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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의 태양’, 태공실은 캔디가 아니다?[블로그와] 톺아보기
meditator | 승인 2013.09.13 15:32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는 캔버스에 담배 파이프를 그려놓고는 이런 제목을 붙인다. 그런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분명 쇼핑몰 사장 주중원(소지섭 분)과 일개 여직원 태공실(공효진)의 연애 이야기 임에도 <주군의 태양>은 끊임없이 말한다. ‘이것은 캔디가 아니다. 이것은 캔디물이 아니다.’라고.

그림의 존재에 대해 회의하던 시대에 그림을 그린 르네 마그리트는 뻔한 담배 파이프를 통해 본질에 다가간다. 내가 파이프를 그렸는데, 이게 파이프인가? 실제로 들고 피울 수도 없는 그저 보이는 이 형상을 파이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림을 통해 표현되는 것들은 무엇인가?

<주군의 태양>도 마찬가지다. 주군이 맘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태공실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바로 '캔디의 딜레마'이다. 말로는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하지만, 울 상황이 되면 어디선가 안소니가 혹은 테리우스가 나타가 그녀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캔디와 자신은 처지가 다르다고, 달라야 한다고 태공실은 말한다.

심지어 주군과 태양은 사랑의 밀담을 나누는 대신, 캔디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으로 태공실의 존재 이유와 주군의 필요성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어쩌랴. 현실은 주군과 태공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고, 주군이 쇼핑몰 사장이고 태공실이 여직원인 한에서 그들은 캔디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일 뿐인 것을.

르네 마그리트가 단순한 그림 한 장을 통해 그림의 존재 이유, 나아가 사물의 이름값에 대해 문제제기하듯, 홍정은-홍미란 자매(이하 홍자매)는 <주군의 태양>을 통해 흔히 그려지는 우리나라의 캔디물 러브 스토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쇼핑물 사장과 여직원의 사랑을 그려놓고, 이건 캔디물일까? 캔디물이 아닐까? 그렇다면 캔디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라고.

   
 
처음 이 땅에 <들장미 소녀 캔디>라는 만화가 소개되어 텔레비전 만화로 방영되고, 책으로도 나왔을 때 많은 소녀들은 열광했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 소녀 캔디를 왕자님 같은 안소니와 멋진 남자 테리우스 두 사람 모두 자기 목숨처럼 사랑해 주는 이야기에. 그래서 로맨스 소설을 읽을 나이의 소녀들조차 수업 시간을 참지 못한 채 책상 아래에 캔디를 숨겨놓고 읽다 선생님께 들켜 책을 빼앗기는 봉변을 당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좀 깨이기 시작하고 주체적 여성상이 부각되면서 캔디는 멋진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사랑스러운 소녀가 아니라,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남자들의 사랑에 의지한 민폐녀 캐릭터로 변모되기 시작하였다.

<주군의 태양> 속 캔디는 사랑스러운 만화 속 여주인공이 아니다.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멋진 사장님에게 '사랑'으로 들러붙는 민폐녀의 상징처럼 쓰인다. 그래서 태공실은 그런 민폐녀가 되기를 질색하며 주중원에 대한 사랑을 숨기려 애쓴다. 텔레비전을 보는 우리도 알고, 드라마 속 주변 인물도 다 아는 사랑을 태공실만이 하늘의 태양을 두 손으로 가리듯 사랑이 아니라고 필요에 의한 거라고 아득바득 우긴다. 아니 우기려 애쓴다.

홍자매는 애초에 태공실을 아주 노골적으로 주중원에게 들러붙는 여자로 그려냈다. 하지만  이유가 다르다. 귀신을 보는 태공실 앞에 들이대는 귀신을 사라지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주군이기 때문에, 태공실은 살기 위해서 주군을 붙잡고 늘어진다. 주군이 어떤 면박을 줘도, '꺼져'라고 몇 십번을 외쳐도, 주군이 '방공호'인 한 태공실은 주군을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그래서 태공실은 당당하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귀신을 쫒아주는 주군은 괜찮고, 사랑을 하는 주군은 안 되는가?’라는 딜레마이다. 홍자매는 묻는다.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가진 남자의 사랑을 받는 캔디가 정말 민폐녀냐고.

그리고 하나의 담론이 더 등장한다. 바로 늑대와 염소 이야기. 늑대는 염소를 잡아먹는 천적인데, 바로 그 늑대와 염소가 사랑하게 되었다는 동화, 동화 속 염소는 늑대를 사랑해 자신을 잡아먹으라고 말한다. 그런 염소에게 늑대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아직 드라마 속에서 동화의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고모의 말처럼 결국 더 사랑하는 사람이 희생하게 된다. 12일 <주군의 태양>의 주중원처럼, 태공실을 향해 날아오는 드라이버를 몸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마치 그 예전 테리우스가 몸을 날려 캔디를 구하듯 말이다.

고모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태공실에게 글을 못 읽는 주군을 그냥 놔두라고 한다. 공소 시효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냥 지금처럼 살게 놔두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태공실을 만난 주중원은 김귀도의 말처럼 자꾸 달라진다. 차희주의 죽음 이래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닫고 모든 것을 사업적 이해타산으로 판단하던 주군이 조금씩 사람 같아지는 것이다. 귀신이 되어서도 태공실 앞에 나타나 '사랑해'라고 고백할 정도로 그 모든 것은 '태공실을 향한 사랑'때문이다. 난독증을 해결한 건 태공실을 향한 사랑이다.

   
 
캔디는 민폐녀일까? 가진 것이 많은 것과 적은 것으로 사랑의 역학 관계를 설명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사랑은 늑대와 염소 같은 것 아닐까? 서로 잡아먹어야 될 처지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 늑대는 그저 염소나 잡아먹는 동물이었지만 염소를 사랑하는 늑대는 더 이상 늑대가 아니듯이, 사랑을 통해 변화되고 달라지는 주중원을 그저 더 가진 자라고, 그런 주중원을 변화시키는 태공실을 민폐녀 캔디라고 말할 수 없지 않냐고 홍자매는 묻고 있다.

홍자매의 작품들은 '프리티 우먼'처럼 뻔한 통속적 러브 스토리의 틀을 늘 가지고 있다. 재벌이 가난한 여주인공을 만나고, 최고의 스타가 무명의 여배우를 사랑하고, 선생님이 제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뻔함 속에서 홍자매 작가들은 세속적 평가로 재단되는 생각들에 대한 자신만의 담론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아마도 <주군의 태양>의 담론은 태공실과 주중원으로 하여금 설전을 벌이게 하는 바로 그 '캔디의 딜레마'일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 태이령이 늘 내거는 샐러리맨과 사업가라는 명목상 선택의 기로와도 통한다. 이를 통해 사실은 그저 '사랑'일 뿐일 그것들을 세속적 잣대로 억지로 얽어매고 있는 건 아니냐고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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