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한 여자>는 핑크영화다. 노출 수위도 적나라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노골적인 관음증적 관점으로 다가오거나 에로틱하게 느껴지기보다 처연하게 느껴지는 건 영화가 함의가 에로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세 남녀는 온전한 인물이 아니라 무언가가 모자란 인물들이다. 소설가는 알코올에 탐닉하거나 마약에 쩔어 지내고, 소설가와 동거하는 여자는 어린 시절 입을 덜기 위해 아버지가 딸을 유곽에 팔아치우는 바람에 오르가즘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에 빠진 인물이다. 전쟁에서 오른팔을 잃은 병사는 아내와의 정상적인 사랑을 통해서는 성욕을 느낄 수 없다. 그가 성욕을 느끼고자 한다면 쌀을 구매할 수 있다는 구실로 여자를 유인해 목을 졸라 성폭행을 일삼을 때뿐이다. 세 남녀 모두 하나같이 정상이라는 범주와는 거리가 있는, 결핍된 캐릭터들이다.

소설가에게 있어 몸을 팔던 여자는 일종의 안식처이자 구원임에 틀림없다. 소설가는 전쟁으로 폭탄에 맞아죽거나 불에 타 죽을 것을 항상 염두에 두었던 염세주의자이자 허무주의자이다. 그에게 보통 사람처럼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면 아마 그는 동거하는 여자와 행복한 인생 2막을 꿈꾸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소설가에겐 전쟁 이전의 삶만 있을 뿐 전쟁 ‘이후’의 삶은 없다. 여자와의 동침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되새기기만 할 뿐, 소설가에게 있어 전쟁 이후의 삶이라는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찰나적인 쾌락을 기약 없는 현재에 덧입힐 따름인 염세주의자다.

그가 세상을 더 이상 염세적으로 바라보지 않게 만든 안전핀 역할을 하던 여자가 미군에게 몸을 팔기 위한 양공주가 되어 소설가를 떠나자, 소설가가 마약에 빠져 스스로를 망친다는 건 그가 전쟁이 끝났음에도 내실 있는 삶을 기약하는 희망적인 인생과는 거리가 먼 염세주의자라는 걸 증명한다.

<전쟁과 한 여자>가 여타 핑크영화와 다른 점은 일본의 ‘역린’을 건드린다는 점이다. 즉, 2차 대전의 일왕이라는 일본의 아킬레스건을 노골화 한다는 점이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 당시 히로히토 일왕이라는 점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은 히로히토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거론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할 뿐만 아니라, 일왕이라는 일본 안의 신이 맥아더로 말미암아 인간이 되었다는 점을 불편해 한다.

<전쟁과 한 여자>는 이 부분을 건드린다. 일본 스스로가 천 년 이상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던 일왕이 인간이었다는 점을, 일본이 패망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복기하고 있었다. 하나 더, 전쟁에서 오른팔을 잃은 병사가 엽기적인 강간범이 되는 이유를 영화는 ‘국가의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국에서 여성을 유린하는 것은 일본 군부의 묵인 하에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지만, 일본 자국에서 벌어질 때에는 성폭행과 살인이라는 범죄로 연결된다는 이중적인 잣대 말이다. 약소국에게는 당연시되는 국가의 폭력이 자국 안으로 들어오면 범법 행위가 된다는 일본의 이중적인 태도를 <전쟁과 한 여자>는 핑크영화로 포장한 채 양심적인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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