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 안철수 의원은 2011년 가을 서울시장 보궐선거 국면에서 ‘안철수 현상’이란 태풍으로 한국 정치에 등장한 이후 무소속의 제3후보로서는 유례가 없는 지지율을 이끌어 왔다. 일 년이 넘게 제1야당 후보들을 ‘더블 스코어’로 이기는 지지율을 유지했고 단일화 국면에서 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 밀려 패배하는 순간까지도 ‘본선 경쟁력’은 더 우위에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대선에 나오지도 못한 그가 대선 후에도 지지율을 유지하며 여전히 무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했고 아직도 대선 후보 지지율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소위 친노 세력에 친화적인 지지자들은 지난 대선 국면에서부터 안 의원의 높은 지지율을 ‘제3후보의 거품’이라고 폄하해 왔다. 그를 과거의 제3후보들, 그러니까 1992년의 정주영이나 박찬종, 1997년의 이인제, 2002년의 정몽준 같은 정치인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견이었다. 안철수의 지지기반은 과거의 제3후보들과 다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제3후보들은 주로 ‘영남의 비여권성향 지지자’들을 지지기반으로 가졌다. 그들은 김영삼의 3당합당으로 ‘야당 선택지’가 사라진 것에 대한 불만은 가졌지만 차마 ‘호남당’(이라고 그들이 생각한 민주당)은 찍을 수 없었던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1992년의 김대중은 정주영과의 단일화를 고려하지 않았고 1997년의 김대중은 이인제가 영남표를 깨주는 바람에 당선될 수 있었다.

▲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입법조사처 대회의실에서 열린 '차명거래 방지·자금세탁 근절 어떻게 이룰 것인가' 정책토론회에서 내빈들과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안 의원은 자신의 싱크탱크인 정책네트워크 내일과 공동 주최한 이날 토론회 결과를 토대로 자신의 1호 법안인 '자금세탁방지 3법'을 이달내에 발의할 계획이다. (뉴스1)

안철수 역시 영남에도 기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의 20~30대들은 문재인 후보로는 ‘세대투표’에 나설 생각이 없었으나 안철수 후보가 출마했을 경우 지지할 생각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정치인 안철수’의 기반은 그 이상이다. 오랫동안 친노세력이 강세를 보였던 수도권 중간층들에게도 어필하고 있고, 무엇보다 친노세력에 반감을 가진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굳이 지역으로 말한다면 호남에도 기반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2002년 상황에서 호남은 한때 위기에 몰렸던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와의 격차를 줄이는데 도움을 준 든든한 지지기반이었지만, 십년 후 그들은 문재인과 안철수로 분리되었고 서로의 선택을 양보하지 않고 있다.

친노는 중간층 일부와 구민주당 지지층 중 일부가 분명하게 반노정서를 가지게 된 세태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고 친노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면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그들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고 그들이 그러한 정서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안철수에 대한 기대가 사그러들지 않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현재의 안철수의 정치적 입지가 자신의 역량을 통해 유권자의 검증을 받은 결과물은 아니란 뜻도 된다. ‘정서’는 강력한 우군이 될 수 있지만 ‘위치’를 잡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기 어렵다.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 정치적 성공의 가능성도 줄어들뿐더러 그런 이가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일이 바람직하다는 보장도 하기 어렵다. ‘안철수 현상’이 한국 정치에 축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무소속 안철수 의원의 최근 행보에서 ‘위치’를 명확히 잡으려는 노력 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정서’ 위에 안주하려는 태도가 감지된다. 한 때 안 의원의 지지그룹으로 분류되었던 한 정치권 관계자는 “안 의원은 모든 이에게 비판받지 않으려는 욕망이 너무 강한 것 같다”고 평한다.

그는 “정치인의 목적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과반수의 지지를 이끌어내 당선되는 것인데 안 의원은 편이 갈리고 다른 편이 자신을 비판하는 상황을 싫어 하다 보니 제 때 정치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한다. 안 의원의 그러한 성격이 CEO 등 다른 명사일 때와는 달리 정치인으로서는 약점이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안 의원이 지나치게 중도층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최장집 교수의 진단과도 통한다. 안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도 새누리당과 민주당 사이의 중도층, 민주당과 진보정당 사이의 중도층을 모두 잡으려는 무색무취한 선택으로 유권자들의 열광을 이끌어내는 데에 실패했다. 최장집 교수와의 짧은 만남은 그가 ‘중도층의 모호한 열망의 대상’을 넘어 ‘비전을 가진 정치인’으로 진화하기 위한 좋은 기회였을 테지만 안 의원은 이 기회 역시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최장집 교수는 예측했던 것보다도 안 의원에 대한 실망감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고 ‘위치’의 부재 속에서 그는 여전히 ‘정서’ 위에 떠받쳐져 있을 따름이다.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을 비판하는 성명서나 민주당 조경태 의원과의 비공개 만남에서도 이러한 기조가 반복되는 상황이 보인다. 조명철 의원의 ‘광주 경찰’ 운운은 차마 언급하기도 민망한 폭언이었고 안 의원의 비판의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타당한 이야기를 굳이 ‘막말 일삼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비판’이란 형식에 실어서 보냈고 이는 국정원 국정조사가 밝혀 냈어야 했던 것과 이 사태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현 상황에서 조경태 의원과의 만남으로 이슈가 되는 것은 또 어떤가. 이 모든 행보는 ‘중도층’과 ‘반노’라는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는데, 정치인 안철수가 아직까지 보여준 것이 그것 밖에 없다는 것이 크나큰 문제다. ‘진보적 자유주의’를 말했지만 그 기조를 제시해준 최장집은 사실상 떠나갔고 나머지 문제에 대한 내용은 채워지지 않았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행보를 볼 때 그에게 몇 번의 정치적 기회는 더 올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민주당의 구태의연한 전략을 답습하기 보다는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대립을 뛰어넘는 새로운 비전을 통해 중도층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것’과 ‘무색무취한 것’은 다른 것이다. 그가 ‘위치’를 잡지 못하고 ‘정서’ 위에 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게 남은 정치적 기회의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자원’이 남아 있을 때 지금과는 다른 행보가 시작되어야 그가 한국 정치에 무언가 기여할 거란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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