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꿈꾸는 사람을 깨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꿈속에 있는 또 다른 현실이 아닌가?” - 자크 라캉,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근본개념> -

 

2. (강아지를 유기한 윤주가 현남에게) “저 박현남씨, 나 고백할 게 하나 있는데…” “뭐요?” “나 잘 봐봐 현남씨”, “내 뒷모습을 잘 보라고, 뭐 생각나는 거 없어?” “내 뒤통수를 잘 좀 보라니까”, “정말, 정말 이래도 모르겠어?” - 봉준호, 영화 <플란다스의 개> -

3. “시간이 한참 지나서 내 영화들을 돌아보면 <설국열차>까지가 나의 초기작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싶다. … 내 초기작을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봐주면 딱 좋겠다.” - 씨네21 915호, 봉준호 감독 인터뷰 ‘매번 최선을 다해 기대를 배반하려고 한다’ -

<설국열차>는 뜨거운 영화다. 수없는 찬반양론이 기승을 부렸고, 인터넷에선 호불호의 성찬이 벌어지고 있다. 400억이 넘는 제작비, 해외 유수 배우들의 캐스팅, 비범한 역량을 입증해 온 작가에 대한 기대. <설국열차>를 반대하는 이들은, 만듦새가 헐겁고 결말이 공허하다 문제 삼는 것 같다. 찬성하는 이들은 작품의 문제의식과 어떤 정치성을 높게 사는 듯 보인다. 둘 모두 일리 있는 의견이다. <설국열차>는 결정적인 결함을 가진 영화는 아니지만, 탁월하다고 하기엔 어딘가 아쉽다. 봉준호 감독(이하 존칭생략)은 시작부터 노골적이고, 때론 장황하며, 한편으론 설명을 포기하고 있다. 반면, 명심해야 할 건 이것이 400억 짜리 ‘작가영화’란 거다. <설국열차>는 봉준호 필모그라피 안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지만, 여전한 주견이 느껴지는 영화다. <설국열차>는 마침내 제출된 어떤 결론이다. 이 사실만큼은 제대로 조명 받고 탐구되어야 한다.

<설국열차>는 세 가지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첫째, ‘형식의 과잉’. 둘째, ‘서사의 결핍’. 셋째, ‘장르적 컨벤션의 전용’. 첫 번째 특질은, 봉준호의 전작들과 적으나마 결을 같이 한다. 수평 트래킹 숏과 고속촬영을 병행한 예카트리나 브릿지 전투 장면. 예카트리나 브릿지에서 터널 진입 이후 전환되는 적외선 시점숏. 서사와 병존하지만, 서사에 포섭되지 않는 시추에이션들, 그리고, 영화 초·중반 구사된 고전적인 몽타주 수법이다. (얼어붙은 팔을 망치로 깨부수는 장면, 도끼로 생선 배를 가르는 장면) ‘서사에 포섭되지 않는 시추에이션’은 그간 회자돼왔던 ‘봉준호스러움’의 기반을 이룬다. 괴팍한 유머와 비장미. 관객-영화 사이 이질적인 촉매의 역할. 알 듯 말 듯 은근하게 이야기 전개에 손길을 뻗치는 엉뚱한 사건들. 단순화되고 잦아들긴 했지만, 이는 <설국열차>의 중요한 대목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예카트리나 브릿지 전투에서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미끄러지는 장면, 성화봉송하듯 횃불을 이송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서사의 결핍’은 일군의 관객들이 토로하는 이야기의 개연성과 디테일이다. <설국열차>는 매듭이 헐거운 영화다. 당장 서사의 틈새를 예닐곱 가지는 넘게 지적할 수 있다. SF 영화로서 버성긴 세계관과 (만물이 사멸한 지 고작 17년, 진화의 과정을 워프하고, 하필 북극곰이 소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실하고 임의적인 전개 (커티스는 앞 칸 ‘조력자’의 편지를 조금도 의심치 않고, 딱히 존재에 의문을 품지도 않는다), 정교하지 않은 상황 묘사 (커티스와 남궁민수(송강호)가 독대하는 클라이막스에서 통역기는 건성으로 작동하는가 싶더니 이내 침묵에 빠진다.) 이러한 미비를 들어 <설국열차>를 공격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다. 이야기를 취사한 배경과 반대급부에 대한 평가를 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고, 보다 본질적인, 더 추상화된 형태로 이야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SF의 매력이 아닐까.” - 경향신문, [인터뷰]봉준호 ‘‘완전히 다른 세계’에 열 받는 감정…‘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봉준호 영화의 인장은 장르적 공식의 변주와 위반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대표적인 예이다. 두 작품은 스릴러와 괴수영화이지만, 수사와 추리는 철저히 실패하고, 괴물은 정치적 메타포로만 기능한다. 장르의 관습은 최종적으로 무화된다.) <설국열차> 역시 마찬가지인데, 좀 더 중층적인 맥락을 띄고 있다. 기본적으로 <설국열차>는 장르의 자장에 속해있다. SF영화는 종종 과학과 미래에 대한 공포를 투사하며, 현재에 대한 불안을 가시화한다. 환경오염과 기후통제가 불러 온 지구의 종말. 체제와 이데올로기로 치환된 ‘성스러운 엔진’을 향한 물신과 숭배. 사람을 부품으로 잡아먹으며 운행하는 미노타우르스 같은 열차. 이 가상의 철마는 장르 특유의 미래주의적 비전을 상영한다.

