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TED를 추천받고 검색해보았다. 세계의 석학들이 자신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을 대중과 더욱 쉽게 공유하기 위해서 길고 짧은 강연을 제공하고, 그것을 모아둔 사이트이다. 우연히 그 때 내 모니터 첫 화면에 뜬 영상 중에 댄 애리얼리가 있었다. ‘버그 투성이인 우리의 도덕관념 Our Buggy Moral Code’이라는 제목이 내 눈을 확 끌었고, 그렇게 본 첫 TED 영상은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나는 바로 즉시 그의 팬이 되어, 그 18분 짜리 영상을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보여주고, 시간이 없으면 요약본을 적어서 건네주거나 말로 설명해주곤 했다.

도덕에 대한 기존의 접근법은 대개 가치판단 아니면 비난이었다. 무엇이 도덕적인가, 무엇이 비도덕적인가, 너는 도덕적인가, 우리는 도덕적인가, 세상은 왜 이렇게 비도덕적인가. 절대적인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우리는 모두 도덕적인 삶을 지향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비난받아 마땅했고, 도덕적인 삶을 이상적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죄책감을 가지거나 정당화해야 했다. 도덕을 사회 질서를 위한 수단쯤으로 제한한다 하더라도, 도덕이 갖는 우월한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도덕에 대한 논의는 그렇게 찝찝했다.
댄 애리얼리는 다른 접근법을 보여준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도덕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실험 변인에 상관없이 늘 정직한 소수와 기회만 되면 부정을 최대치로 행하는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어떤 조건 하에서 정직하게 행동하고 어떤 조건 하에서 부정직하게 행동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그의 연구주제이다. 평범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조건을 알아낸다면, 우리는 타인의 비도덕을 비난하거나 도덕적으로 살라고 훈계하는 대신 그 조건을 활용하고 알려줌으로써 자연스럽게 도덕적 선택을 유도할 수 있다.
댄 애리얼리가 이 주제를 선택한 계기는 거대한 금융사기사건이다. 댄은 나쁜 소수가 큰 부정행위를 한 것이 원인일까, 아니면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조금씩 부정행위를 한 것이 모여서 그런 결과를 낳았을까를 궁금해 했고, 그 의문이 바로 이 연구로 이어졌다. 전자라면 나쁜 몇 명이 큰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체제를 고민해야겠지만, 후자라면 어떻게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작은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는 우선 사람들의 직관부터 점검한다. 부정행위를 해도 안 들키는 것이 확실한 상황을 만들어 주고, 그 부정행위로 금전적 이득을 얻게 해 주면, 사람들은 부정행위를 할 것이다. 부정행위를 하기 쉽고, 했을 때의 이득이 크고, 들킬 가능성이 낮을수록, 부정행위의 규모는 커질 것이다. 하지만 실험해본 결과는 직관과 달랐다. 사람들은 금전적 이득을 훨씬 더 많이 얻을 수 있었고 절대 들키지 않는 상황임에도 아주 조금의 부정행위만을 했다. 그리고 부정행위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비용상 같더라도, 그 대상이 돈일 때와 돈으로 교환 가능한 토큰일 때, 그리고 같은 가격의 연필/콜라일 때 사람들의 도덕관념은 다르게 작동했다. 돈보다 토큰일 때 조금 더 부정행위를 하고, 그보다 연필이나 콜라일 때 훨씬 쉽게 부정행위를 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낳는 것일까?
댄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 즉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자아상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싶어 한다. 즉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은 큰 부정행위를 하면 그런 자신을 좋게 생각하기 어렵고, 작은 부정행위는 별 것 아니라 여김으로써 (=인지적 유연성을 발휘해) 자아상을 별로 훼손당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부정행위를 하고도 자아상을 유지할 수 있는가, 사람이 죄책감을 의식하지 않고 부정행위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를 댄은 ‘퍼지 요인’ 이라 부른다. 부정행위를 크게 하고도 자신이 그리 나쁜 행동을 했다고 느끼지 않는 경우를 ‘퍼지 요인이 높다’ 고 하며, 약간의 부정행위에도 죄책감을 가지는 경우를 ‘퍼지 요인이 낮다’ 고 한다. 사람들이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려면 어떤 조건이 퍼지 요인으로 작용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이 퍼지 요인을 낮추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무엇이 퍼지 요인일까? 댄이 밝혀낸 여러 가지 요인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창의성’ 이었다. 창의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미묘한 상황에서 부정행위로 더 넘어가기 쉽다.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창의성이 단일 요인도 아니고, 퍼지 요인을 낮추는 조건도 많다.) 실험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창의성과 관련된 형용사들을 놓고 피실험자들이 그 단어가 스스로를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를 표시하고, 77가지 취미 활동 중 참가하는 활동과 그 빈도가 어떤지 답하며, 창의성과 관련된 명제들과 관련해 스스로가 몇 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쓰도록 하여 피실험자의 창의성 정도를 구분한다. 그리고 부정행위를 유도하는 본 실험에 들어간다. 정사각형에 하나의 대각선이 점선으로 그려져 있고, 실험이 시작하면 20개의 점이 정사각형 안에 나타났다가 1초만에 사라진다. 점의 위치가 매번 변하는데, 피실험자는 대각선으로 나뉜 두 영역 중 어디에 점이 더 많았는지를 답해야 한다. 그리고 부정행위를 유도하는 포인트는 이거다. 왼쪽이 많은 경우엔 0.5센트를 지급하고, 오른쪽이 많은 경우엔 5센트를 지급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답했는지 검토하지 않는다는 것을 피실험자가 은연중에, 그러나 명백하게 알 수 있도록 진행한다. (실제로는 검토하여 거짓말 빈도를 측정하지만.)
