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는 촛불이 꺼지기를 갈급하는 매체로 첫손 꼽힌다. 중앙일보의 염원만큼은 아니지만, 시나브로 촛불은 연중행사에서 주례행사로 바뀌어가고 있다. 촛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곳은 정작 중앙일보 지면이다. 거리에서 보았듯이, 촛불은 확실히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장한다. 중앙일보 11일치 10면(사회면)은 ‘사실’의 저널리즘에서 멀다. 논픽션의 형식을 빌린 픽션, 요즘 <tvN> 따위 케이블 채널에서 유행하는 ‘상상’의 팩션에 더 가깝다. 지면은 촛불의 부정적 연상 기제들로 작동된다.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처럼.

“PD수첩 왜곡보도 내부 물증 나왔다” 호들갑

▲ 중앙일보 11일치 10면 머릿기사
‘PD수첩 광우병프로 사내 심의서도 “사실관계 확인 유의” 등 지적받았다’. 4단 두 줄 꺾기 머릿기사 제목이다. 2단짜리 작은 제목은 ‘MBC 심의부 프로그램 재심의 들어가’. 본문을 보면, PD수첩의 광우병 관련 보도들은 MBC 심의평가부 사전심의에서 ‘사실관계 유의 바람’ ‘객관성 유지에 주의 바람’ ‘사실관계 검증에 주의 바람’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또, MBC가 ‘재심의 불가’ 방침을 바꿔,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이례적으로) 재심의에 들어갔다고 한다.

기사 읽기는 축자(逐字)가 아니다. 기사는 흐름과 맥락 위에서 읽힌다. 지금의 ‘촛불’은 이명박 대통령이 “누가 살 돈을 대줬느냐”고 캐물었던, ‘파라핀 덩어리 한 가운데 꽂힌 심지에 붙은 불’이라는 개념을 훌찍 넘어서, 정치·사회학적 기의를 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앙일보는 PD수첩의 광우병 관련 보도를 줄곧 ‘왜곡보도’라고 해왔다. 그러니까 이 기사는 중앙일보가 맞았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MBC 내부의 결정적 물증과 자발적 현장검증에 관한 ‘탐사보도’다.

그런데 기사가 이상하게 흐른다. 한 관계자가 말했다고 한다. “이번 사전심의 내용은 시사 프로그램에 통상 요구되는 수준이다.” 이렇게도 말했다고 한다. “보도국 출신 심의위원이 봐서 더욱 엄격하게 본 듯하다.” 이 말은 사전심의 결과가 왜곡보도의 물증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MBC의 모든 시사 프로그램이 PD수첩의 광우병 보도만큼 ‘왜곡’됐다는 전제를 충족하지 않는 한 그렇다. 오히려 문제의 프로그램만 유독 엄격하게 봤는데도 통상적인 요구수준 밖에 안 나왔다니, 이건 오히려 PD수첩이 객관성 유지, 사실관계 검증 등에서 철저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사실관계·객관성 주의’=‘길 갈 땐 차 조심’ 수준

▲ 11일치 10면 왼쪽 4단
중앙일보 기자의 의도가 궁금하다. 이 관계자의 말조차 거짓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의도라면 거짓임을 입증하거나, 적어도 방증할 새로운 ‘사실’이 있어야 할 텐데,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래서 이 기사는 결정적으로 저널리즘이 아니다. ‘사실’로 위장하고 촛불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놀이일 뿐. 이 기사를 ‘시각적’으로 과장한 의도는 명백하다. 이 관계자가 뭐라 말했든, 제목을 본 독자는 “PD수첩이 왜곡보도를 했다”로 읽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나부터 처음엔 ‘PD수첩 딱 걸렸군’ 하고 읽었다.

복수의 MBC 시사교양국 PD들에게 기사 내용과 관련해 물어 봤다. 한 PD는 ‘지적받았다’는 표현이 어처구니없다고 했다. 대본이 방송을 코앞에 두고 나오기 때문에 심의평가부는 해당 프로그램의 홍보안이나 기획안만 보고 주의를 ‘환기’시킬 뿐이라고 했다. 다른 PD는 “‘주의하라’는 표현은 매일 나온다”고 했다. 이를테면 길가는 아이에게 “차 조심해”라고 당부하는 수준이라는 얘기다. 중앙일보 기자는 그걸 모르고 썼을까? “‘젖소’를 ‘이런 소’로 바꿔 표현하면 시청자들이 ‘이런 소=광우병 의심소’라는 느낌을 받는다”는 주장으로 지면을 도배했던 건 정작 중앙일보가 아니었던가?

심의평가부의 한 실무자는 “PD수첩 광우병 보도에 대한 재심의에 들어갔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사전심의 과정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짚어주는 것일 뿐 재심의는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전날까지 조선·동아·한나라당과 더불어 “MBC가 상황실 회의를 통해 강경 입장을 정리했다”고 거세게 비판해놓고, 하루 만에, 그것도 열흘 전 시제(7월1일)로 ‘방향 선회’를 했다니. 도대체 7월 중순인 지금 MBC가 결정적 물증을 가지고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는 얘긴가, 반대로 강경하게 버티고 있다는 얘긴가?

