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온라인 서점에서 인문 분야를 맡는다. 인문학 연구자도 아니고 최신 이론에 해박한 ‘인문 덕후’도 아니지만, 책으로 소통되고 유통되는 인문학에 대해서는 꽤 밀접한 관계를 맺는 관련자라 하겠다. 하루에 수십 권의 인문 도서가 세상에 나오고, 그 가운데 몇 권은 출판사 마케터를 통해 가까이서 마주하게 된다. 더불어 그 책을 구매하는 독자, 저자의 목소리를 들으러 강연회에 참석하는 독자, 자기에게 맞춤한 인문서를 찾는 독자를 수시로 만나니 '인문학 현장'의 어디쯤에 서 있다고도 하겠다.

물론 이런 의미 찾기 놀이를 하지 않더라도 인문 분야 도서가 얼마나 많이 팔리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자리에서 일을 하니, <절망의 인문학>(오창은 지음, 이매진 펴냄)이 <희망의 인문학>(얼 쇼리스 지음, 이매진 펴냄)만큼 널리 알려져 많이 팔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야, '절망의 인문학'이 '희망의 인문학'으로 바뀌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본다.
반(半)제도 비평가라 자임하는 오창은 교수의 <절망의 인문학>은 자연스레 <희망의 인문학>을 떠올리게 한다.(두 책은 출판사도 같다.) 얼 쇼리스가 소외 계층을 위한 인문학 교육 과정 '클레멘트 코스'를 소개하며 인문학, 교육, 혁명의 가능성을 전했다면, 오창은은 '절망(絶望)'적인 인문학 현실을 확인하며 온전한 인문학을 '절망(切望)'한다. 절망(絶望)의 지점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우선 인문학 열풍이라 불리는 현상의 이면을 짚어보고 대학 바깥에서 대안을 찾는 새로운 시도를 살펴본다.
그 다음에는 한때 상아탑이라 불리던 대학 내부로 들어와 교육이 아닌 권력, 연구와 토론이 아닌 독점과 종속으로 구조화된 내부의 절망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학문지원사업이란 이름 아래 행해지는 각종 제도가 어떻게 학문의 자율성을 해치고 학문 영역까지 국가의 관리 아래 두게 되었는지 분석한다.
인문학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책은 심심찮게 나왔지만, 대부분 독자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이, 인문학 열풍을 주도하는 몇몇 책은 자기계발과 인문학 사이에서 어느 쪽을 지향하는지 판단하기 어렵고, 우후죽순 생겨나는 인문학 강좌는 "삶이 온통 노동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정신적 가치를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CEO 인문학 과정'처럼 자본주의 시스템 내부에서 동원 가능한 상징 자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중을 위한 인문학은 늘어난 시장과 규모에 비해 그 방향과 본질에 대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인상 비평을 넘어서는 분석이나 제안이 부족한 현실이라 하겠다.
연구자 집단은 어떠한가. 대학원 사회는 입시에서부터 학위 취득 그리고 이후의 삶까지 치열한 생존 투쟁이다. 교수는 입시에서 최저점을 준 학생이 자기 분야를 전공하겠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점수를 최고점으로 바꿔준다. 온갖 잡무를 소화하다 불합리한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면 대학 내 학문 인생에 사망 선고가 내려진다. "내가 네 앞길을 열어줄 수는 없지만, 막을 수는 있다."는 시쳇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공간이다. 결국 '각자의 인문학'을 즐기거나 지키거나 살아내는 데 급급하여 '공통의 인문학', '모두의 인문학', '우리의 인문학'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릴 여유가 없다.
<절망의 인문학>은 제도권 내 비평가이자 대학교수로서,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 강좌 기획자이자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 같은 대중 교양 공간의 운영위원으로서 오랜 기간 제도 안팎을 경험해본 저자가, 인문학 강좌를 통해 삶의 활력을 찾고 스스로 공부하는 삶을 이어가는 시민에서 학문이 사라진 대학원을 떠나지도 못하고 다닐 수밖에 없는 대학원생, 한국 학문사회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해외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못하는) 연구자, 한국연구재단의 각종 정책 방향에 따라 연구의 내용과 방향을 바꿔야 하는 교수까지 52명에 이르는 '내부고발자'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의 한국 인문학 현장을 보고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안하고자 하는 시도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시민 사회, 대학 내부, 국가 제도로 나눠 각 영역의 현실, 문제, 과제를 차례로 살피는데, 그간 '문제다'라며 결과만 얘기되던 부분을 구체적인 사례로 들려주고 확인하기 때문에 주로 자기 경험을 근거로 이루어진 인문학 비평에 비해 훨씬 쉽게 문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문제 상황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분석하는 저자의 통찰도 눈여겨볼 만한데, 번역과 유학을 