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국열차>, ‘다른 세계’라는 절망적인 환상 1편에서 이어집니다.

6. “그것은 우리들의 현재 세상의 한계 너머에 있는 ”진짜 세계“를 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서 환영적 몸짓이다.” - 토드 맥고완, <라캉과 영화이론> 제 6장 ‘우리들의 환상과 싸우기’ -

한 가지 퀴즈를 풀어보자. 세 가지 보기가 준비돼 있다. 성스러운 엔진의 가동은 영원하지 않으며, 얼어붙은 대지는 숨길을 트고 있다. 첫째, 길리엄의 만류대로, 급수칸에서 전진을 멈춘다. 둘째, 엔진실에 도달한 커티스가 윌포드의 뒤를 이어 열차의 통치를 관장한다. 마지막, 엔진의 파괴와 ‘진짜 세계’를 향한 탈주다. 내가 꼬리칸의 무임승차자라면, 최선은 첫 번째 답안이다. 나로선 그 편이 가장 안전하며, 인명의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차선은 두 번째 다. 74%의 승객이 살해당할 테고 체제는 유지되겠지만, 확실하게 전멸하는 것보단 낫다. 비겁하고 보수적인 선택이라고? 기억하시라. 이것은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아닌 일개 꼬리칸 ‘노예’의 판단이다. 정치는 인권을 제외하고 성립할 수 없다. 죽음보단 착취가 합리적이다. 바깥세상은 녹고 있으며, 목숨을 부지한다면, 언젠가는 활로를 도모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좋은 것’과 ‘더 좋은 것’의 비교가 아닌,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사이의 판단이다.

물론 <설국열차>는 우화다. 나도 알고 있지만, 이 우화는 이분법의 토대를 구축하며, 너무 많은 것을 부정해버렸다. 현재 너머의 세계는 현재의 세계와 격절돼 있다. 그곳은 지금-여기의 철저한 바깥이며 외부다. 현재의 체제와 교집합을 나누지 않으며,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한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외부가 무엇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꼬리칸의 승객은 물론, 봉준호도, 관객들도 알 수 없다. 이 영화를 지지하는 이들이, 가능성의 내리물림을 찬미하면서도,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는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경향신문, 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설국열차>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꼬리칸 승객들 대다수가 커티스와 같은 숭고한 헌신을 행할 수도 없다. 그것은 범속한 시민들에겐 불가능한 결단이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순간, ‘현실의 우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설국열차>는 반대의 의미에서 엘리트주의적인 영웅담론의 약점을 안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준비된 카드가 부모-자식의 윤리다. 커티스-길리엄/윌포드, 타냐(옥타비아 스펜서)-지미, 앤드류(이완 브렘너)-앤디, 남궁민수-요나(고아성). 부모들은 아이들을 찾아 나서고, 아이들은 미래를 빼앗긴 채 실종되었다. 자식들은 아비와 뒤얽힌 동시에, 서로를 밀어내며 맞서고 있다. (요나의 살인을 금지하는 남궁민수와 자신의 의지로 살인을 행하려는 요나)

눈여겨봐야 할 장면 두 가지. 영화 초반, 영화 내에서 (아마도) 가장 긴 호흡의 롱테이크가 작동하며, 자식 잃은 타냐와 앤드류를 숏의 주인공으로 세운다. 다음은 커티스와 길리엄이다. 인상적인 대목. 도끼부대와 결전을 치른 후, 자책감에 시달리는 커티스를 길리엄이 어루만진다. “두 팔이 멀쩡한 내가 어떻게 리더가 될 수 있겠어요” 이때, 길리엄의 대답은 상당히 음흉하고 외설적이다. “팔은 두 개인 게 좋아. 여자를 안을 때도 그렇지” 만약, 커티스의 죄책감을 덜어주겠다면, 이렇게 답해선 안 된다. “팔이 하나라도 나쁘진 않아. 신경 쓸 거 없다네.” 이것이 올바른 대답이다. 길리엄은 자신의 불행을 은연중에 내세우며, 커티스의 죄의식을 가중시킨다. 자신의 성스러운 입지를 강화하고, 커티스를 충직한 아들로 묶어 두려한다. 길리엄이 팔을 쓰다듬자, 커티스는 어딘가 환멸스런 기색으로 뿌리친다. 여기엔 모종의 성적인 코드가 엿보인다. 존재 간의 어두운 심연과 불안한 간극이 일렁거린다.

