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많은 부분이 ‘퇴보’하거나 ‘과거로 회귀’했다는 말이 나왔다. 그 어느 때보다 언론사 파업이 잦았고 수많은 해직언론인이 양산된 것은 언론 역시 퇴보의 길을 걸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권이 바뀐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낙하산 사장이 내려온 뒤로 권력 비판 기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한 방송은 불공정 보도로 여전히 안팎의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정권에서 ‘4대강’을 말하지 못했다면, 지금은 ‘국정원’을 말하지 못하는 정도를 차이점으로 볼 수 있다.

공영방송이 ‘비판적’ 언론인을 더 이상 품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서, 많은 언론인들이 공영방송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걸어 나왔다. 김용진, 최경영, 김경래 기자가 KBS를 나오고, 최승호 PD가 MBC를 떠나 <뉴스타파>에 합류한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 10년 넘게 몸담은 공영방송을 떠나온 또 다른 사람이 있다. EBS에서 <지식채널 e>, <다큐프라임> 등을 제작했고, 현재 한예종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는 김진혁 PD가 그 주인공이다.

<미디어스>는 지난달 31일 오후, 제작자에서 교수로 새 출발을 시작한 김진혁 PD를 만나 근황과 현재 언론 상황에 대한 진단을 들어 보았다.

교수보다는 ‘선배 연출자’로 작품 제작 도우려

▲ 김진혁 전 EBS PD. 김진혁 PD는 현재 한예종 영상원 방송영상과에서 TV 다큐·교양 연출을 가르치고 있다. ⓒ미디어스
-지난 6월, EBS에서 퇴사한 뒤 강단에 서기까지 공백이 좀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학교가 오랫동안 방학이어서 특별히 뭘 했다기보다는 개인적인 여유시간을 가졌다. 개강을 앞두고 수업 준비도 했고 여행도 갔다. 최근에는 강정평화책마을 10만대권 프로젝트 영상을 제작했다. 그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노종면 기자, 고재열 기자와의 친분으로 하게 됐다.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방송영상과에서 TV 교양·다큐 연출을 가르치게 됐다.

방송영상과 안에 수업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에게 주어진 게 9시간이다. 3시간씩 3과목인데 셋 다 워크숍이다. 난이도나 결은 다르지만 실질적으로 영상을 만들어보는 ‘실습’ 과목이다. 아이템을 정하고, 그 아이템을 최종 영상 결과물로 나오는 과정을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됐다. 정해진 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틀로 할지부터 전체를 다 정해야 해서, 한 학기에 영상 1~2개를 만들게 될 것 같다.

- 과거 인터뷰에서 EBS 선배들에게 저널리스트적인 면, 다큐멘터리적인 면을 많이 배워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떤 태도나 자세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해 둔 것이 있나.

현직 PD로 있던 사람이 바로 교수로 가다 보니, 학교 측에서도 아주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 주기보다는 그 원론이 실질적으로 작동해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도움이 돼 주길 바랐던 것 같다. 제작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뭐고, 어떤 방법으로 그걸 극복할지를 알려주는 것, 그 부분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또, 직접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과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고 본다. 학생들은 (제작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고 저는 경험해 본 교수라고 보지 않고, 연출자 선후배 관계로 생각하려고 한다.

내부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참담함’

- 11년 간 머물렀던 EBS를 떠났다. 여러 가지 원인들이 얽혀 있겠지만, 아무래도 <다큐프라임>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반민특위 편)가 제작 중단된 것이 큰 것 같다.

예전(2008년)에도 <지식채널 e>를 만들다 인사발령이 났었다. 그래도 그때는 정기인사 발령이었는데 이번에는 만들다 갑자기 중단돼 방송도 못 나갔으니 개인적으로는 이번이 훨씬 더 안 좋다고 볼 수 있다. (* 2008년 5월, <지식채널 e>에서 광우병을 소재로 한 ‘17년 후’를 연출했던 김진혁 PD는 석 달 만에 어린이·청소년팀으로 인사발령이 난 적이 있다.) 5년 전에는 적어도 연출하던 걸 중간에 끊고 간 게 아니었다. 당시 광우병은 가장 핫한 이슈였기 때문에 이것을 교육방송에서 민감한 시기에 방송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가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반민특위 편’은 독립유공자 이야기로 교과서에도 나온 것이고 시기적으로 민감한 것도 아니어서 (사측의 제작중단 지시가) 대단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사측은 공방위 요구도 받지 않았다. 광우병 논란 때에는 공정방송위원회가 열렸고, 내용을 전부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정해진 절차에 따라 결론이 났는데 말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몰아간 분들에 대해 대단히 유감이다. 제작 중단 이후 제대로 해결된 게 없으니 참담했고 자괴감도 컸다. 자괴감이 들더라도 의욕이 있었다면 EBS에 남아 있을 텐데, 뭔가 할 수 있는 게 보이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회사에 남기만 하는 건 월급 받아먹는 것밖에 안 되고, 그럼 스스로가 점점 망가질 것 같았다. 어떻게든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방법은 나오는 것밖에 없었다. 분명한 건 내부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 김진혁 PD가 제작 중이던 EBS '다큐프라임'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반민특위) 편은 사측의 지시로 돌연 제작 중단됐다. 70% 이상 만들어졌던 반민특위 편은 극장 개봉 계획까지 있었으나 결국 빛을 보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 김진혁 PD는 2008년 5월에도 '지식채널 e'에서 광우병을 소재로 한 '17년 후'를 제작했다가, 석 달 만에 비제작부서로 발령받는 보복성 인사를 당한 바 있다. (EBS 지식채널 e '17년 후' 화면 캡처)

