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며 눈가를 만지고 있다. 권 전 과장은 이날 오후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에 참석해 "12월 16일 경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가 대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느냐"는 민주당 박범계 의원의 질문에 "중간수사 발표 행위가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부정한 목적이었음은 분명하다"고 답했다. (뉴스1)

청문회는 종종 스타를 만들어낸다. 2002년, 민주정부 2기를 만들어낸 ‘대역전 드라마’를 펼친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표적인 ‘청문회 스타’였다.
국정원 정치개입 및 선거개입 의혹 국정조사에서도 ‘스타’는 탄생했다. 하지만 민망하게도 특위에 참석한 의원들이 아니라 증인 중에서 탄생했다. 물론 국정원 댓글 논란에 대한 수사담당자였던 권은희 전 수사과장이다. 오늘 진보언론들은 1면 탑에 그의 발언을 배치했고, 보수언론들은 그의 발언을 수사관의 해명과 함께 다루는 기사를 써서 파장을 막는데 급급했다.
▲ 오늘(20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 오늘(20일)자 한겨레 1면 기사
생각해보면 민망한 일이다. 질문할 권리가 있는 의원이 아닌 대답을 하는 증인이 스타가 된다는 것은 말이다. 새누리당이야 조직적으로 논점을 회피하고 딴전을 피우는 ‘침대축구’가 목적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 ‘광주 경찰’이라고 ‘막말’하고 “문재인 지지하냐?”고 묻는 게 그들의 목적에 부합한다.
하지만 권은희 전 수사과장이 부각되는 상황은 민주당의 지독한 무능을 보여준다. 민주당 측 간사였던 정청래 의원은 라디오 방송에 나와 국정조사에서 민주당의 목표가 검찰공소장의 내용을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에도 의미는 있을 것이나. 그렇다면 “사법부가 판단하고 있는 사안을 뭐하러 국정조사하느냐”라고 말하는 새누리당의 시선에도 타당성이 실린다. 검찰공소장이 그대로 법원에서 인정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민주당의 접근대로라면 법원이 공소사실의 근거가 약하다고 판단하고 새누리당이 그것을 활용할 때 답변이 궁색해질 것이다. 법원이 정권의 눈치를 보아 ‘나쁜 판결’을 내렸다고 비판하면 그만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치면 새누리당이 ‘운동권 검사의 무리한 기소’ 운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검찰과 법원의 역할은 별도의 것으로 존중해주고 정치의 역할을 했어야 옳았다. 만약 법원이 국정원 댓글을 선거개입 내지는 정치개입으로 판결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할 얘기는 충분하다.
▲ 금일(20일)자 조선일보 5면 기사
말하자면 민주당은 문제를 본질적인 수준에서 파헤치지 못했다. 새누리당은 국정조사가 한참 진행된 순간까지 △ 국정원 댓글은 업무의 일환으로 대북심리전단의 통상적인 대북심리전이다 △ 국정원 댓글은 국정원 직원 개인의 정치의식의 표현이다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주장을 고수했다.
굳이 이 주장을 일관성 있게 받아들여주자면 댓글 중 대다수가 업무였지만 경찰 수사 키워드에 걸린 몇 개는 개인의사 표시였다는 얘기인데, 물론 말도 안 되는 설명이다. 민주당은 ‘김 직원’의 답변 한 두 개만 유도해도 깨뜨릴 수 있는 이런 초보적인 ‘논점 흐리기’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침대축구’에 끝까지 끌려 다녔다.
국정원이 끝까지 ‘대북심리전’이라는 용어를 고수하게 한 것도 황당한 일이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 인터넷 댓글들은 절대로 대북심리전이 될 수가 없다. 그 말이 성립하려면 북한의 평범한 인민들이 남한 웹을 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국정원의 작업은 북한 인민들에 대한 심리전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최대한 선의로 받아들이더라도 북한 공작원들의 왜곡된 게시물에 맞서 진실을 유포하는 일이어야 한다. 여기서 심리전의 객체는 명백하게 북한 인민이 아닌 대한민국의 시민들이다. 그들이 댓글을 올린다고 북한 공작원들이 귀순할 건 아니지 않은가.