 

커티스는 아버지 길리엄의 진면목을 깨닫고서야, 자신의 대속을 수행하며 영적인 성장을 이룬다. 커티스의 통과제의는 (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꼬리칸에서 엔진실로) 다음 세대의 희망, ‘다른 세계’를 위한 밑거름이다. 봉준호는 부모-자식의 변증법을 통해, 세대 간의 책임과 자립의 보편화된 논점을 구축한다. 이것은 다분히 윤리적인 프레임이다. 정치를 윤리로 전유한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겠지만, 커티스의 투쟁이 어떤 외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눈여겨봐야 한다.

 

7. “좁고 긴 이미지 공간을 무척 좋아해요. 그런 어둡고 긴 공간. …공간 전체가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동굴인데 동굴을 돌파하는 영화지요.” - 씨네21 800호, ‘씨네 산책’ 봉준호 편 -

<설국열차>에서 가장 용납하기 힘든 서사 오류는 후반에 등장한다. 내가 볼 땐, 그 나머지는 전부 사소한 결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장면은 의아하리만치 거론되지 않는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사태의 전모를 폭로한다. 윌포드의 대사를 시작으로, 이야기의 합리성과 인과관계가 파탄에 처한다. “밖에는 미친놈들이 날뛰고 있지.” 장면이 전환된다. 옆구리에 칼을 맞고 분명히 ‘숨을 거둔’ 프랑코(블라드 이바노프)가 덜컥, 눈을 뜬다. 나는 지금 좀비영화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가 빈사상태에 빠져있다 회복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전 장면에서 죽음의 뉘앙스는 명료했었다. 프랑코 본인조차 이런 위화감을 인지하고 있다. 심지어 봉준호도 그걸 강조한다. 프랑코가 열차의 문을 지나는 순간 덜거덕, 무언가 발길을 막는다. 프랑코의 복부에 깊숙이 박힌 채 문틀에 걸린 나이프를, 카메라가 잡는다. 사태는 끝나지 않는다. 분명히 피격당해 쓰러졌던 남궁민수조차 어느새 거뜬히 일어나서 액션 활극을 벌인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태다. 봉준호는 지금 농담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종말론적 광기를 방출하려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이것은 현실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봉준호 영화의 공간은 하나의 이미지에 일관되게 사로잡혀 있다. <플란다스의 개>의 어둡고 음침한 아파트 지하실. <살인의 추억>에서 시체가 유기된 수로와 용의자가 박현규가 사라진 캄캄한 터널. <괴물>의 한강 하수도와 역겹고 깊숙한 괴물의 서식지. 그곳은 폐쇄된 장소, 진실이 소실된 심연, 시대의 상흔과 식민의 증상이 도사리고 있는 ‘구멍’이다. 건설비리에 항의하다 시멘트벽에 매장된 보일러 김씨가 기괴한 농담처럼 돌아오는 곳. 연쇄살인의 ‘추억’과 탈식민지 시대의 ‘괴물’이 귀환하는 곳. 망각된 것들이 우글거리며 기척을 드러내는 밑바닥. 그곳은 무의식과 환영의 거처다.

설국열차는 봉준호 영화의 폐쇄성이 극대화된 공간이다.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 끝의 끝까지 가서야 바깥 세상에 나설 수 있다. 기차는 터널을 지나간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헤아릴 수 없는 음울한 질곡. 예카트리나 전투 장면의 ‘해피 뉴이어’는 명백한 징후다. 기차는 일 년에 한 번, 그 자리에서 새해를 맞는다. 즉, 직진하는 열차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온다. 뭇 평자들과 감독이 말하는 것처럼 <설국열차>는 직진의 서사가 아니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한다. 이것은 회귀와 순환의 서사다. (정말로 직진하는 운동에 집중하고 싶었다면, 하필 그 장면에서 제자리로 돌아올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커티스는 왜 그리도 열차의 엔진칸에 다다르길 집착하는가? 윌포드를 만나기 위해서다. 어째서 그를 만나려 하는가? 17년 간, 아니 18년 간 치달려 온 살육과 인육의 외상을 청산하기 위해서다. 그 외상적 사건의 원흉이 도사린, 실재와 대면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직진해 봤자, 74%가 죽을 것이다.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자리’, 원래부터 ‘정해진 자리’로 돌아간다. 전진은 후퇴하고 체제는 순환할 것이다. 기차는 일 년에 한번 원점으로 돌아와 터널 속으로 사라진다. “제로(zero)로의 거듭된 회귀, 무지로의 여정”, “체념과 침묵”의 “숙명적 비애의 기운”(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살인의 추억>과 <괴물> 장르와 지역정치학’)과 “논리적이면서도 로맨틱한 그의 비관주의”(씨네21 916호, cover star '누가 여자래요? 틸다 스윈튼‘)라 표현할 수도 있을 봉준호 영화의 자질은, 공간에 대한 집착과 매혹을 빼놓고는 논할 수가 없다. <설국열차>는 폐쇄된 공간과 공간, 영겁회귀의 악몽에서 탈출하려는 이야기다.