▲ 손정은 앵커 노조집회 참석을 비판한 기사
“MBC가 여성 앵커를 악용했다”는 중앙일보의 ‘악용’

머릿기사 바로 밑에는 점선이 그려져 있다. 머릿기사와 관련된 기사가 따라온다는 뜻이다. 큰 제목은 ‘“MBC, 여성 앵커를 정치적 악용”’, 작은 제목은 ‘손정은 아나운서 피켓시위 참석…인터넷미디어협회서 비난 성명’이다.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라는 낯선 단체가 낸 성명을 여성 아나운서 얼굴 사진까지 넣어 3단 제목으로 편집한 것이다. 기사대로라면 노조원인 이 여성 아나운서는 노조총회가 끝나고 이어진 행사에 노조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거기에 대고 “MBC가 여성 앵커를 정치 투쟁의 도구로 악용했다”는 주장을 대서특필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정작 중앙일보 자신이 ‘미모의’ 여성 아나운서를 정치적으로, 그것도 선정적으로 악용하려는 것 아닌가?

▲ KBS뉴스에 대한 방통위 제재 건의를 다룬 기사
여성 아나운서 기사 아래에는 다시 ‘“KBS 특별감사 다룬 뉴스9, 자사 입장만 옹호…공정성 잃어”’라는 2단 꺾기 큰 제목에 ‘방송심의소위 제재 건의’라는 1단짜리 작은 제목의 기사가 붙었다. 이쯤 되면 사회면이 아니라 거의 미디어면 수준의 집중 편집이다. 그것도 “감사원의 입장과 이에 반대되는 언론단체들의 의견을 균형 있게 전달했다”(KBS 기자협회)는 반발을 사고 있는 제재 ‘건의’에 대해, 정색을 하고 보도하고 있다. KBS의 ‘공정성’에 대한 중앙일보의 집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전대미문의 사진 조작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의 외부에 대한 무차별적 성찰인가?

가로 3분의2를 MBC와 KBS 기사로 통으로 편집한 이 지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전공노 대의원대회 무산’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실렸다. 사진설명은 이렇다. ‘전국공무원노조가 10일 충북 청주시 흥덕구 근로복지관 안에서 열려고 하던 전국대의원대회가 무산됐다. 이들은 대의원대회에서 대통령 불신임 총투표 실시 여부를 표결로 결정할 계획이었다.’ 기사의 6하 원칙 가운데 무엇이 빠졌을까? 맞다. ‘왜’가 빠졌다. 대의원대회는 왜 무산됐을까? 경찰의 원천봉쇄 때문이다. 사진설명의 기본조차 검증을 못하니, “사진뿐 아니라 기사의 검증 시스템도 크게 강화하겠다”고 했던 전날 중앙일보의 약속이 참 무색하다. 그런데 ‘왜’는 왜 빠졌지?

▲ 전공노 대의원대회 무산과 관련한 사진기사

여성 앵커보다 못한 이건희 전 회장의 위상?

지면이 연출한 이미지를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의 어록에 빗대보면, “MBC·KBS는 참 나쁜 방송이네요”(참 나쁜 대통령이네요)이고, 공무원들이 대의원대회나 하고 있으니 “그럼 구청·동사무소는 누가 지키나요”(보안법 폐지하면 휴전선은 누가 지키나요)이다. 이런 방송의 선동 하나로 불붙은 거리의 촛불은 도깨비불일 뿐이다. 또 도깨비불에 편승해 역모를 꿈꾸는 공무원들은 너무나 불온하고 위험하다. 세상이 이 지경이다 보니 이건희 전 삼성 회장에 대해 특검이 징역 7년 벌금 3500억원을 구형했다는 기사는 지면 맨 아래 구석에 처박힐 수밖에 없다. 이 전 회장은 대한민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삼성그룹을 지배하고 있지만, 중앙일보 지면에서 그의 위상은 MBC 여성 아나운서의 그것보다 훨씬 못 하다.

▲ 삼성특검의 이건희 전 회장 7년형 구형을 다룬 기사
그러나 이 전 회장은 참으로 영웅적 면모를 갖춘 거인이다. 법조 기사의 제목(이건희 전 회장 “모든 책임질 것”)이 이례적으로 피의자의 진술을 딴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기사 본문도 특검의 구형 이유보다 이 전 회장의 진술 내용을 더 크게 배치했다. 이 전 회장은 “열심히 경영만 하다 보니 주변 문제를 소홀히했고 우리 사회와 대화도 부족했다. 경위야 어찌 됐건…부끄럽게 생각한다”면서 ‘죄가 아닌 죄’를 인정하는 무한책임의 통큰 모습을 보였다. 삼성 임직원들까지 도닥이는 세심함까지 갖췄다. 이런 사람을 어찌 국제사회가 외면할 것인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후안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 등 해외 저명인사들이 이 전 회장의 업적을 참작해 선처를 호소하는 건 마땅하다. 적어도 지면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중앙일보 지면이 이상하다고 느껴지는가? 당신 눈이 유령의 집 촛불에 홀려서 그런 건 아닐까 의심해 보기를 중앙일보 지면은 촉구하고 있다. 당신 자신을 위해 지금 당장 그 거짓의 촛불을 끄라고 설득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스로 또하나의 촛불을 밝혀, 문살문 창호지 같은 지면 위에 ‘사실’의 그림자가 어룽대도록 팩션 놀이를 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라고 지면은 나즈막히 고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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