따라서 이들의 행위는 ‘대북심리전’이긴커녕 ‘대남심리전’이며 정확하게는 ‘정보기관의 대민심리전’이라 불러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규명할 경우 당장 튀어나오는 문제는 “왜 정보기관이 대민심리전을 해야 하나?”라는 것이다. 그것은 국정원의 자체 규정을 넘어선 일일뿐더러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런 식으로 논점을 하나하나씩 쳐나가지 못했고, 외려 새누리당 의원이 “굳이 국정홍보 활동을 국정원이 해야 할 이유가 있어요?”라고 묻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참여정부 때부터 그랬다는 ‘물타기’를 답변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결국 국정원 댓글의 핵심은 그들이 ‘북한이 정권을 비판하므로, 우리 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북한의 의견에 동조하는 행위다’ 정도의 시선을 가지고, ‘종북세력 척결이 중요하며, 민주당 등 야권은 대체로 종북세력이다’ 정도의 판단을 가지고, 정부 시책을 옹호하고 야권을 비난하는 댓글을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부지런히 달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시선에 동의한다면 국정원 사람들의 주장대로 “선거 때 갑자기 시작한 일도 아니고, 선거개입이나 정치개입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선거개입하라는 지시도 받지 않았다”는 말이 성립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진심으로 이렇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짓거리’들을 ‘업무’로 하려면 그런 ‘신념’이 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 오늘(20일)자 조선일보 5면 기사
그렇다면 민주당이 할 일은,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공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신념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우스꽝스러우며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지를 절절하게 규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그렇게도 하지 못했다. “세종시는 박근혜 대통령도 반대했는데 그럼 박근혜 대통령도 종북이냐”고 물은 적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이 논점도 살리지 못했다.
문제들을 구별해내고 정면으로 찔러가는 날카로움이 없었기 때문에 새누리당의 ‘일사문란’(정말이지 그들의 행동은 문란해서 못 봐줄 지경이었다)한 ‘더티 플레이’에 빨려 들어갔다. 경찰 수사가 은폐였다는 구체적인 수사가 없으면 밝히기 힘든 논점과 그래서 대선 결과가 뒤집혔다는 가능세계에서나 확인이 가능할 논점을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에 검찰 공소장 읽고 경찰 수사 CCTV를 트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기에 구체적 증언을 한 권은희 전 수사과장만 스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참여정부 때도 댓글을 달았다는 국정원 측과 새누리당의 ‘물타기’에 “이보세요. 참여정부 때도 그런 댓글을 달았다면 그것도 잘못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 쪽은 당시 대통령은 그런 지시한 적 없다는 증언을 가지고 있는데 그럼 독단적으로 했단 겁니까?”라고 대꾸하지도 못했다.
민주당 자체가 논점에 대한 이해가 떨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국정원의 댓글과 국정홍보처의 댓글의 성격이 어떻게 다른지도, 공무원임을 밝히고 댓글을 단다면 ‘홍보’이나 숨기고 달면 ‘기만’임을 적시하지도 못했다.
그런 초보적인 얘기들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새누리당은 바로 그런 초보적인 수준에서부터 반박하고 있었다. 자명한 것들을 자명한 것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국정원 대선개입과 경찰의 사건 은폐로 정권을 도둑질당했다”는 ‘서사’를 통째로 강요했다. 설령 그것이 ‘진실’에 가까운 일일 수 있다 해도 그런 식으로 어떻게 ‘진실’을 믿게 하겠는가,
검찰과 법원의 역할이 있고 정치세력의 역할이 있다. 민주당은 국가기관은 특정 정치세력이나 정책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 정보기관은 국가안보를 정권안보로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공무원은 국민을 기만의 대상으로 삼아선 안 된다는 것 등의 논점을 드러내는데 실패했다.
그 결과 마지막까지 국정원 간부가 ‘사이버보안’ 운운하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들은 북한 공작원들의 해킹을 막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야권을 종북세력이라 믿는 시민의 숫자를 실제보다 많아 보이게 하는 정보조작을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설령 국정원이 정책홍보까지 한다 해도 만약 댓글에서 호남지역을 비하했다면 보편적인 인권범죄로 보아야 하므로 댓글 내용을 철저하게 확인하고 ‘대북심리전’이니 ‘사이버보안’이니 해야 한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이 권은희 전 수사과장에게 원색적인 지역주의적 폭언을 하는 상황까지 나왔다. 물론 민주당이 조명철 의원의 인간성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지만 필요한 논점들을 구별해서 철저하게 추궁했다면 새누리당이 방어적 차원에서 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말이다. 바로 국정원 댓글이 조영철 의원 같은 시선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있기에 결코 대북심리전일 수 없으며 철저하게 수사해야 할 범죄적 행위라고 규탄했어야 했다.
민주당은 결과 보고서에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보고서 채택을 파행으로 이끌고 특검을 요구하겠다는 판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검찰공소장에서 보이듯 현재의 검사도 일을 나름대로 열심히는 하고 있다. 특검 요구는 정치적 무능을 덮기 위한 정치적 술책일 뿐, 실효적 의미는 크지 않다. 민주당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직시하고 그것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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