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험’에서 시작하자. 의외로 간단한 실험이다. 준비물은 코 흘리는 4세 아이들 몇 명과 싸구려 마시멜로 과자 몇 개. 적막이 감도는 실험실에 아이와 과자를 함께 가두고 지켜보는 거다. 자신과 마시멜로밖에 없는 작은 세계에서 아이는 무엇과 대면하는지. 그건 하나의 물음, 차라리 실존적인 물음이다. 눈앞에 놓인 한 개의 마시멜로를 입에 넣고 달콤함을 만끽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방 안에서 홀로 마시멜로를 노려보며 영원과도 같은 15분을 보낸 후 (고작!) 두 개의 마시멜로를 얻을 것인가? 너는 마시멜로고 나는 아이야, 너는 마시멜로고 나는 아이라고… 아이는 갈등하고, 갈등하고, 갈등한다. 정말이지 끔찍한 실험이고, 빌어먹을 물음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사르트르가 생각한 ‘자유’가 바로 이런 모습이리라.

대니얼 카너먼은 “충동적이며 직관적인 시스템 1(빠른 직관)”과 “추론이 가능하며 신중하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게을러 보이는 시스템 2(느린 이성)”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월터 미셀과 스탠퍼드 팀의 (비윤리적인) 마시멜로 실험을 원용한다. 차이는 이렇다 : 시스템 1의 세계에는 마시멜로 하나가 있고, 마시멜로는 달콤하며, 시스템 1은 그것을 원한다. 그것도 지금 당장. 반면 시스템 2의 전망에는 마시멜로 두 개가 있다. 두 개로 늘리는 방법을 알고, 그러면 더욱 이득이라는 사실 또한 아는 것이다. 이제 시스템 2는 1을 설득해야 한다.
'마시멜로 실험'과 두 개의 시스템
결과는? 참아내는 아이가 있고 참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그리고 당신과 나와 호아킴 데 포사다(<마시멜로 이야기>의 저자)와 그의 수백만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곧 4세 아이들 앞에 펼쳐질 인생의 성공과 실패로 이어진다(고들 한다). 될성부른 인간은 마시멜로부터 알아본다고 해야 할까, 네 살 시스템 여든 간다고 해야 할까. 어린아이들을 끔찍한 딜레마에 밀어 넣은 뒤 얻어낸, 동심과는 삼만 광년쯤 떨어진 결론이다.
그렇다고 <생각에 관한 생각>을 포사다 류의 또 다른 유사-심리학-자기계발-스토리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저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세상에 차고 넘치는, 독자에게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것으로 자신의 자기계발을 실현하는 구루가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인이 직접 뽑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인’이자 [포린 폴리시]가 선정한 ‘세계 일류 사상가’이며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이고, 심리학자로서는 최초로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 나는 당신의 시스템 1을 자극하기 위해 다소 불필요한 수식어를 늘어놓고 있다. 내가 성공했다면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스위치가 켜지고 빛이 쏟아졌을 것이다. 바로 ‘후광 효과halo effect’라는 이름의 빛이.)
카너먼은 시스템 1과 시스템 2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분석한다. 시스템 1은 “거의 혹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발적인 통제에 대한 감각 없이 자동적으로 빠르게 작동한다.” 소리가 난 곳으로 주의를 돌린다거나, 미완성된 문구를 완성한다거나, 끔찍한 사진을 보고 ‘역겨운 표정’을 짓고, 상대의 목소리에서 적대감을 감지하는 것은 모두 시스템 1이 하는 일이다.
반면 시스템 2는 “복잡한 계산을 포함해서 관심이 요구되는 노력이 필요한 정신 활동에 관심을 할당한다.” 경기에서 출발 신호가 울리기를 기다리거나, 두 핸드폰의 기능을 비교하거나, 연말정산 서류에 각 항목을 기록하고, 복잡한 논리적 주장의 타당성을 확인하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는 시스템 2의 영역이다.