- KBS, MBC에 비해 제작자율성이 비교적 잘 보장된다고 여겨졌던 EBS에서도 심기 불편한 아이템 불방 논란과 제작 중단 사태가 일어났다.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방송사 사장을 임명하는 시스템 자체가 정치적 영향을 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오래 전부터 바꿔야 한다는 말은 많이 나왔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집권여당이 어느 쪽이 되느냐에 따라서 (방송사가) 영향을 받는 건 사실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 절차를 지키고 타협을 할지의 여부인데 민주 정부 때는 정해진 절차를 통해 해소가 됐다면 이제는 절차 자체가 무력화돼 버렸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을 위한 합의체가 작동을 못한다는 거다. 풀 수 있는 방법은 법밖에 없는데, 지난한 과정을 수반한다. 그마저도 몇 년이 걸릴 지도 모르고, 의미가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건 내부 문제는 일정한 프로세스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맞는데, 그 통로가 다 닫혔다.

제작자율성이 침해되는 사례가 많다 보니, 제작자들이 알아서 자기 검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해결책이 없으니까 처음부터 문제를 최대한 안 일으키는 쪽으로 만드는 거다. 자연스럽게 다른 목소리, 다른 생각이 사라지고 비판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사실상 공영방송이 아니라 관영방송이 되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영방송 EBS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EBS는 교양이나 다큐 면에서는 여타 방송사들에 비해 평가가 좋은 편이다. 젊은 층들 반응도 그렇고. 그런데 제작비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 편성 쪽에도 있어봤지만 제작비 300억대 가지고는 뭘 하기가 힘들다. 예산이 적으니 무리한 방법을 쓰게 돼 노동 강도가 세지고, 재방 비율이 높아진다. 어느 수준까지는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지만, 이미 2~3년 전에 한계에 도달한 상태다. 그럼에도 좋은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던 건 ‘공적재원 충당’을 위한 명분 때문이었다. 먼저 좋은 콘텐츠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시민들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무보도’

-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방송의 공공성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권력에 눈치 보는 언론 현실은 여전하다.

사실상 현재 공영방송은 권력관계에 의해 이사진, 사장이 결정된다. 방통위원장도 마찬가지고.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쥔 쪽이 자기들이 가진 이로움을 포기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으니 나자빠져 있어야 하느냐, 그건 아닌 것 같다. 흔히 얘기하는 ‘기계적 균형’ 정도는 충분히 요구할 수 있고,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내부 직원들은 지난 정권부터 징계 남발, 인사 불이익 등으로 무력화됐고, 야권에게도 여론에게도 호소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뉴스타파>, <국민TV> 등 대안언론들이 공영방송 역할을 대신하면서 압박하는 게 최선인 것 같다. 시민들이 후원을 하거나 지속적인 지지를 보냄으로써, 대안언론이 (공영방송에 대한) 거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계속 압박하는 거다. 방송사들이 계속 어떤 아젠다를 누락시킨다고 해도, 대안언론들이 계속 특종을 한다면 자기들 생존을 위해서라도 방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못하다 보니 대안언론이 더 이상 대안언론이 아니게 됐다. ‘도대체 너희들을 뭐하느냐’는 공영방송 무용론이 계속 등장한다. 요즘은 중요한 아젠다를 종편보다 더 누락시키고 있다. 그런 공영방송은 쓸 데가 없다.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