SF영화는 허구에 관대한 관객의 암묵적 동의에 기대 성립한다. 봉준호는 장르의 ‘불신의 유예’를 활용하며, 때론 그를 방패삼아 숏을 추상화시킨다. (예컨대, 라스트 신의 설원과 북극곰, 또는 잉여가치 착취가 없는 영화 내 계급 관계의 양상) 그를 감안하면 사소한 흠결은 기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동의할 수 없다면, 400억짜리 ‘봉테일’에 맞춘 눈높이와, 기대했던 것들을 예상만큼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일 거다. <설국열차>는 SF영화의 기술적이고 시각적인 쾌감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계급투쟁의 현장에 돌입한다. 미래세계의 열차가 무엇을 연료로 영구히 움직이는지, 어떤 노선을 따라 운행하는지, 2031년의 설국열차는 2013년의 KTX와 얼마나 다른지. 각 량의 설비와 엔진의 시스템, 바깥세상의 풍경은 어떠한지. 일체를 불문에 부쳐 버린다. 미장센은 음울하고 건조하며, 열차는 단절-밀폐돼 있다. 꼬리칸의 수난과 가혹한 학정이 스크린의 기류를 탁하게 가라앉힌다. 영화 초중반에 배치돼 있는 ‘형식의 과잉’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고 알쏭달쏭하게 만든다. 관객이 짊어진 부담은, 커티스 일행이 식물 재배 칸에 들어서는 순간, 잠정적으로 해소된다. 장르의 가상성이 선사하는 묘사의 재미를 맛보기 시작한다.

이러한 얼마간의 장르적 쾌감은 열차를 거슬러 오르는 각 량의 단절과 격차의 확인에 복무한다. 설국열차는 계급의 열차다. 봉준호는 열차 내 각 구간을 최대한 선명하고 알기 쉽게 시각화했다. 열차와 승객의 모습은 우리의 상식에서 멀지않고, 시대적인 광경을 아우르고 있다. (예컨대, 대표적인 장르소품 단백질 블록의 정체는 ‘양갱’이다. 일등칸 승객들의 행색은 근대의 부르주아지를 떠올리게 한다. 열차의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미장센은 현대적으로 변하고, 엔진실은 SF장르의 정체성에 걸맞게 디자인되어 있다.) 작가의 주제의식을 관철하는 한편, 정차하고 직진하는 열차 같은 기-승-전-결의 운율로 엔터테인먼트를 벌충하였다. 그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설명과 디테일이다.

<설국열차>에는 해석을 요청하는 동시에 해석에 저항하는 숏들이 있다. 말하였듯, ‘형식의 과잉’. 관객을 유인하는 한편, 밀쳐둔 채 지근거리를 유지한다. 선명하게 제련된 문제의식이 그 공백으로 삼투한다. <설국열차>의 레일은 SF공간의 상징적 가교에 설치돼 있다. 그곳은 지구의 종말, 문명의 소멸, 계급 사회의 막다른 골목이다. 인류의 마지막 열차는 계속해서 돌고 돈다. 칸칸이 나뉘어진 환승 불가능한 계급을 싣고. 때는 새로운 빙하기의 재림이다. 세계는 축소되었고, 사회는 알기 쉽게 축약되었으며, 한 줌의 지배자와 한 줌의 피지배자가 남았다. 가상의 공간과 가상의 현실은 거추장스러운 실재의 사슬을 끊어놓았다. 이제 원하는 결론을 택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는 ‘희망’과 마주한다.

 

5. “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 경향신문, [인터뷰]봉준호 ‘‘완전히 다른 세계’에 열 받는 감정…‘ -

 

<설국열차>의 추상성과 ‘급진성’은 논란을 삼키고 토해내는 뜨거운 아궁이다. 봉준호는 표징의 향배를 열어둔 채 최대한 높은 층위에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인종과 종교, 계급, 이념, 정치, 혁명. 심지어 환경의제까지 포섭하며 메타적인 정치성을 드러냈다. 커티스와 윌포드(에드 해리스)는 대극을 이루고 있으며, 길리엄(존 허트)는 윌포드의 그림자(Shadow)다. 남궁민수는 이들과 또 다른 제 3의 길을 제시한다. 여기엔 결정적인 고정점이 없다. 커티스와 남궁민수, 길리엄, 윌포드. 누구의 입장에도 논리를 부여할 수 있고, 그들 중 누구라도 지지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도 자신을 이입할 수 있다. 영화 속 사건 역시 밑 빠진 항아리 마냥, 유동적인 대입가능성을 지닌다. 커티스의 혁명은 월가시위일 수도, 역사상의 공산주의 혁명일 수도,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항쟁일 수도, 노동자 대파업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시스템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저항, 그 자체일지 모른다. 윌포드와 길리엄 역시 마찬가지다.

