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의 시즌 여름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 말부터 태국 GTH가 제작한 <바디>를 시작으로 <디 아이> <카르마> <노크: 낯선자들의 방문> 등 동서양의 공포영화들이 선을 보이며 여름이 다가왔음을 실감케 했다. 하지만, (좀비, 재난, 고어, 액션 등 온갖 장르를 뒤섞은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플래닛 테러>나 닐 마샬 감독의 <둠스데이: 지구 최후의 날>이 쾌감을 선사해주긴 했지만) 전통 호러의 문법에 충실한 맛깔스런 공포영화는 아직 만나지 못해 애간장을 태우던 무더운 7월, <알.이.씨>는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운 영화였다.

▲ < REC> 포스터.

<알.이.씨>는 카메라의 시점을 이용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기법의 영화다.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로 국내 관객에게도 잘 알려진 페이크 다큐멘터리 기법은 <클로버 필드>를 거치며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버렸지만, <알.이.씨>는 여기에 일종의 차별화를 꾀한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기록된 영상이 아닌 현재 기록 중인 영상이라는 진행형 공포, 혹은 리얼타임 공포를 표방한 것. 페이크 다큐멘터리 기법 외에도 최근 공포영화나 재앙영화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이에 감염된 좀비, 폐쇄된 공간 등 다소 식상할 수 있는 소재들로 가득하지만 <알.이.씨>는 이를 풀어내는 솜씨가 너무도 영리해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다.

무서움이라는 영화의 근본 목적에 너무도 충실한 이 영화는 카메라를 통한 시점의 이동, 빛과 어둠, 한정된 공간과 잘 짜인 동선을 통해 서스펜스를 직조하는 탁월함을 보인다. 여기에 전혀 예측 불가한 성향을 지닌 좀비의 습격이 야기한 신체훼손, 사건의 근원을 내포한 좀비의 비주얼 또한 강렬하기 그지없다. 올해 들어 지금까지 선보인 공포영화 중 단연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작년 <디센트>가 그랬듯이, <알.이.씨>는 반가움과 동시에 부러움도 선사한 영화다. 장르의 컨벤션 속에서도 이를 적절히 변주할 수 있는 세공력과 아이디어는 저예산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공포영화의 큰 미덕 중 하나다. 수년간 '사다코'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한 한국 공포영화가 작년 <기담>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가 싶더니, 한국영화의 위기와 맞물려 올해는 7월이 됐음에도 어떤 한국 공포영화도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게 된 지금, 불현듯 한 영화가 떠올랐다.

국내에서도 페이크 다큐멘터리 기법의 영화가 개봉한 적이 있었다. <목두기 비디오>. 이 독립영화는 각종 영화제와 인터넷 유료상영을 통해 이슈가 된 후, 2005년 극장 개봉이 결정된 전례를 갖고 있는 독특한 이력을 소유한 영화였다.

실제와 허구의 모호한 경계에서 관객들을 교란시키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더욱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목두기 비디오>는 '몰카'에 찍힌 귀신의 비밀을 추적하는 호러 다큐멘터리다. 우리 주변에서 발생한 단순한 이슈를 차분하게 객관적으로 추적해가는 르포르타주 형식을 통해 서서히 사건에 관객들의 호기심을 증폭시키며 몰입시킨 뒤, 새롭게 발견되는 증인의 증언과 증거물을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적절히 배치해 단 1초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마지막 결론 내지 반전을 보면 영화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그 궁금함에 미쳐버릴 지경이다.

<목두기 비디오>는 장르영화가 독립영화 안에서 어떻게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다분히 한국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에 새로운 영화의 기법을 도입해 이를 결합한 정공법의 모범 사례였다. 열악한 독립영화의 배급시장에서 영화관만을 고집하지 않고 인터넷을 이용, 주요 사이트 15곳에서 유료로 상영을 결정한 새로운 시도도 돋보였다. 영화를 보고 실제 사건으로 착각한 경찰이 조사를 나오고, 한 유명 주간지 기자가 취재를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으며, SBS '백만불의 미스테리'에 방송되며 큰 이슈를 만들기도 한 이 영화가 제작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03년이었다.

▲ <고死: 피의 중간고사> 포스터.

매년 3~4편 이상의 한국 공포영화들이 여름방학 시즌을 공략해 제작되며 신인 여배우들의 등용문 역할을 자처했고, 인기 여배우들은 호러퀸을 꿈꿨으며, 신인 감독들은 성공적인 충무로 입봉을 노렸다.

하지만 올해는 <고死: 피의 중간고사>만이 겨우 한국 공포영화의 명맥을 이어가게 됐다. 한국영화 제작의 관행은 공포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가 뿌리 내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커녕 그 싹조차 잘라버렸다.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적은 돈으로 어떻게 만들어볼까'보다 '적은 돈으로 어떻게 많이 벌어볼까'를 우선하다보니, 공포영화는 내실은 없는데 몸집만 비대해져버렸다. 덩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아이디어는 거세되지만, 안전함을 추구하는 입김은 거세지기 마련이었다.

이슈가 된 다른 나라의 공포 트렌드를 쫓아 졸속 제작되는 안일한 기획, 인기 여배우와 신인 감독의 캐스팅이 한정된 제작비의 운용 속에서 공존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서 한국 특유의 공포, 전문 인력의 양성은 어불성설,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올 여름, <강철중: 공공의 적1-1>을 필두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님은 먼곳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 스타 감독과 스타 배우를 앞세운 대규모 영화들의 흥행이 마치 한국영화를 위기에서 구할 것처럼 시끌벅적 이다.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도 필요하지만, 적은 제작비지만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장르영화들도 위기를 돌파하는 열쇠임에는 분명하다. 그 중 공포영화는 여름 한철 장사인 팥빙수처럼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장르로 인식돼 온 것이 사실이다.

팥빙수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만드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인 장르다. 팥과 얼음만으로 기본적인 맛을 낼 수 있기도 하지만, 만드는 사람에 따라 팥과 얼음에 간단한 몇 가지 재료로 저렴하지만 맛있게 만들 수도, 신선한 과일, 쫄깃쫄깃한 떡과 젤리, 부드럽고 달콤한 연유, 고소한 미숫가루 등 온갖 재료를 쏟아 붓고도 막상 숟가락으로 비비면 특색 없이 밋밋한 맛으로 만들 수 있는 기이한(?) 솜씨를 뽐낼 수 있는 장르이기도하다. 멀리 스페인에서 제작된 <알.이.씨>를 부러워하기 전에 <목두기 비디오>를 떠올려보면,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 서정환 조이씨네 편집장
후덥지근한 날씨도 짜증나지만 허경영보다 황당한 일기예보는 더 짜증난다. 장마라더니 비는 안 오고,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더니 집중 호우가 쏟아진다. 대낮에 햇빛은 강렬하기 그지없고, 열대아는 모기와 쌍으로 기승을 부린다. 초복이 며칠 안 남았다. 잘 만든 삼계탕보다 잘 만든 한국 공포영화가 개인적으로는 더위를 이길 수 있는 더 큰 몸보신인데, 올해는 중복까지 몸보신 하기는 글렀다. 다행히도 말복 전날에 개봉하는 <고死: 피의 중간고사>가 제대로 몸보신을 시켜 줄 수 있을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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