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을 증명하는 분야가 어디 한두 분야이던가. 그 가운데서도 발레는 우리의 몸이 빚어내는 육체의 향연 가운데서도 극한의 단련과 절제를 통해서야 빚어질 수 있는, 육체의 수도사가 아니면 결단코 숙성되게 빚을 수 없는 분야임에 틀림없다. 가령 무대 위에서 화려한 디베르티스망을 관객에게 선사하기 위해 무용수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 땀을 연습실에서 흘려야만 하는가를 발레 종사자나 무용수가 아니라면 제대로 실감할 수 없을 것이다.

최정상급의 발레리나로 손꼽히는 강수진조차 하루 12시간 이상의 연습은 기본이요, 관에 누울 때에는 원 없이 쉴 수 있는데 무엇 하려고 연습을 소홀히 하는 게으름을 피우겠느냐며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주문을 불혹의 나이가 지나서도 꾸준히 해야 하는 육체의 수도승을 자처해야 하는 분야가 발레의 세계 아니던가.

이런 극단적인 육체 운동을 위해서는 먹는 것도 잘 먹어야만 할 터, <라 당스>에서 발레리나들이 먹는 음식의 분량은 소식이 아니라는 걸 눈치 빠른 관객은 알아챌 수 있다. 이슬만 먹고 살 것만 같은 발레리나에게 있어 식사란 토우 슈즈를 신고 땀 흘린 육체를 위한 소소한 보상이 아닐 수 없다.

<라 당스>는 최고의 발레를 무대 위에 올리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땀 흘리는가를 치열하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발레리나가 아라베스크를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청소부가 어떤 쓰레기를 치우며, 재단사는 발레리나의 복장을 위해 한 땀 한 땀 어떻게 재단하는지 이 모두를 보여준다.

<라 당스>를 통해 관객이 보는 장면 하나 하나는 <잊혀진 꿈의 동굴>처럼 돈을 주려고 보려 해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들이다. 마치 우리 같은 외부 사람들이 하렘을 타임머신을 타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것처럼, <라 당스>의 장면 하나 하나는 350년 동안 외부인에게 내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걸 허락하지 않았던 파리국립 오페라발레단의 일거수일투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 당스>의 관람료만 지불하면 그동안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파리국립 오페라발레단 단원의 일상을 스크린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흔히 무용은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장르로 보인다. 그건 아마도 발레를 보는 가운데서 표현되는 서사를 대사가 아닌 몸짓으로 읽어야 한다는 어려움 때문이리라. 발레리나는 자신이 육체로 표현하는 몸짓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대중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연출가의 의도에 따라 구현한다기보다는 연습실에서 흘린 땀의 분량으로 표현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설사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무용수의 몸은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전날에 연습을 등한시하거나 빼먹으면 당장 자기 몸이 반응하는 세계가 발레의 세계다. <라 당스>는 혹독한 자기 관리를 해야 하는 무용수의 세계를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다. 무용으로 수도하는 현대판 수도승의 세계를 치열하리만치 담담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라 당스>다. 할리우드 오락 영화에 친숙한 관객에게 디톡스 효과를 제공하는 영화이기도 하면서 말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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