윌포드-길리엄을 적대적 공생관계의 양당으로, 커티스를 노무현이나 안철수로 해석하는 관객들이 뜨이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서사적 결핍’에 대한 방어와 공격, 해설이 뒤섞이면서 텍스트는 방죽 터지듯 담론을 재생산하고 있다. 말할 나위 없이, 이것은 <설국열차>의 장점이다. 영화의 설계 안에서 비롯된 사태이기 때문이다. 메타적인 논평을 시도하며, 논점을 손질하는 것은 영화의 효용을 훼손하는 일이다. (엔터미디어, 듀나 “‘설국열차’에 어설픈 색깔론을 덧씌우지 마라”)

<설국열차>를 둘러싼 말들은 엔딩으로 수렴할 터이다. 재미있는 것은 모호하게 해석될 수 있는 뉘앙스(북극곰과 설원은 희망의 징조인가, 비극의 전조인가)를 봉준호 본인이 꽤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객의 해석에 맞기거나 감상의 여지를 넓혀두고 싶다면, 그런 해명을 할 필요가 없다. 그 경우, 마지막 장면은 열린 결말로 남는다. 따라서 논쟁은 의미가 없고, 무력화된다. 그러나 봉준호는 분명하게 입장을 밝히며 논점을 던졌다. 우리는 ‘장르적 컨벤션의 위반’을 다시금 불러들여야 한다.

판타지를 가미한 헐리우드 불록버스터는 대개 영웅 서사로 묶여있다. 공동체에 재앙과 위기가 닥친다. 영웅은 소명을 자각하고 투쟁에 나선다. 거대한 재난과 악의 무리에 맞서 영웅은 공동체를 수호한다. 여기에 종종 성장서사와 신화적인 코드가 개입한다. <설국열차>의 플롯은 절대자,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여정이다. (대표적으로 <블레이드 러너>) 봉준호는 유례없이 종교적인 모티프를 전면에 진열하였다. (노아의 방주, 요나, 아담과 이브, 예수의 대속,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 살점을 떼어 준 부처) 한편, 헐리우드 영화와 전혀 다른 결론에 연착한다.

<설국열차>는 미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커티스의 혁명에서 연상할 수 있는 최근의 사건은 월가점령 시위이다. 일종의 ‘포스트 9·17 영화’로 파악할 여지가 있는데, 그 선발 주자가 작년 개봉한 <다크나이트 라이즈>였다. 장르의 성격과 제작의 규모는 다르지만, <설국열차>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데칼코마니처럼 마주 서 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월가시위’를 위상반전으로 해석하는 평론을 미디어스 지면을 빌어 제출한 바 있지만, 이하에선 표준적인 독법을 따르겠다.)

두 작품 모두, 뚜렷한 계급 혁명이 발발한다. 그 혁명은 숭고하지 않다. 저항의 배후엔 내막이 숨어있고, 그들의 리더는 교활한 공모자(길리엄)이거나, 악의 계승자(탈리아 알굴)다. 공동체는 고담시의 지상과 지하, 열차의 꼬리칸과 엔진실로 양극화되어 있다. 체제의 존속이냐, 파멸이냐. <설국열차>는 영웅서사의 컨벤션을 이탈해버린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봉준호는 대속을 말하며 희생과 결단을 요구하지만, 브루스 웨인은 고담시를 구원하고, 커티스는 열차를 전복시킨다. 똑같이 체제의 모순에 항거하는 체제 내의 운동을 의심하지만, 하나는 체제의 종말을 두려워한다. 다른 하나는 체제의 존속을 회의하며 정반대의 근본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설국열차>는 헐리우드 주류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개념과 별개로 지칭하자면) 대항-영화 (COUNTER-CINEMA)적 성격을 지닌다. 봉준호는 관객들에게, 어쩌면 국제적인 영화담론에 논쟁을 청하고 있다. ‘형식의 과잉’과 ‘서사의 결핍’, ‘장르적 전용’을 아우른 하나의 시사점이며, <설국열차>가 평가받아야 할 몫이라 생각한다.

- 2편에서 계속됩니다.

 

<설국열차>는 말을 끌어내는 힘이 있는 영화입니다. 다른 어디의 세상이냐. 지금 여기의 세상이냐. 한 명의 평자로서 비판적으로 끝맺음하였습니다만, 이런 화두를 던지는 영화란 흔치 않은 것이겠지요. 지금 당신의 열차는 어디쯤 달리거나 정차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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