 전인 2002년부터다. 제목은 대학의 오타쿠 동아리인 ‘현대시각문화연구회’의 줄임말로서, 특정 문화 집단을 그리는 다른 무수한 콘텐츠처럼 여기서는 오타쿠들이 대상이 된다. 크게 만화 1-9권, 애니메이션 1-2기 및 OVA가 포함되는 초대(初代)와 최근 애니메이션이 종영된 2대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등장인물이 겹치고 같은 동아리를 배경으로 삼지만, 남성 오타쿠 중심인 초대와 여성 오타쿠 중심인 2대 사이에 몇 년의 격차가 있는 만큼 내용적인 단절도 적지 않다.

▲ 초대 ‘현시연’ (애니플러스)

이런 식의 특정한 정체성의 집단, 공동체는 에피소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소재다. 예컨대 <현시연>의 아키하바라-이케부쿠로계(각각 남성오타쿠, 여성오타쿠 문화의 중심지다) 오타쿠 집단을 ‘Nerd’들로 바꾸면 <빅뱅이론>처럼 될 것이고, 한국적 대가족으로 바꾸면 김병욱식 시트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매체 콘텐츠들을 통해, 우리는 대개 타자들을 인지하고 이해한다. 그 해 유행한 드라마에 대입 학과별 입결점수가 영향받곤 한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다시 <현시연>으로 돌아와 생각해보자면, 이것은 그저 매체 즉 ‘어떤 누군가의 해석’일뿐일까? 물론 <현시연>을 통한 오타쿠 이해는, 오타쿠와 접촉하는 것과 다르다. 개그를 위해서 실제보다 매우 밝게 비춰지는 경우가 많고, 과장되거나 미화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어떤 누군가의 해석’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현시연>이 자화상적, 자기소개서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화상이 사진처럼 정확하지 않다고 해서, 자기소개서에 미화와 과장이 있다고 해서 휴지조각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일코와 매스 미디어

▲ ‘현시연’ 정식 한국어판 제1권. 아래 14권과 비교하면 세월이 느껴진다…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 고립된 하위문화를 향유하는 타자로서 ‘오타쿠’(사회적으로 ‘하위-문화’라고 천시되는 대상이라면 딱히 게임ㆍ애니메이션 등이 아니라도 해당된다)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위에서 언급한 타자 수용 방법들이 겪을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일차적으로 부딪히는 것은 이른바 ‘일코’ 즉 일반인 코스프레 문제다. 사실 정의(定義)상 ‘천시되는’ 취향이나 취미를 숨기려는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기방어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일코하려는 경향’ 자체가 오타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접촉으로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때문에 타자로서의 오타쿠를 인식하는 대부분의 통로는 매체, 특히 매스 미디어에 편중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거의 모든 정보는 매체에 의존해 얻어지지만, 이 경우에는 특히 심하다. 주류 미디어에서는 잘 다뤄지지도 않음에도, 그 영향력에 절대적으로 휘둘리는 이상한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다. 예컨대 2010년의 ‘오덕 페이트’ 사건이 그런 예다. ‘단 하나의 사례’가 미친 영향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소개의 가치

▲ 가장 신간인 ‘현시연’ 14권. 초대와 2대가 한 작품인지 두 작품인지 판권문제로 국내 정식 번역발매는 요원하다고 한다.
직접 접촉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누군가의 해석’에 의존하는 것도 아닌 것, 즉 <현시연>과 같은 자기소개, 자화상적인 방식의 의미가 이렇게 드러난다. 물론 (이 경우에는 오타쿠라는) 집단 전체의 의사가 아니라 거기에 속하는 작가나 창작자 소수에 의한 것이므로, 이런 자기소개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또 자기변호로만 흘러버리기도 쉽다. 그럼에도 내적 감성에 근거한 자기소개적인 해석이 갖는 유의미함은 부정할 수 없다.

또 이 점에서, 현시연 초대와 2대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주인공들 성별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대에서는 원작자 키오 시모쿠가 초대의 주인공들과 취미를 거의 동일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소개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2대에서는 아무래도 남성인 작가 자신과 주인공들의 정체성 사이가 멀어진 거리만큼, 자기소개적인 성격이 감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일견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암묵적인 자기부정을 내포한다. 즉 앞서 말한 것처럼 남의 말, ‘하위-문화’라고 천시하는 관점에 끌려가 버릴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권력과 매체에 의한 편견에 대해 그저 분노하고 욕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와 다른 새로운 자기소개를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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