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은 언제, 어느 곳에서 되뇌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름이다. 로맨스 연극이 대학가에 난무하는 요즘, 이 연극은 무대부터 예사롭지 않다. 영정사진 같은 무대가 한가운데 뎅그러니 자리잡고 있다. 갓 작고한 이는 주인공 ‘선녀’. 세 자녀를 위해 화수분처럼 무한정 퍼주기만 하다가 남편 사랑 한 번 변변히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엄마다.

사실 선녀는 젊은 날에 일찌감치 이혼했어야 바람직했다. 중매로 결혼한 남편은 다리가 불편한 콤플렉스로 말미암은 열등감 투성이의 인간이다. 육체가 불편한 것이 자격지심이 되어 예쁘고 착한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는커녕 냉대하고 욕을 해대고 물리적인 폭력까지 휘두르니, 요즘 세대의 눈으로 보면 백이면 백 이혼 당하기 딱 좋은 진상 남편이다.

선녀가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가게를 차려도 가게는 오래 가지 못한다. 가게 영업을 때문에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선녀를,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줄로만 알고 의처증으로 학대하기 일쑤다. 아내 선녀에 대한 사랑이 왜곡되어 표현되는 인물이 남편이라는, 기자간담회에서 남편을 연기하는 한갑수 배우의 인물 해석에 대한 변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선녀의 남편은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문제적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적 남편에게서 선녀가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 때문이다. 바닷물에 몸을 던지려 해도 아이들이 눈에 밟혀 남편과 이별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자녀들이 엄마 선녀의 한없는 사랑에 고마워하는 건 아니다. 막내딸은 엄마 선녀가 고액의 혼수를 마련해줘 죽고 못 사는 남자와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막내딸은 이런 엄마의 한없는 은혜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게 딸 된 도리일 것이다.

하지만 막내딸은 먼 곳에서 찾아온 친정엄마를 향해 반가워하기는커녕 ‘자신도 사생활이 있다’며 연락도 안 하고 불쑥 찾아온 선녀를 문전에서 구박하는 불효녀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바라바리 한 가득 먹을 것을 싸온 음식을 보며 ‘이딴 건 마트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독설을 퍼붓는 막내딸의 행보는, 평생 동안 물리적인 폭력을 일삼던 문제적 남편에 못지않은 불효 중의 불효가 아닐 수 없다.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극을 해설하는 암살자 루케니 마냥 <선녀씨 이야기>에서 해설자 역할을 맡는 이는 임호 배우가 연기하는 아들 종우다. 일찍 엇나간 종우는 사실 엇나가고 싶어서 엇나간 게 아니다. 엄마를 향한 아버지의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폭력에 염증을 느끼고 집을 뛰쳐나간 아들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어주는 이는 죽은 엄마다.

남편이 있고 자녀가 셋이나 있지만, 엄마 선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가족은 단 한 사람도 없던 게 사실이다.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아들은 어머니의 서글픈 한평생을 이해하고 철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연극에서 철이 들어야 하는 인물은 종우가 아닌 딸 정숙과 정은이다. 아들 종우는 아버지의 폭력이 꼴 보기 싫어 집을 뛰쳐나간 것이지만 두 딸은 어머니 선녀가 자신들에게 해준 은혜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어머니의 은혜를 당연지사로 만들어버리는 딸들이기에 말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불구 남편을 떠나지 못한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 뒤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소모해대기만 하는 두 딸의 불효가 자라나고 있었다. 자식들은 그렇게 한없이 퍼줄 줄만 알던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을 소모하고 있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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