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영동(왼쪽)과 갈월동(오른쪽) 지도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독재 시절에 시민을 감금하고 고문한 곳으로 악명을 떨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현재 경찰청 인권센터)은 사실 남영동이 아니라 갈월동에 있다. 남영동은 서울의 남쪽 진입로인 이곳에 군 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며, 갈월동은 이 근처에 칡이 많아서 또는 ‘갈월도사’가 살아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남영동은 거대한 용산 미군 기지의 북서쪽 끝에 해당되는 곳인데 이곳은 일본이 만든 거대한 일본군 기지를 물려받은 것이다.

1.

‘남영동 대공분실’을 둘러보려면 지하철 1호선 남영역에서 내리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이왕 오는 것이니 이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보통 나는 지하철 4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삼각지 역에서 내려 11번 출구로 나와서 그 앞의 골목 동네를 살펴보며 ‘남영동 대공분실’ 쪽으로 걸어간다. 삼각지는 사실 본래부터 네거리였으며, 1967년에 입체 교차로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에 배호가 ‘돌아가는 삼각지’라는 노래를 불러 아주 유명해졌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년)에 이 입체 교차로가 등장한다.

삼각지역 11번 출구 앞 동네를 비롯해서 한강로 길가에는 ‘화랑’들이 많다.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풍경화, 정물화 등을 파는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미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나 지금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길가의 ‘화랑’들에 그림을 공급하는 ‘화실’들은 길가의 뒷쪽 골목에 있다. 삼각지역 11번 출구 앞 동네도 그렇다. 이 동네는 노태우 정권이 만든 ‘전쟁기념관’ 담에 기대어 만들어졌다. 용산구의 한강로 양쪽은 일본군의 대부대가 설치되고 그 주위에 일본인의 주거지들이 많이 들어섰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에는 그 흔적이 꽤 남아 여전히 무서운 남영동 대공분실있다. 삼각지역 11번 출구 앞 동네는 작지만 일제 시대를 바탕으로 해방 이후 미군 주둔, 군사독재와 개발 등의 근현대 역사를 잘 간직한 동네였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무너져서 사라지고 있다. 이런 곳이 소박한 동네로 계속 지켜지는 것이 도시의 다양성과 활력이 지켜지는 것인데.

삼각지역 11번 출구 앞 골목으로 들어가면 검은색 나무판으로 외부를 마감한 일본식 단층 주택을 볼 수 있다. 10여 년 전에 이 집을 처음 봤을 때 그 상태가 좋아서 놀랐었다. 그 얼마 뒤 건축가 정기용 선생과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에 답사를 왔는 데, 다들 이 주택을 보고 신기해했다. 사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집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다. 그런데 3-4년 전부터 이 집도 빈 집이 된 모양이다. 문 앞에 걸려 있던 화재 경보 종이 없어졌고, 지붕과 벽이 무너지고 있고, 문에는 경찰의 빈 집 경고문이 붙어 있다. 그런데 무너지고 있는 벽을 보니 대나무와 진흙으로 벽을 쌓고 그 바깥에 나무판으로 마감했다. 나는 그냥 나무판으로 마감하는 줄 알았더니 안에 흙 벽을 쌓는 것이다. 동행한 건축사학자 안창모 교수가 일본식 나무판 건물의 안에는 다 이렇게 흙 벽이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 일본식 주택 2004년(왼쪽), 2013(오른쪽)

2.

