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자 한국경제신문 39면(오피니언)에 실린 칼럼이 가판 발행 후 최종판에서 전혀 다른 칼럼으로 교체돼 배경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한국경제신문은 지난 8일자 최종판 39면 '다산칼럼'에서 정부 개각을 다룬 <쉿! 흙탕물부터 가라앉히고>를 게재했지만 당초 가판에서는 사제단을 정치중독이라고 비난한 <사제단, 그 영혼의 타락> 칼럼을 게재했다.

가판에 실린 칼럼이 최종판에서 일부 수정될 수는 있으나 전혀 다른 내용의 칼럼으로 교체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먼저 최종판에 실린 <쉿! 흙탕물부터 가라앉히고>에서 정규재 논설위원은 "경제장관 갈아치운다고 국제 유가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물가가 하락하지도 않을 것이다. 극성을 부리는 환투기가 순치되지도 않을 것"이라며 "국민 모두가 떼를 지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로 들고 정부가 그 모순적인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로 작정하는 순간 경제는 끝"이라고 주장했다.

정 위원은 "자유 시장경제란 원자적 개인들이 각축하는 시장에서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일 뿐 길거리에서 집단으로 세력전을 벌이면서 모든 자를 만족시키는 해법을 찾기란 원리상 불가능하다"며 "부디 흙탕물이 가라앉아 법치의 질서부터 회복되기를 기다리자. 백화제방은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독이 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최종판에서 정부의 개각을 다뤘다면 그 이전 가판에 실렸다 최종판에서 '사라진' <사제단, 그 영혼의 타락> 칼럼은 얼마 전 촛불문화제 폭력 행위를 규탄하며 미사를 진행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맹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이미 세속화, 저질화 과정 밟아"

▲ 한국경제신문 7월 8일자(가판) 39면. 하지만 정규재 논설위원의 이 칼럼은 배달판에서 다른 칼럼으로 완전히 교체됐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이미 세속화, 저질화의 과정을 밟아 사실상 정치구현 사제단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민주화 시대 '정의구현'의 희생과 가치를 스스로 타락시킨 일이라고 하겠지만 급기야는 억지와 거짓조차 정당화하는 지경이 되고 만 것은 심히 우려할 일이다."

정 위원은 더 나아가 "부안 방패장에서 주민들을 핵공포로 선동하고 히스테리로 몰아간 것도 이들이며, 심지어 김현희의 KAL기 폭파가 독재정부의 날조라고 우겨대던 이들이었다"며 "정치를 하려면 사제복을 먼저 벗는 것이 순서이고 그것이 양심에도 부합한다"며 사제단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정 위원은 "종교에 대한 시민들의 관용에 편승해 정치활동을 하기로 든다면 이는 빛과 소금은 커녕 독사의 간교함"이라며 "시민의 평온한 생활과 정상적인 민주질서를 박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사제단의 지적능력이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맹비난했다.

정 위원은 "예수로부터 고독한 영혼의 위로와 평화를 갈구하는 많은 신앙인에게 던지는 충격과 상처를 교회는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라고 반문한 뒤 "무거운 짐진 자들의 어깨를 덜기는커녕 사제가 스스로 짐이 되어 걸터앉고 있으니 실로 딱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내부적으로 칼럼 적절치 않다는 반응 있었다"

칼럼 교체 배경에 대해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한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이야기 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며 "내부적으로 칼럼이 적절치 않다는 반응이 있어 바뀌게 됐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신문은 제작 과정에서 많은 게이트키핑(gate keeping 뉴스에 대한 취사선택)과정을 거치는 데 칼럼 교체도 이 과정 중 하나였다"며 "일부 칼럼에 대해 적절치 않다는 반응이 있었을 뿐"이라고 전했다.

▲ 한국경제신문 7월 8일자(최종판) 39면.
칼럼을 직접 쓴 정규재 논설위원은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신문이라는 것이 밤새 몇 번이고 바뀔 수 있는 거다. 칼럼 자체가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간혹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사제단 비하' 때문에 칼럼이 바뀌게 되었다는 일부 논란을 일축했다.

정규재 논설위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정치중독자"

정 위원은 "칼럼을 바꾼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바꾼 것 자체는 내 마음이었다. 칼럼 교체는 내 의중이었기에 그래서 다른 주제로 쓴 것"이라며 "칼럼 교체에 외부 인사가 간섭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제단을 비하하는 칼럼을 쓴 배경을 묻자 정 위원은 "덜 빠진 신부들이 국민들을 해코지 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사제단이 아닌 정치중독자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이걸 왜 취재하냐. 미디어 비평하는 곳이라면 온 국민들이 궁금함을 가지고 있을 'MBC 대국민 사기극'에 대해서 취재하라"며 기자를 향해 '훈수'하기도 했다.

한국경제신문 김영규 편집국장은 '정부의 개각'을 칼럼 교체 배경의 주된 이유로 꼽았다.

한국경제신문 김영규 편집국장 "칼럼은 현안에 따라 자주 바뀔 수 있어"

김 국장은 "아침에 갑작스럽게 정부가 개각을 단행하는 바람에 급하게 칼럼을 교체한 것이고 이는 살아있는 현안을 다루고자 하는 의도였다"며 '논란이 있어 칼럼을 교체했다'는 오피니언부 관계자 발언을 부인했다.

김 국장은 "당시 사제단의 촛불문화제 미사는 이미 끝난 사안이었고 시기적으로 정부의 개각을 다루는 게 시류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며 "칼럼은 현안에 따라, 사건이 터지면 자주 바뀔 수 있다"며 어느 언론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겨레 김형배 기획위원 "칼럼 자체를 교체하는 일, 거의 없어"

"신문사에서 칼럼이 교체되는 일이 흔하게 있다"는 김 국장의 발언에 대해 논설위원을 지닌 한겨레 김형배 기획위원은 "칼럼의 일부 내용을 수정할 수는 있지만 칼럼 자체를 교체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반박했다.

김 위원은 "칼럼이나 사설에서 사실 관계가 달라질 때 혹은 상황이 바뀌었을 때 일부 내용을 수정할 수는 있지만 갑자기 터진 중대한 사안, 비상사태가 아니고서는 칼럼을 교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이어 "내부적으로 상당히 논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걸고 쓰는 칼럼을 쉽게 내릴 수는 없다"며 "칼럼을 교체하게 된 데에는 편집국장 이상 인사들의 종용이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국경제신문에 2주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정 논설위원은 지난해 11월 27일 칼럼에서 "삼성 비자금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으며, 김용철 변호사와 사제단 신부를 두고 "똥파리" "사기꾼" "역겹다" 등의 표현을 써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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