▲ 공영방송 출신 언론인들이 주축이 돼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독립언론 '뉴스타파'는 지난달 15일 'CCTV는 말한다' 편을 보도했다. 이는 경찰청 증거분석실이 국회 국정원 국정조사 특위에 제출한 127시간 분량의 CCTV 영상을 분석한 것으로,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삭제가 일어난 점, 윗선의 뜻에 따라 경찰의 분석결과를 축소 및 은폐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된 의미 있는 보도였다. 뉴스타파는 조세피난처 보도, 국정원 관련 심층 보도로 '대안언론' 이라기보다 '공영방송'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뉴스타파 8월 15일자 캡처)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영방송은 ‘균형 있는 보도’를 했다고 항변한다. 특히 가장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KBS의 경우 ‘편파방송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다양한 입장을 반영해 균형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는 데에는 1차적으로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일 것이다. 추측해 보자면, 내부에서 현재 어떤 권력이 집권하고 있는가를 고려해 권력의 스탠스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이 공영방송의 현실적 숙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히, 독재정권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간부들은 ‘그래도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니냐. 정권 홍보 정도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떤 이념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관영방송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

앞서 말했듯,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보도’다. 어떤 이슈든 그것이 이슈라고 인정되면 일단 누락시키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은 어느 쪽의 유불리를 따지냐를 떠나서 아예 채택을 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시민들이 공영방송에 가장 분노하는 건 이슈 왜곡이 아닌 누락이다.

- 중요 현안이 누락되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방송 뉴스만 보고선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푸념도 나온다.

방송의 영향력도 많이 줄었다. MBC 뉴스 신뢰도는 0%대로 처참한 수준에 이르렀지 않나. 스스로 망가뜨린 것이다. 그럼 줄어든 영향력은 어디로 갔을까. 종편으로 많이 갔다고들 생각하는데, 꼭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종편을 보는 사람이나, 현 정권에 대단히 편향적인 지상파를 보는 사람이나 풀이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같은 머릿수 안에 있다고 본다.

지상파와 종편에서 이탈해 온 사람들은 다른 쪽에서의 정보활동이 늘어난다. 지상파는 사람들이 SNS, 대안언론 등에 자양분을 주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꼼수다>, <뉴스타파> 등이 화제가 되면서 라디오, 인터넷이라는 포맷에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도 정시방송을 챙겨보는 게 어색해지는 때가 왔다. 문화가 바뀌는 게 가장 무섭다. 방송 뉴스의 위상이 무척 견고할 것 같지만 한 번 균열이 생기면 무너지는 건 굉장히 쉽다. 지금의 KBS, MBC가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이라고 착각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언론 상황 더 나빠지지 않게 하는 노력도 중요… ‘냉소’ 주의해야

- 오늘(31일)도 <추적60분>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이 불방 위기를 맞았다는 소식이 나왔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지친다는 불평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언론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든지 공정방송이라든지 관련 논의를 꾸준히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 끊임없이 떠들고 비판해야 한다. 현재 상태보다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만 노력이 아니라, 더 나빠지지 않게 하는 노력도 노력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노력을 해야만 좀 더 좋아질 기회도 오지 않을까. (지금 상황은 나쁘지만) 사람들이 공정언론, 사장선임제 문제, 수신료 등 중요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좋은 신호다.

- 언론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지금 상황에 언론인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냉소’ 같다. 불합리한 사내 의사결정 과정, 아무리 애써도 관철되지 않는 최소한의 상식, 합리성 붕괴 등 여러 문제로부터 냉소는 시작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저런 아이템을 해 보자고 의견을 제안하는 것까지 완벽히 막힌 상황은 아니다. 수준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아예 없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지금은 시도해봤자 안 되는, 명분으로만 존재하는 ‘공정방송’ 문구 하나를 얻기 위해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희생했다. 상황이 어렵다고 피곤하다고 그만두면 안 된다. 어차피 냉소한다고 해서 아예 신경을 안 쓸 수도 없다. 떠난 사람이라고 마음이 편할까. 아니다. 어디에 있든 이 상황 자체가 불편하다. 다만 본인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당장 정권이 바뀌고 말고에 상관없이, 최대한 긴 호흡으로 가자는 거다.

간절함이 좌절되는 상황에서 누구나 멘붕이 올 수는 있다. 사람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계속 멘붕에 빠질 이유는 없다. 조금씩 내적 동력을 이끌어 와야 한다. 지난 5년의 경험 때문에 더 지친다는 반응도 있지만, 그때의 경험이 한편으로는 ‘아 이런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구나. 꾸준히 바꿔나가야 하는구나’라는 교훈을 줬다고도 생각한다. 더 긴 호흡을 가질 수 있는 밑바닥 힘을 줬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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