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뉴스에 ‘일베’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맥락에서 쓰이는 사진이 등장하고, 크레용팝이나 시크릿 효성이 ‘일베’에서 주로 사용하는 발언을 사용해서 논란이 된다. ‘일베’ 코드가 한국 사회의 문제로 떠올랐다.

SBS 뉴스의 상황은 단순 실수라는 해명과 ‘일베’를 하는 내부 직원의 의도적 행동일 거라는 추측의 사이에 있다. 전자라 하더라도 공중파 뉴스가 단순 검색으로 사진을 구해다 쓰는 상황은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하고, 후자라면 어느덧 ‘일베’의 문화가 사회 구석구석 파고 든 정황으로 보여 문제적이다.
▲ SBS 뉴스 방송화면 캡쳐화면. 단순실수로 보기엔 미심쩍다는 시선이 많다.
젊은 연예인들이 자꾸 ‘일베’와 관련해서 구설수에 오르는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당연히 ‘일베’를 하니 그걸 알 거라는 추측도 있고, 이미 연예인 팬덤이나 게임 커뮤니티에서 그런 표현들이 상투적으로 쓰이는 만큼 거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시선도 있다. 표현 하나 사용한 것에 대한 비판이 과하다는 동정론도 있고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항의는 바람직하다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보통의 인터넷 이슈들처럼 날조된 증거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었고 이를 믿고 무의미하게 분노를 크게 키운 이들도 있었다. 양측 모두 사건 초기 기획사에서 부적절한 대응으로 사건을 더욱 키운 측면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었기에 다시 한번 사과를 해야 했다. 시크릿의 대학공연들이 항의를 받아 취소되고 크레용팝의 옥션 광고가 사라지는 등 타격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인기 걸그룹 시크릿은 멤버 중 한명인 전효성이 라디오에서 '민주화'라는 말을 잘못된 용법으로 사용하여 곤욕을 치렀다. (뉴스1)
국가정보원이 인터넷에서 광범위한 댓글 작업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베’와 같은 극우성향 누리꾼들의 성장에 그들이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 제기되었다. 호남지역에 대한 지역차별의 정서가 점점 완화되는 것처럼 보이다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천년대 후반 인터넷에서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된 상황을 보면 그런 추측에도 개연성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베’에 시민이 존재하지 않고 국정원 공무원들만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발생원인과 관계없이 ‘일베’ 코드는 어느덧 하나의 하위문화로 자라났고 십대들이 거기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증언도 많다.
그렇다면, 이 ‘문제적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그러려면 ‘일베’를 감정만으로 즉자적으로 ‘벌레’나 ‘인간 이하의 것들’로 매도하기 전에 “일베의 무엇이 문제인가?”를 물어봐야 한다.
‘일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성폭력 수준으로 행해지는 여성혐오의 정서와 특정 지역 사람들을 배제하는 인종주의적인 지역혐오의 정서일 것이다. 이러한 정서들이 인터넷상의 게시물이나 덧글로 무분별하게 배출되는 것은 일종의 ‘온라인상의 혐오 및 증오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긴장하고, 관심을 기울이며, 다음 세대의 하위문화로 남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도 그것들이다.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앞으로 다양한 논의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 최근 '빠빠빠'로 음원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걸그룹 크레용팝 역시 '일베'의 용법을 사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뉴스1)
많은 사람들이 즉자적으로 분개하는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다양한 비하의 코드나 ‘민주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등은 조금 다른 문맥의 문제다. 물론 비하 중에서도 정말로 심한 수위의 것들이 있고, 그런 것들은 앞에서 논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온라인상의 혐오 및 증오범죄’일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넓은 문맥에서 바라본다면 김대중 노무현을 싫어하는 정치성향 자체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정치인에 대한 비하나 패러디를 어느 수준까지 허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내가 하면 패러디, 네가 하면 고인 능욕’을 넘어서는 각 정치세력과 지지자들 간의 합의가 필요한 일이다.
한국 사회의 경우 새누리당 지지자는 민주당 지지자를 일종의 ‘북한인’으로 바라보고, 민주당 지지자는 새누리당 지지자를 일종의 ‘일본인’으로 바라보며 서로를 국민국가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심각한 분열이 있다. 이 분열 속에서 최소한의 가치규준의 합의를 찾아내는 작업이 바로 ‘민주화’의 일부일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경멸하는 어떤 청년에 대한 이쪽 진영의 경멸은 그들이 그러한 종류의 ‘민주화’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어떤 청년들이 어째서 ‘민주화’란 말을 부정적으로 쓰는 것을 그토록 쉽게 받아들였는지를 역설적으로 설명해주는 지점이 있다. 이는 ‘일베’라는 표상에 대한 배제를 통해 해소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 오랜 시간 시민교육을 통해 노력하면서 해결해야 할 크나큰 문제가 될 것이다.
이제 개혁담론과 시민사회는 단지 '일베'를 규탄하고 배제하는 것을 넘어 이러한 문제를 대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론을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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