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을 기다리며>에서 필립 K. 딕이 그리는 것은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된 부부생활이다. 물론 그것은 전쟁이고, (따라서) 우주는 전쟁 중이다. 에릭은 캐시와의 결혼생활에서 달아나기 위해 전장을 택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자기 자신에게서,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관계에서 달아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이 딕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이다. 그러니 SF에 대한 성실한 서평을 기대했던 분들은 이쯤에서 이 페이지를 닫아도 좋겠다.

(BGM : ‘이혼한 신사가 결혼을 고민하는 그의 미혼 친구에게 들려주는 교훈(Advice From A Divorced Gentleman To His Bachelor Friend Considering Marriage)’ By Of Montreal)
이야기는 이렇다. 서기 2055년, 지구는 인류의 먼 조상인 릴리스타 제국과 동맹을 맺고 곤충을 닮은 외계인 리그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동맹국의 패배가 거의 확실시 되는 상황. 실질적인 독재자인(그러나 그렇게 나쁜 독재자는 아닌) UN 사무총장 지노 몰리나리는 파국을 유예하기 위해 적국과 동맹국 사이에서 목숨을 건 정치적 줄타기를 하고 있다.
에릭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TF&D 사의 사장 버질 애커먼을 위해 일하는 서른네 살의 인공장기 이식 전문의다. 나쁘지 않은 직업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들이 짜증스럽기만 하다. 8시에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고, 백 살이 넘은 주제에 여전히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는 사장이 싫고,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을 사느라 카드를 긁어대는 아내가 싫다. 게다가 건방진 로봇 하인까지 그를 무시한다. 확실히 문제가 많은 남자다.
“자넨 사생활에 너무 얽매여있어. 자기 일에만 너무 신경을 쓰는 나머지 우리 지구의 운명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하고. 빌어먹을,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 우린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을 하고 있다고. 게다가 지고 있어. 우리 군이 매일 박살나고 있다고!” (20쪽)
어쩌면 그는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캐시와의 결혼생활은 수렁에 빠졌다. 그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경제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성적으로나 그를 압도했고(지금의 직장 또한 애커먼을 위해 골동품을 수집하는 캐시가 다리를 놓아준 것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으며, 그가 그것을 견딜 수 없는 남자라는 사실이 그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럼 차라리 이혼을 하지 그래?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에릭은 스스로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예전에도 한 번 결혼한 적이 있고, 그때 상황도 지금하고 하등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야. 캐시와 이혼한다면 보나마나 난 또 결혼할 거야. 정신분석의의 말에 의하면 난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돈 잘 벌어오는 봉급쟁이의 역할을 통해서만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위인이라서 그렇다는군. 이혼해봤자 다음 결혼 상대도 또 캐시 같은 타입이 될 게 뻔해. 워낙 내 성질머리가 그렇다네.” (18쪽)
분명 그는 생각이 많은 남자고, 생각이 많은 남자가 대개 그렇듯 우유부단하다. 아마 어렸을 때 책을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다.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지만, 결혼생활을 끝내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 제자리를 맴도는 그에게 세상 모든 일들은 시시하거나 두려울 뿐이다. 그는 애커먼의 증손녀인 필리스의 노골적인 유혹을 모른 척 한다. 그녀는 그런 그를 비웃는다.
“당신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몰라요, 스위트센트 씨. 불행한 결혼 생활에 시달리고 있는 사내는 모두 자기가 뭘 원하는지를 깨닫는 메타생물학적인 능력을 상실하니까. 원래 있던 능력이 사라지는 거죠. 지금 당신은 썩은 조개나 마찬가지예요.” (46쪽)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은 캐시다. 누구에게 원해야 하는지도 알고, 얻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안다. 그녀는 그가 아끼는 녹화 테이프를 지우고, 직업을 얻기 위해 자신과 결혼했다며 비난하고, 잠자리에서 제 구실을 못한다고 말하며, 그가 “자기 고추를 잡아당기면서 노는 어린애”나 다름없다고 조롱한다. 에릭은 찍소리도 하지 못한다.