아침에 눈을 뜸과 동시에 활성화되는 시스템 1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들을 자동적으로 인식하며 시스템 2를 위해 수많은 인상, 직관, 의도, 느낌 등을 제시한다. 시스템 2는 검토하고 승인하며 인상과 직관을 믿음으로, 충동을 자발적 행위로 변환시킨다. 물론 시스템 1이 처리할 수 없는 돌발 상황이나 인지적 노력이 필요한 경우, 시스템 2가 전면에 나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효율적인 시스템(들)인 셈이다.
직관을 믿은 당신, 유죄!
문제는 시스템 1이 특정 오류에 취약하다는 사실. 앞서 언급한 ‘후광 효과’ 역시 시스템 1의 수많은 오류 중 하나다. 우리의 직관은 다양한 이름이 붙은 ‘효과’와 ‘편향’을 통해 우리를 속이고, 많은 경우 우리는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간단한 예로, 당신은 사랑니를 아프게 뽑았던 치과 의사와 닮았다는 이유로(그러나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거래처의 새 담당자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있고, 그 결과 중요한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반대로 말해볼까. 대부분의 사기꾼은 믿음직스럽고 선한 인상을 하고 있고, 순박한 직관은 당신에게 믿으라고 말할 것이며, 직관을 믿은 당신은 사기를 당한다. 그런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스템 2가 있지 않은가?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시스템 2가 있다.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하지 않는’ 세상 모든 부모의 게으른 자식과 닮은 시스템 2가. 시스템 2의 특징은 작동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노력을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력이 필요하며, 따라서 시스템 2는 종종 작동하지 않는다. 그냥 시스템 1의 말을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스템 2의 게으름을 탓하기도 머쓱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부모님의 자식이었고, 카너먼의 말처럼 “자신의 사고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란 불가능할 정도로 지루하고 비참”하니까.
우리는 항상 어딘가 찌뿌듯하고 제 컨디션이 아닌 몸과 함께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게으르고 종종 태만한 시스템 2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가 단순히 개인의 차원을 넘어 조직과 사회로 확장된다면 어떨까? 여러 전문가들과 정책결정자들이 우리와 똑같은 오류에 빠진다면? 단순히 “인간은 그럴 수 있다”라는 식의 단순해서 반박 불가능한 말로 인정하고 넘어가기에는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 너무 크다.
물론 그들도 실수를 한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조차 시스템 1이 야기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도 종종. <생각에 관한 생각>에는 그런 예들이 얼마든지 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 역시 그것이 오류임을 깨닫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며, 설사 누군가 지적한다 한들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사실이다. 아니, 그들은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직관을 넘어 자아정체성까지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 그래서 보시는 대로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가 이토록 엉망인 이유를 알겠는가?
'생각을 생각'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
카너먼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수많은 전문가들에게, 잘나신 정책결정자들에게, 직관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말한다. 직관은 중요하다. 하지만 완벽하진 않다. 운동을 통해 찌뿌듯한 몸을 개운하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오류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우리의 생각 역시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좀 더 잘 작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적 직관과는 반대로 ‘뮐러리어의 도형’의 두 선(<----->와 >-----<)의 길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두 도형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착각은 변하지 않지만(시스템 1) 우리는 생각을 통해 그것이 틀렸음을 판단하고(시스템 2) 다시 속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훈련은 단순히 우리를 개인적인 실수로부터 보호할 뿐만 아니라, 조직과 사회를 보호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인생에 대해 갖고 있는 습관화된 생각들까지도 새롭게 돌아보도록 할 수도 있다. 더 나은 사회와 행복한 삶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는 말이다.
