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당국이 얄밉기는 하지만 그들이 ‘꽃놀이 패’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체포동의안에선 문제의 ‘RO’ 회합에 통합진보당의 다른 의원 두 명이 참여했다는 얘기까지 등장했다. 정황상 두 사람은 김재연 의원과 김미희 의원으로 추측된다. 체포동의안은 비례 의원 한 명과 지역구 의원 한 명을 말하고 있는데 통합진보당의 비례 의원은 이석기 의원을 제외하면 김재연 의원 뿐이고 지역구 의원 중 경기도가 지역구인 의원은 김미희 의원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석기 의원만이 문제가 아니라 통합진보당이란 조직 전체가 해명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의원 제명안을 넘어 정당 해산에 대한 압박까지 이어지는 것이 앞으로의 수순일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아직까지 사태를 어느 정도에서 수습해야 할지 내부 방침조차 제대로 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수습을 할 수 있는 상황조차 아닌 것으로 보인다.
‘RO’의 정세인식, 국정원을 닮았다
▲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와 당원들이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에서 '국가정보원의 내란음모 조작 규탄 및 체포동의안 원포인트 본회의 반대'를 위한 전국지역위원장 긴급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이와 별도로 통합진보당과 국정원의 공방 속에서 한국 사회를 작동하는 어떤 공모관계가 드러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극우파와 주사파가 적대적 공생관계에 놓여 있다는 식의 비평도 상투적인 것이 되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자는 서로가 서로를 강화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외려 상대방을 증오하지만, 공통의 인식일 공유한다. ‘이석기 녹취록’이 황당한 것은 거기에 담긴 사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세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사회의 보통의 상식인이 동의하지 않을 세 가지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그 인식은 첫째, 북한이 아직도 체제 보장이 아닌 남한 사회를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 둘째, 북한이 그러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 셋째, 북한이 남한을 점령할 경우 그 통치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인식은 하나하나가 동의하기 힘들고 세 가지가 함께 한다면 경악스러운 수준이다. 북한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핵무기와 미사일개발 및 군사적 무력도발 등은 남한을 점령하기 위한 책동이 아니라 북한 체제를 보장받기 위한 전술적 수단이란 것이 상식적 인식이다.
또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남한 역시 인명피해와 경제적 피해가 궤멸수준일 것이기에 남한도 전쟁을 결단코 피해야 하지만, 전력격차나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국제관계를 고려해볼 때 북한이 승리할 확률은 없을 거란 게 상식적 인식이다.
마지막으로, 설령 북한이 폐허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무리한 가정을 한다 해도 이미 사반세기 정도 민주화를 겪은 한국 사회 시민들을 상대로 한 통치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적인 인식이다. ‘RO’ 회합에서의 이석기의 발언이 황당한 이유는 이러한 종류의 상식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세 가지 인식은 한국의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 정훈교재와 예비군 교육에선, 대한민국의 성과가 낯간지럽게 예찬되면서도 그 나라가 월남처럼 하루아침에 패망할 수 있는 나라로 묘사된다. 국정원은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주체사상에 투항할까봐 두려워 정체를 숨기고 댓글 공작을 통해 여론을 왜곡해야만 한다. 국가보안법이 사라지고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한반도는 금세 적화통일될 것이기에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친북주의자란 게 그들의 생각이다.
공안당국, 운동권의 자의식에 ‘펌프질’하다
▲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와 진보성향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8월 29일 오전 서울 광화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정원 내란음모 조작과 공안탄압 규탄 및 대책위 발족 대표자회의 및 기자회견에서 공안탄압 중단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성향 시민단체들은 검찰과 국가정보원이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진보당 관계자와 진보단체 인사를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 및 압수수색을 실시한 데 맞대응하기 위해 가칭 '국정원 내란음모 조작과 공안탄압 규탄 대책위'을 발족키로 했다. (뉴스1)
이 인식에선 북한이나 운동세력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된다. 국정원 등 공안당국이 실제로 그렇게 믿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정권 유지에 편리해서 만들어냈을 그 인식을 보수주의자들은 받아들인다. 흥미로운 것은 체제가 과대선전한 그 일그러진 거울상을 통해 운동권의 허영도 강화되는 듯하다는 것이다. ‘RO’ 회합의 이석기 발언은 자신이 엄청난 혁명가임을 강조하려는 듯한 허세로 가득 차 있다. 실제로 그 발언들이 대중들에게 공개되면 ‘물총 퍼포먼스’나 하고 애국가나 불러야 하는 그 사람이 말이다. 민혁당으로 몇 년 살았고 공안당국이 대한민국을 뒤집을 수 있는 엄청난 세력이라 ‘포장’해주니 본인도 그렇게 믿었던 것일 테다.
