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0일. 독서를 포기했다. 대낮의 온도가 33도에 육박하고, 서재는 그보다 5도쯤 더 높았으며, 책을 펼쳐드는 순간 이마에서 땀이 굴러 떨어지는 환경에서 책읽기는 불가능했다. 당시 내 손에는 막 출간된 바우만의 책이 들려 있었고, 난해한(최소한 난삽한) 그의 서술은 책장을 넘기는 것을 고역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땀이 책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눈에 흘러들어가는 지경에 이르자 그렇잖아도 빈약한 인내심이 바닥나고야 말았다. 그날 이후 서재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서점은 피해야 할 장소가 되었다. 책과 멀어지는 것으로 반강제적인 피서를 보냈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퇴근길의 읽을거리로 고른 책은 <우리시대를 살아가며>(에릭 호퍼, 정지호 역, 동녘, 2012)였다. 이 책을 고른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짧은 에세이 모음집이고, 문장이 난해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얇았다. 퇴근길에 부담 없이 읽기에는 맞춤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틀리지는 않았지만 맞지도 않았다. 퇴근시간에 지하철에서 그의 대중운동론을 읽고 난 후 머리가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호퍼의 대중운동론은 <미성년자가 판치는 시대>에 개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 글을 간략히 읽어보자. 호퍼는 대중운동을 청소년기의 특징을 지닌 대중이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벌이는 미성숙한 행위로 규정한다.
“역사는 어린아이처럼 항상 들떠 있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쉽게 속아 넘어가고, 진짜처럼 상상하고, 무례하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이 만들어간다. 마음이 온통 장난감에 가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추종자를 어린아이로 바꿔놓기 위해 열을 올린다.” (p17)
호퍼에 따르면 청소년기의 특징은 '급격한 변화의 단계'다. 이러한 변화는 변화를 경험하는 개인에게 '과거의 경험과 성취가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진통의 상황에 처하게 하는데, 이는 '격정'을 초래하며 '혁명의 유혹'에 넘어가게 한다. 왜냐하면 변화는 개인의 거듭남을 요구하고 개인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일시에 소거하고 변화를 통해 도약을 성취할 과도한 열망에 빠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변화가 사회 전체에서 일어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변화는 구성원 전체를 청소년기를 맞은 ’미성년자‘로 전락시킨다. 그 결과 대중들은 과도한 열망에 빠져 자신을 전사나 대중 혁명가 또는 종교 혁명가로서 자리매김하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두드리며 전진‘하거나 ’메시아가 기쁜 소식을 가져 왔다며 떠들썩하게 약속의 땅으로‘ 전진해 가는 대중운동으로 이행한다. 요컨대 대중운동을 변화 스트레스에 직면하여 이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집단적 행위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대중운동’에 매몰되도록 이끄는 현대사회의 급격한 변화란 무엇일까. 호퍼는 이것을 산업혁명과 그것에 의해 파생된 전사회적 변화로 본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정체성을 요구하고 구성원들을 대중운동으로 내몰며 사회의 원시화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개인이 대중운동의 조직 속으로 흡수됨에 따라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원시화의 상태에서 사람들은 ‘획일적이고 고분고분하게 변하는 경향’이 있어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인물이 나타나면 파시즘 또는 전체주의의 맹신자로 돌변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러므로 호퍼는 사회적 ‘미성년자’에 의한 대중운동 또는 소요 사태는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들은 게으름이라는 저주를 뒤집어쓴 채로 쓸모 있고 가치 있다는 존재감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극단주의를 받아들여 정치적, 인종적으로 아량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서 문제는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지만 그 부산물은 여전히 남아 있어, 미성년자가 판치는 시대는 그 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p33)
주목한 부분은 호퍼가 언급한 사례이다. 그는 서두에서 학생들이 주동한 소요사태가 세계 여러 군데에서 일어났다는 기사를 몇 년 전에 읽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스탄불에서 테헤란, 뭄바이, 사이공, 도쿄, 멕시코시티’와 더불어 ‘서울’이 거론되고 있다.(p17) 이 책이 출간된 해가 1966년이고 에세이들은 그보다 몇 년 전에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주동한 소요사태’로 소개된 ‘서울’의 사례는 4.19 혁명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호퍼가 읽은 신문기사가 사태를 왜곡시켜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4.19를 변화 스트레스에 직면하여 이성을 잃은 대중운동으로 정의하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4.19는 대중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쟁취하려 한 반대의 사례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대중운동은 호퍼가 묘사한대로 집단적 흐름에 몸을 맡겨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상실하는 문제일 수 있으나, 각각의 디테일들은 전혀 다른 문제와 방향일 수 있다. 나는 추상성은 거부되어야 하며 각각의 사태들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각각의 현상들은 보편성을 담보한 추상화를 통해 논의될 수 있으며, 이는 불가결한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추상화는 당대의 사태를 규정할 수 있는 구체성을 반드시 담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엄밀함과 반증될 수 있는 한계가 요구된다. 그렇지 않다면 구체성을 상실한 추상화는 형태적 유사성만으로 어디든지 적용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된다.
