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게 땀 흘려 일한 대가로 보다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였다면, 보니와 클라이드는 강도짓을 하기보다는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니와 클라이드가 강도 행각을 일삼은 1930년대 미국은 장하준 교수가 일컫는, 성공으로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차단당한 상태였다.
소작농은 땅을 담보로 잡히지만 은행에 대출금을 갚지 못해서 은행원에게 대들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즉사한다. 하지만 은행이라고 사정이 나을 건 없다. 담보로 잡힌 땅을 받아도 돈으로 바꾸지 못하기에 그렇다. 누군가가 땅을 사야 은행이 현금을 마련할 수 있지만 땅을 살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니 은행에도 돈이 돌지 않는다. 은행을 털려던 클라이드에게 은행원이 우리조차 돈이 없다고 항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돈 때문에 땅을 빼앗기지만, 은행에서마저 돈이 돌지 않았던 때가 대공황 당시의 미국이다.
보니는 소녀 시절부터 할리우드 스타를 꿈꾸지만 웨이트리스로 꿈을 접어야 했고, 클라이드는 다리 밑 천막촌에서 거지나 다름없는 빈천한 삶을 3년 동안 이어가야 했다. 뮤지컬의 프롤로그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어린 시절 이 두 남녀가 얼마나 척박한 환경 가운데서 자랐는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당시 미국 사회가 경제적인 신분 상승의 사닥다리를 차단당한 사회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제적인 불황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다 보니 요즘 뮤지컬에는 불평등한 대우에 대한 분노 혹은 분배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몇몇 사례만 보자. <엘리자벳>에서는 왕후가 우유로 목욕을 하는데 국민들은 마실 우유조차 없어 ‘밀크’라는 넘버를 부른다. 국민은 마실 우유조차 없건만 황후라는 여자는 우유로 펑펑 목욕을 해대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두 도시 이야기>에서는 민중이 권력을 잡자 그동안 학대당한 정서를 귀족에게 단두대로 되갚고 있었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성공의 사닥다리가 막힌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지만 그 방식은 남의 돈을 빼앗는 왜곡된 방식으로 변화하여 나타난다. 먹을 것이 부족한 서민에게 무료로 빵을 나눠주는 장면 역시 <보니앤클라이드>가 분배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는 의외성으로 나타난다. 기존 아기병사 이미지와는 달리 남성적인 감성이 물씬 묻어나고 있었으며, 남성적인 군무를 소화한 아이돌답게 시원시원한 동작이 일품이었다. 제국의 아이들 혹은 박형식의 팬이라면 욕조 안에서 안유진 혹은 리사 누나와 키스하는 장면에서 쌍불을 켜고 탄식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보니앤클라이드>는 박형식의 남성미가 재발견되는 뮤지컬이기 이전에 ‘누나의 사심’이 가득한 뮤지컬일지도 모른다. 박형식과 리사, 혹은 박형식과 안유진이 키스를 나누는 빈도가 잦기에 말이다. 그렇다고 여성 관객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누나의 사심은 관객도 충족시킨다. 박형식의 탄탄한 근육미를 볼 수 있는 상반신 노출의 기회는 그리 흔치 않기에 여성 관객 역시 누나의 사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공연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