삼각지역 11번 출구 앞 동네는 ‘전쟁기념관’의 후문에서 끝난다. 그리고 ‘전쟁기념관’ 후문을 지나면 바로 용산 미군 기지의 본부 지역인 ‘메인 포스트’의 정문이다. 붉은 벽돌 담장이 아주 길게 늘어서 있다. 용산 미군 기지는 하루빨리 ‘생태문화공원’으로 거듭나야 하는 데 정부가 예산을 제대로 배정하지 않아서 설계작업조차 잘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남영동 삼거리까지 걸어와서 건널목을 건너서 왼쪽으로 꺽어져서 가다가 가야 호텔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저 앞에 보기에도 스산한 검은색 건물이 보인다. 바로 저 악명높은 ‘치안본부 대공분실’, 즉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지금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2005년에 ‘보안 3과’가 이전하게 되어 경찰청은 이곳을 인권센터로 만들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대를 대표하는 최악의 인권 유린 시설이 민주화에 따라 최고의 인권 보호 시설로 거듭난 셈이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으로 시작된 민주화에 비추어 보자면, 이런 당연한 변화가 이루어지기까지 무려 18년이 걸렸다. 만일 2005년에 군사독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세력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면, ‘남영동 대공분실’은 아마도 여전히 ‘남영동 대공분실’일 것이다. 이곳의 변화 과정을 ‘경찰청 인권센터’의 안내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곳은 반공을 내걸고 민주화를 억압하던 독재의 폭력 시설이었다.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1948년 10월 대간첩 수사 업무를 위해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로 발족하였으며, 1970년 10월 정보과 공작분실로, 1976년 5월에는 치안본부 대공과 대공분실로 바뀌었고, 1983년 12월에는 좌경의식 수사 업무를 흡수하고 제4부 대공 수사단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경찰청 대공수사 1단․2단, 대공2부, 보안3과 등으로 직제가 개편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청사는 업무 특성상 ‘00해양연구소’라는 간판으로 철저히 위장,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많은 인사들을 취조․고문하던 곳으로 특히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건물에도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건물은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1976년에 설계한 것이다. 김수근은 검은색 벽돌로 그윽한 외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내부는 철저히 ‘심문’을 위한 곳이다. 김수근은 이 건물의 용도를 잘 알고 그윽한 ‘심문’ 전용시설을 만든 것이다. 7층 건물의 5층에 심문실들이 있는 데, 이곳에서 끔찍한 고문들이 끝없이 자행됐다. 이곳은 1985년 9월에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김근태를 물고문과 전기고문했던 곳이고, 1987년 1월에 4명의 경찰들이 박종철을 물고문했다가 죽인 곳이다. 이에 대해 ‘경찰청 인권센터’의 안내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 남영동 대공분실은 시대를 대표한 고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공간’과 마찬가지로 건물에 검은 벽돌을 사용했다. 푸른 색 철문을 통과하면, 뒷면에 짙은 색 ‘전용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선 후, 피의자들이 조사받을 5층으로 가게 된다. 설치되어 있는 엘리베이터는 1층과 5층만 왕복 운행하며, 그 옆에 설치되어 있는 철제 나선형 계단 역시 5층까지만 바로 연결되어 있다. 어두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주치게 되는 좁은 사각의 공간, 그리고 다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주치게 되는 비좁은 엘리베이터와 짙은 색 철제 나선형 계단, 누군가 ‘피의자’ 신분으로 이곳에 왔을 때, 처음 마주치게 되는 냉기와 공포감, 그리고 극도의 불안감은 여기서부터 만들어진다.

▲ 남영동 대공분실(왼쪽)과 심문실이 있는 5층(오른쪽)

‘남영동 대공분실’의 심문실은 5층에 있지만 공포는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김수근은 이 건물의 정문 부분을 3층에서부터 층층이 안으로 집어넣어 답답한 외관에 변화를 주었고 그 아래에 아늑한 휴게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연행된 사람들은 이곳으로 드나들지 않았다. 연행된 사람들은 건물 뒤의 쪽문으로 들어갔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5층만 가는 작은 엘리베이터와 나선형 계단이 있다. 눈이 가리워진 채 나선형 계단으로 끌려 올라가면 방향감과 위치감을 모르게 되고 좁은 계단실에 울리는 철제 계단의 발자욱 소리에 심장이 오그라들게 된다. 좁은 심문실 안쪽에는 작은 욕조가 있는 데 사실 이것은 욕조의 모양을 한 물고문 도구이다. 심문실은 두 종류인데 방 하나로 된 것과 두 개의 방을 터서 만든 큰 방이다. 김근태가 전기고문을 당한 15호실은 큰 방이다. 전기고문에는 여러 장비들과 사람들이 많이 필요해서 큰 방에서 해야 한다. 박종철이 살해된 9호실은 작은 방이다. 김수근은 연행된 사람들이 두려움과 불안감에 빠지도록 겨우 환기할 수 있는 작은 창, 전등의 밝기를 조절하는 조도 장치 등까지 섬세하게 설계했다.