 

8. “(한숨) <설국열차>를 끝으로 이런 종류의 공간에 대한 집착과 작별하고 싶기도 해요” - 네이버 김혜리 칼럼, ‘길면 기차, 그리고 긴 인터뷰 (1) : <설국열차>에 이미 탑승한 관객을 위한 봉준호 감독의 코멘터리’ -

 

사실 나는, 프랑코의 부활이 ‘현실에서 환영(꿈)으로 이행’하는 시그널, 약호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이 경우, 환상을 꾸는 주체는 요나가 된다. 프랑코가 눈을 뜨자, 약에 취해 잠든 요나도 눈을 뜬다.) 헌데,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게, 되살아난 프랑코가 다시 죽는다. (꿈속의 죽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신중해지고 싶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설국열차>에는 무의식과 꿈의 이미지가 구조화되어 있다. 남궁민수와 요나는 감옥 칸에서 잠들어있다 깨어난다. 그들은 늘 몽환(크로놀)에 찌들어 있다. 도끼부대의 기괴한 형상과 느릿하게 꿈속을 몸부림치며 거닐듯 고속촬영된 커티스의 액션 안무. 예카트리나 브릿지를 지나 터널을 통과할 때, 커티스의 얼굴을 스캔하듯 훑어가는 빛-그림자 이미지. 마치 꿈속의 인물들처럼 이질적인 ‘배경’과 이미지로만 처리된 일등칸 승객들. 상등칸에 끌려간 꼬리칸 승객들은 몽유병에 홀린 듯 얼이 빠져서 돌아다닌다. 엔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영상은 명멸하며 - 마약 클럽- 사이키델릭한 환각을 닮아간다. 좀비처럼 달려드는 약쟁이 승객들. 그리고 클라이막스에서 눈을 감았다 뜨는 프랑코-요나.

엔진실 시퀀스 전후로, 맥거핀이 발생한다. 커티스는 식인의 기억을 오래도록 술회하며 엔진실 앞에서 어깨를 떤다. 윌포드의 엔진실엔 아이들이 감금돼 있다. 그러나 엔진실엔 아이들이 보이지 않고, 윌포드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다. 관객은 의심하게 된다. 인육인가? 그렇지 않다. 영화 초반, 커티스는 에드가와 ‘스테이크’에 관한 얘기를 두어 번 주고받는다. 이것은 전형적인 전치(displacement)의 꿈-작업(Dream-Work)의 공정이다. 인육의 외상이 소고기 스테이크란 하찮고 지엽적인 대상, 맥거핀으로 전치되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표면상으로도 커티스가 엔진실에 입장한 후, 기차-바깥의 지위가 환상(영원한 엔진의 허구/매트릭스)-실재(기온이 하강하고 있는 대지/북극곰)로 뒤바뀐다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한 실재는 환영 속에서 엄습한다. 영화 내에는, ‘뚜껑’(무의식의 해치)를 여는 장면이 반복된다. 단백질 블록 생산 기계의 뚜껑을 여는 장면, 지미가 갇힌 엔진실 바닥을 들추는 장면. 전자는 현실의 의식 속에서 쫓겨나고 은폐된다. (그림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꿈은 망각된 것들이 역습하는 몽마의 소굴이다. 체제의 생존을 위해 아이들을 잡아먹는 식인의 외상. 커티스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외상과 마주한다. 그것은 절망이다.

9. "그 제스처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것들은 환영 자체의 실재성, 환영적인 스펙터클의 형태로 출현하는 실재를 회피하기 위한 절망적인 시도들이다." -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제3장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

지금껏 봉준호 영화를 지배해 온 것은 모종의 부채의식과 불확정성이다. 한 가지 더, 봉준호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가 자신의 초기작들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얘기했다.