1979년 11월 발생했던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에 망명생활을 한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는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서술이 나온다. 국내에서 무서운 혁명집단의 일원으로 ‘포장’된 그는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하는데, 막상 활동내용을 설명하려다 보니 삐라를 뿌린 것 말곤 한 일이 없다. 삐라 살포는 프랑스에선 경범죄로도 처벌받지 않는 일이다. “나는 미제국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해봤자 프랑스 공무원은 “그건 나도 그렇다”고 답할 뿐이다.
홍세화는 한국 사회의 실상과 국가보안법 문제를 떠듬떠듬 고백하며 망명에 성공했으나 그런 자신의 모습에서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외국에 나와 자신의 행동을 객관화해볼 기회가 없었던 운동권이라면 삐라를 부린 것만으로도 자신이 엄청난 혁명과업에 투신했다고 여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한국 사회도 운동세력의 자의식에 거품을 끼게 하는 일을 그만두고 성숙한 민주주의 체제의 관점에서 정치적 적대자들을 대하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RO’의 정세판단과 동일한 극단적 세계관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이 존속하고 번영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진보파의 역편향의 문제도 있다
▲ 금일(3일)자 한겨레 35면 김동춘 칼럼
반면 진보주의자들의 경우 ‘RO’와 국정원이 공유하는 그 인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반대편 극단에 서 있다. “130명이서 무슨 내란을 하느냐”와 “조작사건을 많이 만들어낸 내란 음모죄의 부활” 운운하는 시선이 그것이다. 금일 한겨레에 실린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의 칼럼 <아직 ‘내란음모’가 있는 나라>는 그러한 진보적 관점의 역편향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글이라 할 만하다.
김동춘 교수는 내란음모죄로 수사한다는 뉴스를 듣고 “80년 김대중 내란음모보다는 71년 11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했던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이 떠올랐다. 대학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하숙집’에서 내란을 음모하다니…”라고 개탄했다. 그는 “그들이 무슨 내란을 모의할 힘은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21세기에 내란음모죄를 들고 나온 국정원이나 이들의 먹잇감이 된 80년대식 ‘애국세력’을 보고 참 ‘어이없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다”라면서 “이번 건은 확실히 박정희 스타일, 아니 박정희가 전범으로 삼았던 조선총독부 스타일이다”라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71년 11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이 황당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결이 전혀 다르다. 일단은 ‘4명’과 ‘130명’이란 크기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크기가 본질적 문제는 아니다. 경기동부연합이나 ‘RO’가 그들끼리만 혁명을 하려 했고 그 모의에 현역 국회의원이 끼지 않았다면 ‘4명’이 아닌 ‘130명’이라도 김동춘의 견해에 원론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석기의 발언은 북한이 전쟁을 수행할시 이에 전적으로 협력하여 남한의 공권력을 교란하기 위해 애쓰겠다는 취지다. 방법론의 측면에서 비현실적이고 꿈같은 얘기로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130명이서 내란을 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라 치부할 수는 없다. 남북한 간의 전쟁은 피해야 할 일이지만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북한이 전면전이란 도박을 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하더라도 국지전이 벌어질 가능성은 당연히 있고 ‘RO’ 같은 조직들이 정세판단을 잘못하고 (그들이 늘 하는 일이 그것 아닌가) 활동을 개시할 가능성도 당연히 있다.
구체적 계획이 수립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RO’ 조직원 일반을 내란음모죄로 처벌하는 건 과하다 비판할 수 있겠지만, 국가 기밀정보를 북에 넘길 수도 있는 현역 의원들이 그러한 모의에 가담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가벼운 일이 결코 아니다.
'RO' 사건에 대한 올바른 대처법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정신병자를 왜 처벌하려 드느냐.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전쟁 상황을 가정한 실제적 행동 결의가 이루어진 점과 합법정당의 속내에 감추어진 사상이 민주헌정과 헌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을 애써 간과하는 단편적인 인식이다. 형법의 차원에서 내란음모죄나 내란선동죄가 성립하는지는 또 별도의 문제나, 그들이 한 행동을 내란음모나 내란선동으로 부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사건을 과거의 ‘얼토당토않은 내란음모 조작 사건’과 구별해야 과거 군사독재정권의 행태도 더 설득력 있게 비판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별개로 국정원이 수사권을 가진 현실을 비판할 수 있고, 국정원이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행태를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녹취록과 체포동의안에 묘사된 그 조직의 행태를 옹호할 수는 없다. 오히려 ‘RO’의 생각과 행동이 민주주의에 심대한 문제라는 판단을 해야 하며, 공안논리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제재조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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