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은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이었다. 자살문제의 심각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자살 예방의 날’에 맞춰 EBS <다큐프라임>은 특별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9, 10일 이틀 간 방송된 ‘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은 자살보도가 자살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1부와 자살 예방을 위해 힘쓰고 있는 해외 사례를 담은 2부로 구성돼 있다.

특히, 자살을 다루는 언론 보도의 긍정적인 효과를 의미하는 ‘파파게노 이펙트’(1부)가 흥미롭다.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구체적인 자살보도가 자살 고위험군에 있는 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짚고, 오스트리아 등 일부 국가에서 언론인-전문가 집단이 오랜 토론 끝에 자살보도 권고 기준을 만든 이후 자살률이 감소한 것을 보여준다. <아사히신문>은 인터넷판에 자살 기사를 올릴 때, 병원이나 상담센터 연락처를 덧붙이기도 한다. 유명인의 빈소를 ‘오스카 시상식’처럼 취재하는 한국 언론 상황을 비추어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11일 오후, <미디어스>는 5개월 동안 ‘자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파고든 김우철 PD를 만나 세계 유력 언론과 우리의 언론 보도는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보다 신중한 보도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등을 들어 보았다.

자살률을 줄이는 방법은 뭘까 고민하다 제작 시작

▲ '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1부 파파게노 이펙트, 2부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을 연출한 김우철 EBS PD (미디어스)
<다큐프라임>뿐 아니라 보통 다큐멘터리의 제작기간은 짧으면 8개월 정도, 길면 1년을 훌쩍 넘긴다. 하지만 제작진은 ‘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을 9월 10일 자살 예방의 날에 맞춰 방송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5개월 여 만에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김우철 PD는 “계속해서 ‘자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촬영하다 보니 지친다. 어제 2부 방송으로 이제 끝났는데도 피곤한 상태다. ‘자살’이란 소재가 주는 부정적 에너지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털어놨다.

진로직업청소년부 소속으로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김우철 PD는 원래 청소년 폭력을 주제로 한 다큐를 구상 중이었다. 하지만 OECD 국가 가운데 8년 연속 자살률 1위를 기록하는 등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어 방향을 틀었다. 자살이 개인이 아닌 ‘전 사회적 문제’라는 중심생각은 의미 있었으나, 이미 많은 다큐에서 다룬 내용이었다. 김우철 PD는 최대한 자살률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이 뭘까 고민했다.

“자료 조사 중에 언론 보도로 인해 자살이 떨어졌다는 오스트리아의 통계를 보고 제작하게 됐다. 한국은 사건사고를 상품화해 연예 프로에서까지 다루지 않나. … 우리 언론인들이 조금만 노력을 해 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접근을 했다. 관련 연구를 하는 세계 석학들은 ‘언론이 충분히 자살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은 괜찮지만 자살 고위험군에게 ‘베르테르 효과’(유명한 인물 등이 자살할 경우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를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그걸 줄여야 한다는 얘기였다”

‘자살보도 권고 기준’ 준수로 자살률 낮춘 나라들

오랫동안 자살률과 언론 보도에 대해 연구해 온 세계 석학들은 일제히 “한국의 자살보도가 너무 자극적이고 구체적”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만 전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 오스트리아 언론이 '자살보도 권고 기준'을 받아들이면서 자살보도가 줄었고, 그에 따라 자살률도 감소했다. ('파파게노 이펙트' 캡처)

자살률과 언론 보도의 관계에 주목한 대표적인 나라는 오스트리아다. 학자들은 1980년대에 오스트리아의 지하철 자살률이 갑자기 높아진 것을 두고, 당시 미디어가 자살 사건을 상세하게 보도한 것이 영향을 줬다고 판단했다. 학자들은 “상세한 자살보도가 또 다른 자살을 부르고 있으니 자제해 달라”며 ‘자살보도 권고안’을 내놨고, 87년 이후부터는 다수 언론사가 이를 받아들여 지키고 있다.