우리가 확인한 사실은 이랬다. 도트 과제에서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하는) 오른쪽 버튼을 더 많이 선택한 사람들이 세 가지 유형의 창의성 자가 측정치를 높게 매긴 사람들과 일치하는 경향을 보였다. 게다가 좀 더 창의적인 사람과 덜 창의적인 사람 사이의 차이는 두 삼각형에 있는 점의 개수 차이가 분명하지 않을 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는 창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주로 상황이 모호해 자기합리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두 삼각형에 있는 점의 개수가 확연하게 다를 때는 거짓말을 할 것인지 혹은 하지 않을 것인지만 결정하면 됐다. 그러나 어느 삼각형에 점이 더 많은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 즉 모호할 때는 창의성이 개입했다. 그것도 더 많은 부정직함을 동반해 영향을 미쳤다. 좀 더 창의적으로 보이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보수가 지급되는) 오른쪽 삼각형에 점이 더 많다고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p220)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능력’ 이 뛰어났다는 건, 창의성 높은 피실험자가 작정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 부정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는 자신이 제대로 판단했다고 믿지만 그 ‘제대로 된 판단’ 이라는 것이 바로 창의성에 의해 설득당한 결과물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댄의 모든 실험에서, 작정하고 이득을 얻자고 부정행위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아주 사소한 수준의 부정행위만을 하고, 단순한 조건에 의해 퍼지 요인이 크게 낮아져서 아무도 부정행위를 하지 않기도 하는 등, 의식적으로 부정행위를 결정해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책 전체에 등장하는 수많은 실험에서 항상 저렇게 돈을 걸고 부정행위를 유도했는데, 작정하고 최대한 뜯어내는 소수에게 빼앗긴 돈은 몇백달러였으나, 별 생각없이 소소하게 부정행위를 해 고작 몇 달러씩만 더 챙겨갔을 뿐인 다수의 사람들에게 빼앗긴 돈은 수천달러에 이르렀다. 단순하게 해석하자면, 작정하고 이득을 탐하는 소수를 규제해봐야 몇백달러의 손실을 막는 데 그치는 반면,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유지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소소한 부정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어야 수천달러의 손실을 예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모든 관계자들을 감시하거나 인력을 투입해 철저하게 결과물들을 검토하지 않아도, 의외로 퍼지 요인을 낮추는 조건들은 매우 간단하다. 가장 간단한 건 TED 영상에서도 소개되었듯이, 도덕규범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다. 십계명이나, 명예서약에 대해 떠올리기만 해도 부정행위는 싹 사라졌다. 그리고 서명을 먼저 하고 이후에 부정행위의 기회를 접하면, 기회가 먼저 있고 그 후에 서명을 하는 것보다 현저히 부정행위가 줄어들었다. (국세청 측에 연락해 이 아이디어를 실제 서류업무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댄과 국세청 직원의 시큰둥한 반응이 이어지는 대화가 꽤 재미있다.) 누군가와 팀을 이루어 부정행위의 이득을 공동으로 가질 때, 그 팀원과 친밀할 때, 나의 부정행위로 그 팀원만이 이익을 챙길 때, 여러 가지 조건들이 퍼지 요인을 좌우한다. 심지어 다양한 나라의 국민에게 적용해보아도, 부정행위의 비율은 모두 동일했다. 부정행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각 사람들의 도덕관념이 어떠하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 의해서 크게 달라졌다. 이러한 도덕관념의 계량화(부정행위의 계량화)는 사람들의 부정직함을 덜 유발하고 정직함을 유도해낼 수 있는 객관적 구조의 토대가 된다.
읽고 자기 자신의 도덕관념을 쉽게 손볼 수도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퍼지 요인들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사람들이 자신의 부정행위를 별 문제없이 받아들이고, 또 그 경험과 관련해 어떤 식으로 생각이 바뀌는지를 보고 있으면, 거대한 나쁜 행위보다 사소한 퍼지 요인이 오히려 악마의 유혹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어차피 거대한 나쁜 행위는 대부분 안 하게 돼 있다. 사소한 어떤 행위가 나를 점점 비도덕적으로 만드는지, 그리고 또 어떤 간단한 장치가 그걸 막아주는지를 알아야 한다.

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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