너무 거창한가? 그렇다고 <생각에 관한 생각>이 빈약한 이론틀 하나를 가지고 의기양양해 하며 세상만사에 대해 하나마나한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런 책은 아니다. 카너먼은 섣불리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소개하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일 뿐이다. “회사 직원들이 간식을 먹으며 자유롭게 수다 떠는 휴게실 같은 공간”에서 “타인의 판단과 선택, 회사가 내놓은 새로운 정책이나 동료의 투자 결정을 소재로 대화할 때 사용하는 어휘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던 서문의 바람처럼, 풍부한 실험사례와 각종 이론을 소개하는 <생각에 관한 생각>은 행동경제학과 최근 심리학의 성과를 모은 일종의 종합세트라고 할 만하다. 쉽고, 또 재미있다.
덧붙여 <넛지>, <보이지 않는 고릴라>, <머니볼>, <블랙 스완>,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등 평소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던 독자라면 이미 읽었거나 한번쯤 읽고 싶어했을 적지 않은 책들이 인용되는 요소요소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즐거움은 저자의 바람처럼 동료들과 커피 한 잔 마시며 ‘타인의 판단과 선택, 회사가 내놓은 새로운 정책’ 등에 대한 수다를 늘어놓을 때, 책의 아이디어를 빌려 제법 똑똑한 척을 하는 일에 있겠지만.
그렇다면 이제 내가 똑똑한 척을 할 차례다. 오탈자와 종종 덜컹거리는 번역, 그리고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편집 상태에 대해 말해야겠다. 스티븐 킹은 “글쓰기는 사람의 일이고 편집은 신의 일이다”라고 말했다지만, 편집자도 인간이다. 특히 문장을 ‘자동완성’하는 것은 시스템 1의 일이 아닌가. 오탈자가 없을 수 없는 노릇이니, 구태여 그걸 지적하며 잘난 척하는 것도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일종의 상도에 어긋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다 읽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굳이 지적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억 자아'는 이 책에 불만을 표했다
대니얼 카너먼은 책의 후반부에서 경험 자아와 기억 자아라는 두 자아를 설명하며 또 하나의 (비윤리적인) 실험을 소개한다. 차가운 물에 손을 넣고 버티게 하는 실험이다. 참가자들은 모두 두 번에 걸쳐(각각 1분과 1분 30초) 차가운 물에 손을 넣어야 한다. 단, 1분 30초의 경우 1분이 되자마자 미지근한 물을 조금 부어 약간 더 나은 30초를 보내게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두 번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참가자들에게 (악랄한) 실험자는 묻는다. “당신은 한 번 더 손을 넣어야 한다. 대신 선택권을 주겠다.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예상과 달리 많은 참가자들이 1분 30초를 택한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카너먼에 따르면 경험 자아는 “지금 아픈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자아이고, 기억 자아는 “전체적으로 어땠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자아이다. 기억 자아에게는 고통스러운 1분에 덜 고통스러운 30초가 더해진 1분 30초가 순전히 고통으로만 가득한 1분보다는 더 나은 선택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을 전적으로 기억 자아에게 의지한다.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 즐겨 말하듯, 기억은 곧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기억 자아는 우리에게 종종 (불필요한 고통의 30초처럼)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나의 경험 자아는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는 동안 누군가 “지금 어떤가?”라고 물었다면 “무척 재미있다”고 답했겠지만, 나의 기억 자아는 책장을 덮은 후 “전체적으로 어땠는가?”라는 질문에 썩 좋지만은 않은, 어쩌면 나쁜 감상을 말할 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것은 사소한 오타 때문이고, 종종 덜컹거리는 번역 때문이며,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편집 때문이다. 그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끝부분이 살짝 튀는 CD가 40분 동안의 즐거웠던 음악 감상을 망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과연. 여전히 재수 없긴 하지만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그 말은 이 서평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 또한 이 글의 3/4를 차지하고 있는 내용은 차치하고, 그저 재수 없는 서평으로만 기억할지 모른다. 그러니 다시 <생각에 관한 생각으로> 돌아가자 대니얼 카너먼은 “기억 자아의 관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당부한다. 나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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