“그분들(해외 기자들)은 자살을 연구하는 석학들과 현장에서 취재하는 보도기자의 중간 선상에 와 있더라. 보도를 해야 한다는 기자로서의 가열찬 취재의욕과 함께 ‘이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탄탄한 학문적, 이론적 뒷받침이 같은 수준에 와 있었다. 오스트리아 <디프레스> 기자는 타블로이드의 자살보도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반면교사 삼고 있었다. 데스크와 기자들, 학자들이 직접 협의해 질문하고 토론하다 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해답이 나왔고, 그래서 이런 일도 가능한 게 아닐까 싶었다”

“(취재하며) 정론지와 타블로이드의 차이를 확실히 느꼈다. 정론지는 절대 (자살보도 과열 경쟁에) 움직이지 않고, 타블로이드를 경쟁상대로 보지도 않았다. 정론지의 품위를 지킨다고 할까. 자신들이 언론의 정도를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언론 역사가 오래된 유럽이나 미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웃나라 일본 <아사히신문>이 자살예방 민간단체의 항의를 받은 이후, 6년 여 간의 토론 끝에 지난해 자살보도 권고 기준을 만든 것을 보면, 단순히 ‘유럽만의 사례’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 WHO(세계보건기구)가 내놓은 자살보도 권고안 ('파파게노 이펙트' 캡처)

김우철 PD는 “시청자들은 유럽이야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 사례가 지니는 의미가 컸다”며 “일본 TV는 굉장히 자극적이지 않나. 그런데 <아사히신문>이 그런 걸 다 깨고 자구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크게 와 닿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본 자살률은 세계 2위다. 어떻게 보면 자살률 2위 나라에게는 배울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2위인 것보다 지금 일본의 자살률이 줄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며 “언론의 노력도 있었고 민단체가 정부 문을 두드려 정부를 움직이게 하고, 지자체도 자살률 전수조사에 들어가고… 저런 자세와 노력들이 자살률을 줄이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 언론 사례에 말 아낀 이유

“부모가 아이를 먼저 죽이고 같이 죽는 걸 ‘동반자살’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위험하다. ‘살인’ 아닌가. 오히려 살인이라는 걸 계속 인식시키면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죄의식이 생기게 되는데, ‘동반자살’이라는 말은 상황을 미화하거나 자살에 대한 공감도를 높이는 면이 있다.

… 죽은 이유는 죽은 사람만이 안다. 그런데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가 죽게 된 이유를 주변 사람들에게 듣고 풀어 얘기한다. 최대한 말을 아껴야 한다. 자살 방법도 거론하면 안 된다. 안재환 씨 자살 이후 자살 도구로 번개탄, 청테이프를 사용하는 게 많아졌다고 한다. 결국 사람들에게 자살 방법을 다 알려주는 것이다. (자살 소식을) 특종으로만 여길 게 아니라 (보도 후) 누군가는 이걸 따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생명이 달린 것 아닌가”

자살을 다루는 한국 언론 보도에 대한 김우철 PD의 지적이다. 고 최진실 씨 빈소 취재모습을 본 석학들도 “아시아 자살보도가 미국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다소 감정적인 것 같군요”, “누가 사망했다는 사실만 쓰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자살 방법까지 자세히 쓰면 그것 자체가 안내서가 돼 버립니다” 등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 비엔나 국립 의과대학 심리학연구소장이자, 오스트리아 자살예방센터장을 맡기도 했던 게르노트 소넥은 한국 언론의 지나치게 상세한 자살보도를 지적했다. ('파파게노 이펙트' 캡처)

하지만 ‘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에는 한국 언론을 다룬 부분이 거의 들어있지 않다. 취재 열기가 뜨거운 한국의 자살보도 행태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면 한국 사례도 당연히 들어갔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김우철 PD는 “우리 언론 상황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고 말하는 것은 좀 아니다 싶었다”며 “축적된 연구과 통계로 말하는 해외 석학의 입을 통해, 실제로 변화를 이룬 언론사들의 사례를 갖고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잘라 말했다.

“기자는 알 권리를 위해 빠르게 뉴스를 전달하는 게 가장 큰 업무이다 보니 (모르는 사이) 자살보도에 상세한 묘사가 포함될 수 있다. 자살보도 원칙을 하나하나 몸에 배게끔 하기까지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걸 무시한 채 언론인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윽박지르듯이 하면 역효과만 일어난다. 언론인 스스로가 ‘신중한 자살보도’가 왜 중요한지 깨달아야 한다”

‘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을 찍으면서 WHO(세계보건기구)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맞추려고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했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는 김우철 PD는 이번 다큐 방송 이후 EBS 보도국도 권고기준을 맞추는 데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보도 쪽에서도 뉴스를 만들 때 (권고기준을) 철저히 지켜나가겠다고 했다. 방송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보여줬으니 EBS도 그렇게 나가야 하지 않을까”

▲ 오스트리아의 한 시민이 자살보도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있다. ('파파게노 이펙트'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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