“난 널-” 에릭은 말을 멈췄다. 널 죽일 거야, 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의 침착한 부분 – 발작적인 격정 밑에서 조용히 잠들어있던 그의 차갑고 합리적인 부분이 얼음의 신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하지 마. 말해버리면, 이 여자의 승리야. 결코 그 말을 잊지 않을 거고, 네가 살아있는 한 너를 괴롭힐 거야. 그런 술책에 능한 여자니까, 결코 다치게 해서는 안 돼. 자기가 다치면 천 배로 보복할 여자야. 그랬다. 그녀의 지혜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지를 숙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도. (94쪽)
철저히 무기력한 에릭은 그저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무엇을? 필리스의 말대로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죽음이다. 구원으로서의 죽음. 물론 그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배짱이 없다. 그런 에릭의 앞에 몰리나리가 나타난다. ‘부조리하지만 자애로운’ 아버지 역을 맡은 몰리나리(에릭이 캐시와의 관계 때문에 고통 받는 것처럼, 그 역시 외계 문명과의 관계 속에서 괴로워한다)의 조언에 힘입어 에릭은 처음으로 행동을 결심한다. 결혼생활을 피해 몰리나리를 따라 전장에 가기로 한 것이다.
한편 자포자기 상태에서 약물을 남용하던 캐시는 새로운 환각제인 JJ-180을 복용한다. 그러나 JJ-180은 시간을 실제로 왜곡할 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 치명적인 효과를 끼치는 금단의 마약이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지구를 장악하기 위해 암약하는 릴리스타 제국 정보부가 있었다. 이에 절망한 캐시는 에릭을 찾아 나선다. (‘역자 후기’, 398쪽)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전형적인 PKD 스타일의 폭주가 시작된다고 할까. 캐시는 에릭의 커피잔에 몰래 JJ-180을 넣어 그를 중독 시킨다. 에릭은 JJ-180의 약효 속에서 미래로 한시적 시간여행을 한다. 단, 그것은 다중우주의 미래다. 지구가 리그인들과 동맹을 맺은 우주로, 몰리나리가 대역죄인으로 등장하는 우주로, 딕조차 솜씨 좋게 요약하지는 못할 기타 등등의 우주로. 다양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모험(해리슨 포드가 할 만한 모험은 아니다)을 통해 JJ-180의 해독제를 먹고 지구가 처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한 에릭은 무기력한 남편의 표본에서 순식간에 지구의 운명을 책임진 영웅(해리슨 포드가 연기할 만한 영웅은 아니다)이 된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구가 아니다. 캐시와의 관계다. 실제로 다중우주를 오가며 그가 구하는 것도 결혼 생활에 대한 조언이다.
벌레를 닮은 리그인은 말한다 : “결혼 생활은 두 인간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증오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마 언제나 함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과거에 사랑이 존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설령 애정적인 요소가 사라졌다고 해도, 친근감은 여전히 남아있는 법입니다. 그럴 경우는 권력에의 욕구 내지는 지배권을 얻기 위한 다툼이 발생합니다.” (294쪽)
약의 부작용으로 망가진 캐시를 부양하는 2056년의 에릭은 이렇게 충고한다 : “난 그러지 않았지만, 지금부터라도 미래를 바꿀 수는 있어. 그럼 자네는 조금 달라진 미래를 만들어내겠지. 모든 것이 똑같지만, 결혼 생활만 다른 세계를 말이야. 그러니까 캐시와 이혼하고 메리 라이네케든 누구든 좋으니 다른 여자와 결혼해.” 상대방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하느님, 난 내 미래가 보여. 난 어쩔 수 없이 캐시를 시설에 넣을 수밖에 없고, 그러면 캐시는 남은 인생을 – 난 그러고 싶지 않아. 해방되고 싶어.” (324쪽)
그리하여 그는 두 가지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정부를 만들어낸다는-이미 만들었다는-사실”과, 비록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똑같은 이유에서 우리 자신의 이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결혼 생활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끝내기로 한다.