우리는 이 건물에서 김수근만이 아니라 이 건물을 발주한 김치열(1921~2009)도 꼭 기억해야 한다. 김치열은 일제 말에 검사가 된 대표적인 친일파로서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에서 승승장구했다. 특히 이 자는 박정희의 독재를 주도한 법조인으로 중요하다. 1973년 10월 19일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남산의 중앙정보부 본관(지금 서울 유스호스텔) 마당에서 투신한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 10월 25일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던 김치열은 최 교수가 간첩임을 자백하고 죄책감에 투신해서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최 교수를 고문하다가 죽이고 투신한 것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 유신독재를 지킨 공로로 김치열은 얼마 뒤에 검찰총장이 되었다. 1975년 4월 9일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라는 명목으로 8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사형당했다. 당시 기소권을 가진 검찰의 총책이 바로 김치열이었다. 이렇게 해서 다시 박정희 유신독재를 지킨 김치열은 얼마 뒤에 내무부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이 악명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만들었다. 이 건물의 정문 앞 기둥 아래에 ‘內務部長官 金致烈’이라고 쓰인 초석이 있다.

▲ 김치열(왼쪽)과 김수근(오른쪽)

3.

김근태가 이근안 등에게 당한 끔찍한 고통은 ‘남영동 1985’라는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 박종철이 당한 더 끔찍한 고통이 영화로 만들어지길 바란다. 박종철의 죽음은 참으로 우연히 신문에 보도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민주화의 물꼬를 연 6월 항쟁이 펼쳐질 수 있었다. 6월 항쟁은 박종철의 끔찍한 죽음으로 시작된 것이며, 이런 점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은 민주화의 성소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의 잔악성을 보여주는 곳이자 그 극단의 폭력에 맞서 인권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을 증거하는 곳이다. 악은 결코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악을 없애지 않으면 선은 결코 제대로 자라나지 않는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둘러보면 여러 생각이 들고 마음이 착잡해진다. 바로 옆에 남영역이라는 큰 역이 있고, 그 앞으로는 숙명여대라는 큰 대학교가 있으나, 여기에 갇힌 사람들은 세상과 단절되어 끔찍한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 밖에 있는 것의 공포가 얼마나 컸을까?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 시대는 ‘의문사’의 시대였다. 아무도 모르게 경찰, 중앙정보부, 기무사 등에 연행되어 고문받다가 죽으면 시체를 강에, 바다에, 산에, 철길에 내다버렸다. 연행된 사람들은 ‘우리가 너같은 놈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알아? 너같은 새끼 하나쯤 고문하다 죽여도 그냥 내다버리면 그만이야.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다 불어, 알았어?’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에 무시로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말로 하는 협박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어서 연행된 사람들은 심장이 쫄아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남영동 대공분실’은 두렵고 무섭다.

김수근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꼼꼼하게 ‘심문’ 전용시설을 설계했을까? 그는 당연히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설계했다. 이런저런 상세한 요청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한 최고의 ‘심문’ 전용시설은 최고의 건축가에 대한 여러 의혹과 의문을 키워준다. 김수근도 박정희의 학정에 대해 잘 알았을 것이다. 그가 죽기 전에 밝혀진 김근태 고문 사건에 대해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김수근은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가 이 건물에 대해 쏟은 정성을 보면 그는 무슨 큰 사명감을 갖고 이 건물을 설계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최고의 건축가가 최악의 독재자들에게 큰 선물을 했던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해, 그리고 전문가와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다시 깊이 생각해 본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면, 사회적 책임을 잊으면, 세상은 곧 독재의 천국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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