범박하게 말해 대중운동에 대한 호퍼의 논의는 개인과 집단의 대조, 자유와 주체성의 문제 그리고 심리학의 몇 가지 기제를 버무린 파시즘에 대한 명료하고도 단순한 비판으로 보인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호퍼의 논의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일 뿐 모든 대중운동에 대한 비판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글에서 드러나듯 모든 대중운동에 손쉽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인지 호퍼의 대중론은 이율배반적 긴장을 보인다. <자동화, 여가, 대중>에서 호퍼는 ‘기술이 있고 능력 있는’ 대중이 실직자로 전락하여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 ‘극단주의와 편협함의 온상이 되고 기존 사상과 다른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맹신자들로 변화될 것이라고 보며, 이럴 경우 히틀러와 같은 지도자에게 ‘기꺼이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전망한다.(p38~39) 여기서의 대중은 부조리하고 악의적인 대중운동으로 뛰어들 어 무질서를 낳는 미성숙한 ‘무리들’이다. 반면, 동일한 지점에서 대중은 적절한 계기가 주어진다면 ‘창의적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주체로 정의된다.
물론 창의적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해서는 ‘재능이 출중해야 하고 전문가 수준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대중이 맹신자로 변질되는 일을 막기 위해 호퍼는 ‘해고자(실직자)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주’를 만들어 ‘대학에 운영을 위임’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 주는 작은 학군으로 세분화되어 교육을 실시하고 각자 다른 관심과 기술, 취향에 맞춰 서로 의견을 나누고 창의적인 활동을 시행함으로써 ‘천연자원의 발굴과 인적 자원의 양성’을 실현한다. 그럼으로써 ‘지독한 가난과 정치적 타성, 문화적 단조로움’을 극복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p51~53) 흥미로운 것은 후자에서 주장되는 ‘교육’이 특정 ‘지도’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직접적인 지도 없이도 대중들은 기꺼이 서로를 교육하고 창의적 활동을 시행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관용하면서 문화와 자유 그리고 질서를 이룩할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의 대중은 창의적 에너지를 분출하여 문화를 창조하고 자유와 질서를 자율적으로 이룩하는 성숙한 ‘주체들’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이 나타나는 이유는 계기에 따라 열망을 분출하는 일차원적인 기계로 대중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열망을 실현할 장으로서 기존체제를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주어지면 대중은 부조리와 혼란을 양산하는 맹신자로 돌변한다. 반면 교육과 문화가 주어지면 대중은 자유와 질서를 수립하는 주체들로 거듭난다. 인간은 단지 욕망을 따르는 생물학적 존재이며 교육을 통해 성숙한 개인으로 거듭난다는 관점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호퍼가 제시하는 자유와 질서는 대중운동을 금지하는 제약으로서의 자유와 질서이며, 대중을 일차원적 기계로 파악, 끊임없이 계몽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유를 억압하는 계도와 통제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기 계발 강사와 자기 계발서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교육’하고, 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하고 거래되어야 할 ‘자유’가 흘러넘치며, 모든 위험을 개인이 부담함으로써 유지되는 '질서‘의 유토피아 또는 호퍼의 이상향인 우리 시대는 그가 제시한 것만큼 이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일 42명을 자살로 몰아넣는 폭력의 시대라는 인식이 더 적확하다. 호퍼의 에세이를 읽으며 나는 대중운동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를 발견하지, 구체성을 담보한 사회철학을 발견하지 못한다.