먼저, 그의 전작을 경유해보자. <괴물>의 남주(박해일)은 386세대 운동권(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괴물을 죽이는 클라이막스에서, 그는 꽃병(화염병)을 만들어 투척을 시도하다, 결정적인 순간, 화염병을 놓치고 깨트려 버린다. 봉준호 감독은 이 장면을 ‘삑사리’라고 명명했었다. 이것이 서두에 언급한 ‘형식의 과잉’인데,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는 봉준호 감독과의 <괴물> 인터뷰를 '삑사리의 예술'이란 표제로 내보냈다. 이런 ‘삑사리’는 <괴물>의 다른 장면과 <살인의 추억>에서도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모티프로 숱하게 등장한다.

<설국열차>에서도 같은 장면이 갈래를 나뉘어 반복된다. 영화 중반의 예카트리나 브릿지 전투. 커티스는 도끼 부대와 격전을 벌이던 도중, 생선을 밟고 미끄러져 (삑사리) 넘어진다. 남주도, 커티스도. 기성세대의 후원을 받으며 (또는 그 자신이 기성세대로서) 항쟁을 벌이던 이들이다. 기억하시라. 길리엄=윌포드다. 이제 반대의 장면이 라스트신에서 재연된다. 크로놀을 뭉쳐서 만든 폭탄이 출구에 장착된다. 남궁민수의 딸 요나에게, 세상을 끝내고 세상을 열 수 있는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마지막 남은 성냥개비) 그리고 성공한다. 소녀는 '삑사리'를 내지 않는다.

봉준호의 세계는 어둡고 난삽하게 얽혀있다. 그곳은 선과 악의 이항대립이 아닌, 가해와 피해의 난교와 혼종으로 일그러져 있다. 예컨대, <살인의 추억>의 악인은 누구인가? 대공 분실 같은 취조실에 무고한 피의자를 감금하고 거짓자백을 받아내려던 형사 박두만(송강호)인가? 그러나 그는 악인인가? 아니면, 연쇄살인이 발생하던 비오는 밤마다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방송국에 신청한 박현규(박해일)인가? 그렇다면 그는 범인으로 밝혀지는가? <괴물>의 괴물은 진정한 의미의 악마적 괴수인가? 괴물 역시 미군이 방류한 포름알데히드에 감염된 미물은 아니었던가? 한강 둔치에서 매점 일을 하는 강두(송강호)는 어떠한가? 그는 끔찍히도 사랑하는 딸을 잃은 어수룩한 소시민이지만, 아버지를 죽인 건 강두의 실수였다. 심지어 미군의 포름알데히드마저 먼지에 파묻혀 대상으로서 본연의 지위를 잃고 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강아지를 살해하여 이웃의 죽음을 불러온 건, 순진한 인문대 강사 고윤주(이성재)였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결국 부정한 기성체계에 편입한다. 또는 <마더>의 도진(원빈)은 살인의 진범인가, 누명을 쓴 피의자인가.

봉준호의 영화에선, 개인이 구조와 자리를 맞바꾼 채 보이지 않는 구조를 쫓고 쫓긴다. <플란다스의 개>에선 공황이 할퀴고 간 자리에서, 이웃끼리 개를 유괴하고 부부끼리 망치를 집어 던진다. 개인들은 각자가 소속되는 기성 체제의 안팎으로 단절돼 버린다. <살인의 추억>은 이런 혼선을 보다 비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취조실에서 폭행을 자행하고, 데모에 나선 여대생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대학생들의 MT를 마냥 선망하다, 동네 바보 백광호(박노식)의 손에 불구가 된 조용구(김뢰화)는 누구에게 자신을 항변해야 하는가. <마더>에 이르러선 이 ‘구조의 개인화’가 혼미할 정도로 난삽해진다. 봉준호는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일까. 선일까 악일까, 개인일까 구조일까. 생각건대, 봉준호는 그 판가름의 책임을 지지 않는 체제를 불신하고, 무능한 권력을 냉소하고 있다. 그 세계는 어느 한가지로 나누어 질 수 없이, 엉키고 들러붙은 채 서로가 범인이요, 숙주요, 체제의 부품인 세계다.