현실로 돌아온 에릭은 입원한 캐시를 찾는다. 뇌손상을 입은 그녀는 나이를 먹고 쪼그라든 것처럼 보인다. 미래의 에릭에 따르면 그녀의 손상은 결코 돌이킬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남자다운 모습을 보인다. 이별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몰리나리에게 그간의 경과를 보고한다. 하지만 몰리나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맘에 안 드는군.” 몰리나리는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러는 수밖에 없겠지. 자네 처인 캐서린은?”
“해독제가-”
“자네들 사이의 관계를 물어본 거야.”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했습니다.”
“알았어.” 몰리나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한 주소를 써서 내게 주면 나도 자네한테 이름하고 주소를 하나 써주지.” 그는 펜과 메모지를 꺼내서 뭔가를 휘갈겨 썼다. “메리의 친척이야. 사촌이지. 텔레비전 드라마의 단역이고, 패서디나에 산다네, 열아홉 살인데, 너무 젋은가?”
“법률에 저촉됩니다.”
“걸리면 내가 꺼내줄게.” 몰리나리는 에릭에게 메모지를 툭 던졌다. 그러나 에릭은 그것을 집어들지 않았다. “또 뭔가?” 몰리나리는 고함을 질렀다. “그놈의 시간여행 약을 먹고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자네 앞에서 작고 하찮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어? 옆이나 뒤가 아니라? 혹시 작년이 다시 되돌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거야?”
에릭은 손을 뻗어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작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시 와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작년을 기다리며> 357~358쪽)
에릭이 기다렸다는 작년은 무엇인가? 아마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던 시절, 캐시가 아직 아름다웠고 그가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던 시절일 것이다. 그가 그녀를 방치하지 않고, 그녀가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던 시절일 것이다. 불행한 결혼 생활에 시달리며 자신이 뭘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에릭은, 그 생활에 종지부를 찍자마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것이다. 설령 그가 그녀와 헤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미래의 에릭이 충고한 것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내년이지 작년이 아니다.
문제는 에릭이 결코 오지 않을 작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내년을 원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열아홉 살짜리 미소녀가 기다리고 있는 내년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기에)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되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JJ-180을 복용하고 10년 후의 자신과 통화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미래의 이야기는(캐시와 이혼했지만 여전히 그녀를 부양하고 있다는) 그를 더욱더 절망하게 만들 뿐이다.
그는 처음으로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추상적인, 혹은 구원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진짜 죽음을. 바로 그때, 공장 책임자로 일하는 브루스가 소일거리로 만들어 길거리에 풀어놓았던 자동 수레가 보였다. 배터리로 움직이는 그것들은, 브루스의 예상과는 달리, 여전히 살아남아 보잘것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내도, 직업도, 아파트도, 돈도 없고, 그런 것들과 조우할 가능성조차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끈질기게 살아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미미하고 조그만 삶을 영위하는 것뿐, 다른 것은 없었다. 그건 거창한 요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요구이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기로 한다. 원하지 않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내년과, 간절히 바라지만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작년을 모두 껴안기로 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사라진, 그러나 그의 안에 영원히 남아 있는 작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딕의 소설에서 결코 마주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결말(나는 지금 그것을 이 자리에 옮기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중이다)을 만난다.
딕이 <작년을 기다리며>를 쓴 것은 세 번째 결혼이 악화일로를 걷던 1963년이었다. “결혼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사람은 미국 성공회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413쪽) 아마 에릭의 마지막 선택은 딕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안다. 어쩌면 에릭을 기다리고 있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실패일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패가 아니다. 실패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나는 그렇게 말해야겠다.

금정연

이런저런 매체에 책에 관한 글(90%)과 책에 관한 글이 아닌 글(10%)을 납품하는 소규모 자영업자이자 LG 트윈스 팬. 지은 책으로 <서서비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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