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의 '세상의 모든 책들' 첫 서평에서 나는 루이 말 감독의 영화 <데미지>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제레미 아이언스에 대한 찬탄으로 운을 뗐다. 이번 서평 역시 본의 아니게 제레미 아이언스로 시작하고 있는데, 영화 <데미지>의 원작소설인 조세핀 하트의 <데미지>에 대해 쓰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평소 어떤 취향으로 어떤 책들을 읽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것 같아 민망할 따름이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 떠들고 싶어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양해를 바란다.)

단 한 번도 열정 혹은 욕망에 휘둘린 적 없이 살아온 성공한 상류층 중년 남성인 ‘나’. 자신이 50살에 죽었다면 주변 모든 사람에게 아주 좋은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라는 독백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그는 50살까지, 그러니까 안나를 만나기 이전까지의 인생이 누구의 인생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인생과 예술을 바꾸어놓는 열정”(26쪽)은 자신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의사 출신 보건부 차관보 의원인 ‘나’에게는 보수당 유명 정치인 아버지를 둔 아름다운 아내 잉그리드와 두 자녀가 있다. 언제나 ‘이기고’ 싶었던 그는 야심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이기는’ 방식을 선택해왔다. 단단한 표정으로, 옷깃을 잘 여민 차림으로 언제나 혼돈 없이 질서정연하게. 그런 그가 안나를 만났다. 자신의 아들 마틴의 애인 안나. 그는 안나에게 처음부터 아주 강렬하게 끌린다. 두 번의 만남 이후 그는 그녀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그때 “내 인생이 이제 끝나고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47쪽)라고 읊조린다.
이후 소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나’는 안나와 격정적인 관계에 빠져들고, 아들 마틴과 안나의 관계도 진전되어 결혼 직전에 이른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고 결국 소설은 비극으로 끝나고야 만다.
소설 <데미지>는 1991년 출간 당시에 베스트셀러를 기록했고 바로 이듬해에 제레미 아이언스와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시간 차이 없이 1993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2011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 단지 재밌게 본 영화의 원작소설이라는 이유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나로서는 이런 화려한 배경을 몰랐다. 다만 그녀의 프로필을 읽다가 조금 재밌는 구석을 발견했을 뿐이다.
작가 조세핀 하트의 남편은 영국 광고업계의 거물이자 마거릿 대처 총리 공보 담당이었던 모리스 사치이다. (여기까지가 프로필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나는 사실 광고업엔 관심이 없어 모리스 사치를 몰랐지만 ‘사치 갤러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세핀 하트가 상류층 여성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런던 사치 갤러리는 모리스 사치의 형, 찰스 사치가 운영하는 갤러리다. 데미안 허스트 등을 주축으로 한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BAs)’들을 발굴하여 후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세핀 하트는 <데미지> 이후로도 작품을 출간했지만 우리나라에는 더 이상 번역되지 않았다. 이 말은 우리나라 출판계는 작가 조세핀 하트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조세핀 하트와 모리스 사치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내가 영어판 위키백과를 읽어야 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지금부터 내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필자의 영어 실력 탓으로 불확실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세핀 하트는 영국의 헤이마켓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했고 이후 연극 제작자로 활동했다. 첫 결혼에서 아들을 한 명 두고 이혼했으며 1984년에 모리스 사치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두 사람은 1967년경에 헤이마켓 출판사에서 함께 일하며 처음 만났다. 모리스 사치는 첫 직장이었던 헤이마켓 출판사를 그만두고 형 찰스 사치와 함께 ‘사치 앤 사치(Saatchi & Saatchi)’라는 국제광고 대행사를 차렸고, 간단명료한 광고카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특히 1979년에는 “노동당은 일하지 않는다”는 보수당 선전 광고 캠페인을 제작해서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이 노동당을 누르고 집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보수당의 집권은 물론 사치 앤 사치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첫 직장에서 같이 일했을 뿐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 살다가 40대가 되어서야 결혼한 이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매우 궁금했지만 (모리스 사치는 1984년에 이미 재벌이었고 조세핀 하트보다 4살이 어리다.) 위키백과는 이 이상 친절하진 않았다. 영어가 부족한 나로서는 더 찾아보기 겁났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 직장 동료였던(분명 그 시절에도 서로 호감이 있었겠지!) 두 사람이 세월이 지난 뒤에 우연히 다시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있다.
이런 작가의 배경을 알고 나면 상류층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섬세한 묘사가 어느 정도 경험으로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보수당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남편을 둔 영향인지, 소설 속에서 ‘나’는 보수당 의원으로 나올 뿐더러 ‘나’가 보수당을 선호하는 이유까지도 설명한다. 나는 오히려 조세핀 하트 그녀 자신의 정치 색깔은 적어도 약간은 중도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나’가 보수당 내에서도 좌파에 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공을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인물로 포장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조세핀 하트는 모리스 사치와 결혼 이후 상류층 여성이 되는 일에 잘 적응했을 테지만, 조금은 무력감을 얻은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안나를 만나 자신의 인생을 찾았지만(물론 파멸로 끝나긴 했지만) 그녀는 상류층 여성으로 살아가는 피로감을 소설 쓰기로 돌파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녀의 소설 쓰기에 대한 욕망은 마틴에게서 읽을 수 있는데 ‘나’의 아들이자 정치부 신문기자인 마틴은 “모든 저널리스트들이” 그렇지 않으냐며 소설 쓰는 데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들킨 것에 대해 난처해한다. 아마 마틴의 이런 모습이 1991년에 첫 소설을 출간하기 이전까지의 그녀의 태도였을 것이다.
아마도 조세핀 하트는 아주 우아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주제의식이나 발언은 도발적이지만 말하는 태도와 말투는 세련되고 얌전한 여인. 이 작가는 소설에서 추상적이고 정제된 언어로 에로티시즘을 보여주지만, 마그리트 뒤라스에 비하면 걸러진 느낌이 있어서 영화의 강렬함을 기대하고 소설을 읽으면 다소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 <데미지>는 소설로서 충분한 장점을 지니고 있는데, 독자로 하여금 캐릭터를 아주 깊게 이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녀의 인물들은 각 인물마다 마치 모델이 있는 것처럼 결이 살아 있었다.
참고로 출판사 ‘그책’에서 출간하는 ‘에디션D 시리즈’는 인간의 에로티시즘과 욕망을 말하는 문학 시리즈(‘D’는 ‘desire’의 이니셜이다)로 <데미지> 외에도 <비터문> <부영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에로틱한 소설 시리즈라니! 조만간 다 소장하고 싶다.) 당연하게도(!)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은 <데미지(Da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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