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오페라에는 양대 산맥이 존재한다. 하나의 산에 두 호랑이가 함께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두 작곡가의 존재는 두드러지는데, 바로 베르디와 바그너다. 바그너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재자 히틀러가 사랑했던 음악가였다. 평소 독일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던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사랑했다는 점은 비극을 초래한다.

2차 대전 독일이 유럽을 호령할 당시 나치가 유대인을 가스실의 연기로 만들기 전에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할 정도였다고 하니, 유대인에게 있어 바그너의 음악은 ‘동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극의 음악’으로 각인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 괴로워하는 암포르타스(사진출처 - 국립오페라단)

1813년에 태어났으니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는 베르디와 바그너 두 작곡가의 작품 가운데 바그너의 마지막 유작인 <파르지팔>이 국립오페라단을 통해 한국 관객에게 처음으로 선보였다. <파르지팔>은 쉽게 표현하면 서양판 ‘온달’ 이야기다. 주인공인 파르지팔은 순수하지만 바보나 진배 다름없는 인물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백조를 활로 쏴 죽일 뿐만 아니라 자기 이름조차 모르는 바보다. 이런 덜 떨어진 바보가 나중에는 성배의 수호자를 구원하고 성배의 수호자가 되는 이야기니, 서양판 온달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보가 거룩한 소명을 감당하는 집단을 구원한다는 성장담이다.

주인공 파르지팔이 한 집단을 구하고 계승자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이야기 구조를 영화로 비유하면 <매트릭스> 속 네오와 맞아떨어진다. 네오가 매트릭스에 갇힌 모든 인류의 구원자라는 정체성을 모르고 살았던 것과 매한가지로, 파르지팔 역시 자신이 성배 수호 기사의 수장이 되리라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네오가 모피어스를 만나 구원자의 정체성을 자각하듯, 파르지팔은 클링조르의 마법의 정원에서 시험을 당하면서 영웅의 정체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매트릭스>에서 사이퍼는 스미스 요원에게 회유되고 설득되어 인간 저항군을 배반하기에 이른다. 사이퍼와 마찬가지로 <파르지팔> 속 클링조르 역시 처음부터 악당은 아니었다. 성배를 지키기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거세까지 감행하지만 성배 수호 기사단에서 탈락한 것에 앙심을 품고 성배 수호 기사단을 궁지로 몰아넣는 악한으로 돌변한다.

▲ 성배기사단 (사진출처 - 국립오페라단)

기독교 혹은 천주교의 관점으로 본다면 2막의 쿤드라는 영락없는 마리아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을 향수를 부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은 것을, <파르지팔> 속 쿤드라는 파르지팔의 발에 기름을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는 것으로 재현하고 있다. 쿤드라가 파르지팔을 유혹하는 장면을 호메로스에 이입하면 쿤드라는 영락없는 칼립소가 된다. 오디세우스로 하여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끔 부와 영생을 주겠다고 현혹하는 칼립소의 모습은, 파르지팔로 하여금 본질을 보지 못하게 현혹하는 쿤드라의 역할과 맞아떨어진다.

1막에서 꼿꼿하게 서 있던 나무가 3막에 들어서면 쓰러진 채 나뒹굴고 있다. 1막에서 사명감에 불타던 성배 수호 기사를 나무로 빗대어 본다면, 3막에서 쓰러진 나무는 이들 성배 수호 기사단의 명운이 쇠락했음을 무대디자인으로 유추할 수 있는 소품임에 틀림없다. 무대가 기울지 않은 상태에서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다면 2-3층에서 보지 않는 이상 1층의 관객은 군중의 모든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다. 3막에서 배경으로 활용된 거울은 1층의 관객이 보지 못하는 군중 모두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무대 디자인임에 틀림없었다.

▲ 암포르타스의 병을 치유하는 파르지팔 (사진출처 - 국립오페라단)

하지만 옥의 티는 있었다. 1일 첫날 공연 중 3막의 자막 중 “왕께서 구원되셨다”는 자막은 차리라 “구원받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3막의 성배 기사단으로 나온 대규모 군중 가운데 누군가는 무대 위에 동전 여러 개를 떨어뜨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동전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파르지팔이 성배 수호 기사단의 계승자가 되는 중요한 순간에 청각적으로 집중도를 떨어뜨리게 만드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민간오페라단도 아닌 국립오페라단에서 이런 실수가 자행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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