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열의 스케치북> 200회를 시청하기에 앞서, SBS의 파일럿 프로그램 <슈퍼매치>를 보았다. 40년차 가수 양희은부터 겨우 2개월의 김예림까지, 세대를 막론한 선후배의 콜라보레이션 무대. 말로는 즐기겠다고 하지만 수차례 바뀌는 편곡의 리듬에, 화려한 물량을 쏟아 부은 무대 장치에, 한 사람만으로도 꽉 차는 무대를 무려 두 팀이 어우러져 혼신의 노력을 해댔으니, 때로는 그들이 무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느낄 정도로 충분히 존재감 있는 무대였다.

그걸 보면서, 조금 있다 보게 될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떠올리며, 과연 이제 그 프로그램이 케이블의 사생결단 서바이벌과 지상파의 다양한 경쟁 프로그램들 속에서 초라하지 않게 버틸 수 있을까란 회의가 불쑥 솟아올랐다.

<슈퍼매치>의 우승자를 뒤로 하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으로 채널을 돌렸다. 아, 그런데, ‘초라하지 않을까? 이제 더 이상 이 프로그램의 존재감이 없지 않을까?’는 나의 기우였다. 200회를 맞은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MC 유희열이 부른 마지막 노래 '여름날'처럼 여전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100회 특집을 감격해 하며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랬던 때가 얼마 되지 않은 거 같은 데 200회란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200회 특집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이 프로그램의 100회 특집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때도 그랬었다. 100회 특집의 이름은 'The Musician', 무대에서 화려하게 돋보이는 가수를 위해 무대 뒤에서 수십 년 묵묵히 연주를 해왔던 연주자들에게 헌정하는 특집이었다. 기타의 대가 함춘호와, 하림과, 50여 년 아코디언을 연주한 심성락 선생의 연주 장면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 특집을 위해 인순이, 루시드 폴 등 가수들은 무대의 중심이 아닌, 그들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며 흥겨이 그들의 백댄서가 되었다.

그날 무대의 감상을 묻는 시간, 함춘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도 <유희열의 스케치북>이었기에, 그 프로그램이 100회라는 시간을 건너왔기에 용기를 내어 마련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마련했던, 루시드 폴과 함께 기존 노래를 편곡하여 다시 부르던 포맷은 <나는 가수다>에서 각광받았고, 아이유, 효린 등 신인가수가 나와 선배의 노래를 다시 부르던 기획은 이제 <불후의 명곡>을 통해 전설을 노래하는 상시적 아이템이 되었다. 한때 반짝 인기를 끌다 사라진 MBC의 신인 발굴 프로그램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해오던 일상의 숙제이다. 이제는 스타가 된 아이유와 알리와 존박 등이 떨리는 모습으로 조심스레 무대에 서던 곳이 바로 <유희열의 스케치북>이었으니까.

금요일 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토요일 0시 반에 시작하여, 2시 정도가 되어야 끝나는 밤도깨비 같은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화려하게 조명받지 않아도 우리의 음악을 다양한 시도로 시청자들에게 풍성하게 전해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세간에 그들의 이름과 음악만으로 회자되는 언더그라운드의 밴드와 인디 뮤지션들이 처음으로 무대를 서는 기회를 얻는 곳이 바로 <유희열의 스케치북>이다. 12년 만에 첫 무대라며 눈물 적시며 떨던 '바스코'에게 기회를 준 곳이 바로 이 프로그램이다. 케이블에서조차 명멸해가는 음악 방송들 사이에서 늦은 시간이라도 감지덕지 꾸준히 자기자리를 지켜왔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간이 흘러 200회가 되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200회 특집은 'The Fan'이다.

이번 <슈퍼스타K>시즌 5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은 '한경일'이다. 2000년대 꽃미남의 가수로 반짝 등장했다 사라졌던 가수로, 이제 다시 <슈퍼스타 K>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 화제몰이 중이다. 한경일이란 기존의 가수가 다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도 나와야 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나라 가요계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가수들의 가수, 가수들이 팬이 되어 좋아하는 가수, 하지만 대중에게는 미처 그들의 진가를 알릴 기회가 없었던 가수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파일럿 프로그램 <슈퍼매치>에 출연자를 보면, 물론 이승환이나 이현도처럼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가수들도 있지만, 그 중 김태우, 윤도현, 바비킴 등은 타방송의 대결 프로그램에도 나왔던 가수들이다. 심지어 바비킴은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에 이어 <슈퍼매치>까지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이렇게 인기 가수들이 중복되어 몇몇 프로그램을 섭렵하는 것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서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200회 특집의 자리를 내주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다운 기획이고 그러기에 여전히 이 프로그램이 빛난다. 또한 아직도 이 프로그램이 존속해야 할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낸 시간이었다.

이효리의 '콜'에도 '시간 나면 한번 생각해 볼게요'라며 시크하게 자신의 음악과의 어울림을 고민했다던 김태춘, 마이클 조던에게 농구를 배우는 기분이라며 감격해 마지않지만 그런 그들이 여전히 하드 락을 고집해서 좋다는 윤도현과 로맨틱 펀치의 어울림, 장기하보다 더 맛깔나게 가사를 음악에 맞춰 요리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증명한 김대중, 지금까지 박정현과 함께 했던 임재범, 김범수 등에 견주어 결코 그 음색의 독특함이 뒤지지 않는 이이언, 그리고 까다로운 유희열이 듣고 깜짝 놀랐다고 극찬한 선우 정아. 마치 무림의 고수들이 등장해 각기 자신의 장기를 뽐내듯, 컨트리, 락, 발라드, R&B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이런 실력자들이 있었어라고 감탄하게 된 특집이었다.

마치 ‘당신들이 편식하는 음악 뒤에 이런 또 다른 세상이 있어요’, ‘우리는 이런 세상을 당신들에게 앞으로도 꾸준히 인도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200회 '음악으로 전한 소감문'이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거리를 활보하며 불태우는 금요일 밤,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고 앉아 불침번을 서게 만드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고단하지만 기대에 부푼 강요의 시간이다. Let's go 30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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