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있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기국회 첫 본회의를 마치고 의원회관으로 향하고 있다. 국회는 이날 정기국회 개회식을 마친 직후 곧바로 첫 본회의를 열어 국회 사무처 의사국장으로부터 이석기 의원의 체포동의서 제출 사실을 보고 받았다. (뉴스1)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의원 측은 ‘RO’ 모임 문건이 드러난 이후부터 줄곧 이것이 왜곡이며 날조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오락가락하는 해명을 보건대 한국일보가 단독보도한 녹취록 내용의 상당 부분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의 일부 내용은 왜곡 편집된 것일 수 있다. 국정원이 미묘한 시기에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을 겨냥한 행위의 정치적 의도는 뻔한 만큼, 국정원이 자료를 왜곡했다면 이는 국정원의 존속 여부를 회의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이석기 의원과 'RO' 측의 행위가 국정원의 댓글 공작을 정당화하지도 않고, 국정원 개혁의 필요성을 반감시키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태가 이쯤 되면 녹취록 내용이 사실일 경우 통합진보당에게 필요한 대응이 무엇인지도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통합진보당 이상규 의원은 이 사건이 국정원에게 거액으로 매수된 ‘프락치’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라 규정했다. 정보가 어디에서 새어 나갔는지에 집중하고 녹취록의 진위 여부에 대해선 함구하는 것이 과연 그들다운 반응이다. 한겨레는 정보누설자에 대한 보도를 하였는데 과연 이것이 현명한 일이었는지 의문이다. 내부고발자에 대한 조직의 복수가 단행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상규 의원은 녹취록이 사실이라면 문제가 있다는 발언까지는 하는 일정 수준의 '상식'을 보여주었다.

반면 문제의 당사자인 이석기 의원의 해명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보다도 한심한 수준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체포동의안 처리를 거둬달라는 취지의 서한에서 "그 어느 때보다 전쟁위기가 고조되던 올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나서자는 저의 진심이, '총'이라는 단어 하나로 전체 취지와 맥락은 간데없고 '내란음모'로 낙인찍혀 버렸다"며 "앞뒤 말을 가위질하여 선정적인 단어만 골라 여론몰이하는 것이야말로 왜곡, 날조 아니냐"고 주장했다.

이는 ‘총’이란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기존의 해명조차 뒤집은 것으로, 통합진보당 측이 사태에 이성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부인하는 데 급급하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또 이석기 의원이 녹취록에 대한 언론보도만을 문제 삼는 것을 보면 그가 이미 녹취록 전문 자체는 부인할 길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일이다.

통합진보당은 국고보조금을 받는 원내 정당이다. 이석기 의원은 행정부에게 일반인들은 알기 어려운 여러 가지 고급 정보를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RO’라는 조직이 내란음모를 꾸미기에 충분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법리적 판단은 차치하더라도, 그런 이가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남한 공권력에 타격을 주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면 적어도 의회에선 퇴출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만일 녹취록의 핵심적인 발언들이 사실이라면, 이석기 의원만 제명되어야 하는지 통합진보당 의원 전체가 제명되어야 하는지 정도만 논점으로 남을 뿐이다.

이석기 의원이 녹취록에서 드러낸 세계관은 북한을 미제국주의에 맞서는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전위요 해방구로 여기는 관점으로 ‘사상의 자유’를 중히 여기는 사상이 아니다. 그가 만들어내고 싶은 통일조국엔 아마도 '미제국주의자'들의 세계관에 동의할 ‘사상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석기 의원이 증오해 마지않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그 체제를 부인하는 이들의 사상의 자유도 존중한다.

그러나 그 존중이 이루어지려면 당사자의 그 사상에 대한 인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 측은 자신들의 생각을 뚜렷하게 밝히지 않았고 ‘비선 모임’에서 밝힌 세계관에 대해선 승인도 부인도 하지 못하고 있다. 수사와 언론보도를 탄압으로 규정할 뿐이요 이정희 대표가 그러하듯 단식으로 대응할 뿐이다. 이는 그들이 평소 주장하는 대로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 역시 그 사상이 대중에게 얼마나 우습게 여겨질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솔직하지 못하고 정체를 숨기고 있다면 그 이유는 대중적이지 않은 사상으로 대중운동을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대놓고 유권자들을 기만하는 행위를 정치적 전술로 채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통합진보당이란 조직을 활용한 그들의 대중운동은 이미 종지부를 찍었다고 봐야 한다. NL운동권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인식도 이미 파탄 수준이다. 남은 문제는 그들의 몰락이 그들만의 몰락이 아니라 진보운동 전체의 몰락과 야권의 쇠퇴로 이어지는 일을 어떻게 막느냐는 것일 뿐이다.

녹취록의 핵심적인 발언들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의원으로선 이제는 모든 사태가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사상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자들의 최소한의 존중을 요구하는 길 밖에는 정치적 존엄을 지킬 길이 없다. 이석기 의원이 과거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애국가도 아니라고 하던 애국가를 불렀다는 사실이 뉴스가 되는 상황은 얼마나 희극적인 것인가.

녹취록의 핵심적인 발언들이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이는 타조가 포식자를 맞닥트렸을 때 머리를 처박고 은신했다고 착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다. 녹취록에 드러난 이석기 의원의 강의는 물론 시대착오적이며 괴상한 내용을 가진 하나의 혁명노선이다. 하지만 그 사상이 본인의 것임을 인정만 한다면 사람들도 무턱대고 그를 조소하기보다 차분하게 그들 일당이 체제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그리고 그들에 대해 어떤 수준의 제재가 합리적인지를 판단하려 할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대중정당에서 유권자를 기만하는 혁명노선을 견지해왔다면, 그 사실이 드러난 마당에선 더 이상 무슨 기만이 가능하다 여길 이유가 없다. 기만은 유권자에게 사과해야 마땅할 문제이겠으나 이와 같은 극단적 기만행위에 대해선 별로 사과받으려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이석기 의원 등이 정말로 그간 'RO' 회합에 나온 녹취록처럼 사유했다면, 이제 제 신념을 밝히고 조용히 정계에서 퇴진하는 것이 그들이 싫어하는 조국뿐 아니라 사랑하는 조국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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