소박하게 본다면 호퍼가 꿈꾸었던 대중의 가능성은 다음과 같은 장면에 압축되어 나타나 있다. 세 번째 에세이에서 호퍼는 대공황시절에 본인이 경험했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한 건설 회사가 산 베르나디노 산맥에 도로를 내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의 부랑자 거리에 트럭 두 대를 보냈다. 트럭에 올라타기만 하면 누구나 일을 할 수 있었다. 트럭이 꽉 차자 운전사는 뒷문을 올리고 길을 떠났다. 우리가 내린 곳은 산 베르나디노 산맥의 산비탈, 그곳에는 갖가지 장비와 공구가 쌓여 있었다. 현장에 감독을 나온 회사 사람들은 단 한 명뿐이었고, 우리는 스스로 알아서 역할을 나누기 시작했다. 일하러 온 사람 중에는 목수, 전기 기사, 기계공, 요리사가 많았고 불도저와 착암기 기사, 심지어 공사판 십장도 있었다. 우리는 막사를 세우고 간이 취사장, 화장실, 샤워장을 만든 다음 저녁을 지어 먹고 다음날 아침 도로 공사를 시작했다. (...) 우리는 부랑자 거리의 포장도로에서 삽으로 퍼낸 한 무더기의 진흙에 불과했지만, 산 베르나니노 산맥의 한 언덕에서는 미국이라도 건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p80~81)
옳은 이야기다. 목적이 명확하고 협동이 요구되며, 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할 장이 마련되어 있을 때, 자신에 일에 집중하면서 인간은 가장 숭고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숭고하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공간을 ‘산 베르나디노 산맥의 도로 건설장’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더불어 도로를 건설하지 않는 중이라고 해서 모든 인간이 ‘포장도로에서 삽으로 퍼낸 한 무더기의 진흙’으로 전락하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는 운 좋게 현장감독이 단 1명이었지만, 다음엔 100명이 몰려올 수도 있다. 작업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화장실에 가는 횟수를 통제할 수도 있고, 급여에서 화장실 사용시간을 공제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실업자가 많으면 전체 급여는 낮아질 것이다. 노동에 비해 형편없는 대가가 주어질 수 있고 지나친 경쟁으로 스스로 임금을 깎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트럭은 2대 밖에 오지 않는데, 타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탑승장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지는 경우도 빈번해 질 것이다. 인턴이라는 명목으로 착취가 정당화되기도 하며 불평등의 격차는 갈수록 커져갈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미국이라도 건설할 수 있을 것 같’은 자부심을 강조하며 창의적인 행위를 권하는 호퍼의 제안은 얼마나 유용할까? 그럴 때 주어지는 자유란 숭고할 수 있는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질문은 그런 것이었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파시즘적 대중운동으로 달려갈 맹신자들 혹은 자부심으로 가득한 창의적 주체들로 지하철은 미어지고 있었다. 내 인상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잔업과 야근 그리고 보장되지 않는 미래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버거운 생활인들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과 함께 나 역시 피곤한 얼굴로 서서 지하철이 각자가 내릴 곳으로 달려가 주기를 기다렸다.

고덕영

2006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용돈이 궁한 탓에 한 번 사면 오래 읽을 수 있는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그런 책들을 오독하다 보니 '인문 딜레당트'로 '전락'하여 이런 저런 책을 뒤적뒤적하며 나락에 빠진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로 인문 쪽 책을 건너다닌다. 한 아이의 아빠이자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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