연결지어 학문의 권력 종속을 드러내는 부분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유난히 해외 유학 비중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 번역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학문 생산성보다는 해외 학위라는 상징권력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해외 유학파 교수의 권력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상징 권력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해외 유학을 다녀온 제자일 수밖에 없고, 오히려 유능한 번역가는 해외 유학의 상징 권력을 위협하는 잠재적 위험요소이기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과도한 해석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학술 논문의 인용문은 엄연히 번역서가 있는데도 원전 인용이 권장되고", "심지어 몇몇 교수와 연구자는 원서를 번역하고도 출간해서 공유하지 않고 독점한 책 자신의 논문에만 인용하는 등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수준이라 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렇게 담아낸 현장의 목소리와 다각도의 분석에도 대안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저자는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의 분절화, 대학의 식민지화, 국가 기구의 관리 시스템이 상호 긴밀하게 옥죄면서 파생된 산물"이라 분석하지만 "인문학자가 각성하거나 대학 인문학 교육을 복권하는 것만으로 타개할 수 없고, 국가 기구가 인문학을 지원하는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의 공세에 단지 인문학만 위기에 놓인 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위기에 직면했다. 나는 인간성이 마주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통찰의 한 축을 인문학이 지탱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내가 인문학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며 고백을 하고 만다. 저자의 믿음과 사랑은 이해하지만, 간절히 바라는(切望) 것만으로 절망(絶望)의 현실을 넘어서기에는 이 책에서 드러낸 현실이 녹록지 않아 보인다.
또한, 책을 마무리하는 4부에 “여행을 둘러싸고 펼치는 인문학적 고찰, 축제와 인간, 청년 세대 담론에 대한 비판, 비평언어의 가치, 약소자 담론”을 다룬 각각의 글을 “우리 시대의 쟁점을 인문 정신과 결합해 사유한 글을 모았다”며 배치했는데, 앞선 현실 분석과 문제 제기, 약간의 대안 제시에 동의한 독자에게 이 글이 무엇을 새롭게 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진정성에 비춰 볼 때 그간 쓴 몇몇 글을 단행본에 함께 싣고자 하는 저급한 욕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마주한 시대의 쟁점과 인문정신이 만나는 현장을 이렇게 마주하기에는 앞서 보여준 현실이 지극히 현실적이기 때문에 자칫 저자가 고백한 ‘믿음과 사랑’까지도 나이브하게 들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물론 이건 나만의 오독일 수 있다. 나는 '공통의 인문학', '모두의 인문학', '우리의 인문학'을 생각하기 이전에 ‘각자의 인문학’, 다시 말해 <절망의 인문학>이 <희망의 인문학>만큼 널리 알려져 많이 팔리기를 바라는 인문 장사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물론 이렇게 보아도 4부가 에누리처럼 보인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쨌거나 ‘절망의 인문학’이 ‘희망의 인문학’으로 바뀌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은 여전하다. 희망의 인문학은 아직 불가능하지만, 절망의 인문학은 이미 와버렸으니, 믿지 않고서는 해볼 도리도 없는 게 현실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나 역시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믿음과 사랑에 동의하고, 장사치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나갈 생각이다. 그리하다 보면 만나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각자의 인문학’을 '공통의 인문학', '모두의 인문학', '우리의 인문학'으로 바꾸는 일이 ‘희망의 인문학’이라면, 응당 그래야 할 것이라 믿는다.

박태근

온라인 책방 알라딘에서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분야를 맡습니다. 편집자란 언제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사람이라 믿으며, 언젠가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을 짓고 책과 출판을 연구하는 꿈을 꾸며 삽니다. 공식 애칭은 서경식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바갈라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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