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들의 어벤져스가 뭉쳤다. 이름 하여 ‘포 호스맨’. 독심술과 탈출, 재빠른 손놀림의 달인 등이 뭉친 이들 네 마술사는 불가능해 보이는 마술을 관객에게 펼친다. 무작위로 추첨된 관객을 한 사람 불러 그의 주거래 은행을 터는 말도 안 되는 마술을 선보인다.

설상가상 무작위로 추첨된 관객의 주거래 은행은 미국도 아닌 프랑스에 있는 은행. 하지만 포 호스맨은 보란 듯이 마술에 성공해서 관중석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로화를 펑펑 뿌려댄다. 이쯤 되면 ‘하늘에서 유로화가 내린다면’이 된 셈이다.

일 년 전만 해도 남의 지갑을 털거나 사기 행각으로 푼돈이나 만지던 이들 네 명의 마술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제각기 살아가면 별 볼 일 없는 마술사 네 명이 누군가에 의해 한 장소로 모이게 되고, 거기에서 포 호스맨이라는 마술계의 드림팀이 만들어진다. 이 영화에서 포 호스맨을 하나로 모으는 장본인이 중요하다.

그는 이들 네 마술사를 불러 모은 키메이커이면서, 이들을 왜 유명 스타로 만들어주는가에 관한 동기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키메이커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포 호스맨을 왜 만들었는가 하는 데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관객은 포 호스맨의 현란한 마술쇼를 보며 이 거대한 마술쇼를 디자인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추리할 수밖에 없다.

포 호스맨을 모은 건 이들을 마술계의 로빈 후드로 만들기 위해서일까? 두 번째 마술쇼에서 포 호스맨은 후원가의 계좌를 털어 관객의 계좌에 넣어주는 배은망덕한 행동을 펼친다. 포 호스맨을 후원하는 후원가의 돈을 털다니! 그런데 두 번째 마술쇼의 관객은 보통 관객이 아니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시신이 강물에 둥둥 떠다니는 참혹한 카트리나의 발톱에 상처 입은 이들에게 금전적으로나마 보상을 베푸는 이가 포 호스맨이다. 포 호스맨의 후원가는 이들을 후원하다가 눈앞에서 고스란히 계좌를 털리고 만다.

그렇다면 포 호스맨은 로빈 후드라 치더라도, 후원가는 마술사에게 눈앞에서 돈을 털린 무고한 희생자일까? 후원가가 모은 돈이 올바른 방법으로 모은 돈이 아니기에 털려도 마땅한 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불의로 모은 돈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준 포 호스맨은 마술계의 로빈 후드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공정한 분배에 관한 물음이 제기된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은행계좌를 털거나, 불의한 방법으로 거액을 끌어모은 부자의 돈을 털어 허리케인의 피해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온당한 행동인가에 관한 의문 말이다. 윤리적으로 보면 이는 정당하지 않은 행동이지만 관객은 포 호스맨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처럼 경제민주화 혹은 양극화 해소가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심적 동인이 관객이 사는 실제 세상 안에 만연한 보편적인 정서이기에 말이다. 관객들이 포 호스맨에게 동정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는 건 그만큼 우리의 현실이 부의 양극화에 빨간 경고음을 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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