 

10. “꿈꾸는 아버지의 침대 옆에 서서 손으로 끌어당기며 비난의 어조로…” - 자크 라캉,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근본개념> -

봉준호 영화의 결말은 항상 어둡고 모호하며, 아이들의 희망은 잘리고 짓밟힌다. <살인의 추억>의 여중생, <괴물>의 현서(고아성)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의 아내, 곽설영(전미선)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그녀 대신 소녀가 죽었고, 소녀가 끌려갈 때 뒤 돌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제가 내린 지령(민방위 훈련 사이렌)에 거역하지 않고, 주민들 모두가 불을 끄고 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이웃의 윤리와 부모-자식의 윤리를 방기하였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필모그라피를 잠식하고 있는 건, 살아남은 자의 망각과 그에 저항하는 부채의식이다. (그래서 '살인'의 '추억'이다.)

 

<설국열차>에선 어른들이 죽고, 아이들이 살아남는다. 동시에 아주 알기 쉬운 결론(희망)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아이들은 새 시대를 여는 열쇠와 체제를 내파할 불씨를 쥐고 있다. 봉준호는 기성세대의 대의를 냉소하는 만큼이나, 미래 세대에게 연민을 품고 있다. 그 희망은, 희생과 대가를 요구한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아이들뿐이다. 어른들은 열차와 함께 증발하고 산화할 것이다. 희망은, 어른들은 결코 볼 수 없는 어딘가에서 어슴푸레 찾아올지 모른다. 당신은 결단을 내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봉준호는 그렇게 말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희망인가? 봉준호는, 아니 커티스는 규정할 수 없고, 가늠할 수도 없으며, 어떻게 몸부림을 쳐도 체제의 존속에 복무하는 현실 앞에 서있다. 선(길리엄)과 악(윌포드)은 공모하고 있으며, 아무리 뜨거운 분노로 대열의 선봉에 서봤자 어찌 할 길 없는 부조리에 무릎 꿇을 뿐이다. 그 세계는 인류의 마지막 열차처럼 끝없이 직진하고 순환하고, 돌아온다. 그 희망 없음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설국열차>는 엉망진창으로 뒤얽힌 도덕과 선악과 정치를 무無로 돌리며, 아무런 가치와 규율이 없는 순결한 태초(설원)로 탈출해 버린다.

이것은 매트릭스로부터 실재로의 탈주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 ‘다른 세계’를 상정하고 현실과 가상의 자리를 뒤바꾼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작가 자신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을 보고 싶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 “나는 닫힌 문을 열고 싶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기 위한 결론. 이 영화는 끝으로 갈수록 켜켜이 쌓은 몽환의 구조로 자신을 방어하며, 조심스레 관객을 밀어내고, 선명하고 급진적인 논점을 이양한다. 그로부터 거세지는 건 말과 말의 난립이다. <설국열차>는 언뜻 단호하게 촉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걸음 물러선 바깥에서 논제를 던지고 있다. 이것이 <설국열차>의 성취이자, 그만큼의 한계이다.

낙관과 비관, <설국열차>의 엔딩을 무엇으로 해석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애정을 건넨 봉준호가, 지미와 함께 끌려간 앵글로 색슨의 아이, 앤디는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냥개비를 받았다 내어주는 결단의 주체였던 커티스가, ‘다른 세계’를 의도하지 않았단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요나. 끝내버려.” ‘봉준호 영화’는 이런 식의 결론 밖에 낼 수 없는 현실에 회의하고 있다. 미필적 고의처럼 타락한 것들의 씨앗을 업화에 버려둔 채, 새로운 창세기의 스크린(screen)을 설치한다. 현실보다 꿈이 핍진할 때, 인간은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도피한다. 꿈결 속에 실재가 출현하고, 현실의 죄의식이 흉몽의 옷을 입고 걷잡을 수 없이 고개를 치켜들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희망이 아니다. 은밀한 징벌의 욕망이, 전복된 열차에 핀 불길처럼 아른거리며, 현실의 절망을 증명하고 있다. 시네마토그라프가 굴착한 작가 봉준호의 ‘구멍’ 속에서, 아이들은 울고 있다.

11. “아버지 내가 불타는 게 보이지 않나요?” - 프로이트, <꿈의 해석> 제7장 '꿈 과정의 심리학' -

 

 

<설국열차>는 말을 끌어내는 힘이 있는 영화입니다. 다른 어디의 세상이냐. 지금 여기의 세상이냐. 한 명의 평자로서 비판적으로 끝맺음하였습니다만, 이런 화두를 던지는 영화란 흔치 않은 것이겠지요. 지금 당신의 열차는 어디쯤 달리거나 정차해 있습니까?

영화에 관한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다면, http://blog.naver.com/yke0123 로 찾아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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