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산의 탈주가 점입가경이다. 비록 덤프트럭 흙더미 속에 파묻히는 화려한 장면은 없었어도 4회는 정서적으로 임팩트가 강했다. 문경을 무사히 빠져나온 장태산이 공중전화로 서인혜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은 건달도 못되는 반달에서 아빠사람으로 완전히 뒤바뀐 장태산의 내면을 보여주었다. 평생 불러볼 수 없는 딸이고, 평생 아빠 소리 들을 수 없는 아빠라는 말에 담긴 장태산의 말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시청자의 눈물샘도 건드리고 말았다.

세상에 수도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봤지만 장태산의 딸사랑은 더 안타깝다. 딸 수진이의 수술을 위해서 탈주를 했지만 인혜가 불안해 할까봐 걱정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장태산은 인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자세한 내막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인혜가 퍼붓는 악담이 서운할 수도 있겠건만 이미 아빠사람이 된 장태산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런 한편 장태산의 탈주과정에서 만난 모녀와의 짧은 에피소드에는 이 사회에 대한 나직한 항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대규모 수색인원을 동원하고도 문일석이 보낸 킬러 김선생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는 무능한 경찰은 수색을 방해한 결정적인 폭발에 대해서도 그저 장태산을 돕는 것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산을 무사히 내려온 장태산은 대문기둥에 경광등을 달지 못해 쩔쩔매는 모녀를 발견한다. 그 집에는 장정이 없다는 증거였고, 장태산은 그 집을 일단 은신처로 결정하고 들어간다. 그러자 엄마는 어린 딸이 먼저 걱정이다. 짧은 바지에 민소매를 걸친 딸이니 더욱 그렇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구마를 미친 듯이 먹던 장태산은 문득 그런 엄마의 조바심을 알아차리고는 오히려 불쾌해 하면서 일바지와 윗도리를 입게 한다.

그런 모습에 딸은 장태산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장태산의 말을 그대로 믿는 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영화 홀리데이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딸은 이미 스톡홀름 증후군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인에 탈주까지 저지른 인생 막장에 다다른 젊은 범인이 점잖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쩌면 멋있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여기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딸이 영화 홀리데이에 대해서 말을 하자 청각장애 엄마는 아주 어눌한 발음으로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언급하며 딸에게 동조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왜 딸이 아닌 장애를 가진 엄마에게 이 대사를 하게 했을까. 그나마 영화 속 이성재는 크게라도 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절규마저 웅얼거릴 수밖에 없는 답답함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힘없는 민초의 웅얼거림을 정확한 사실로 전달해야 할 미디어들이 침묵하는 재갈물린 시대에 대한 은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날이 바뀌고 장태산은 다시 모녀를 묶어두고 나가서는 뭔가 뚝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후 모녀는 서로 묶인 줄을 풀어내고 밖으로 나왔다. 딸은 거기서 제대로 작동하는 동작감지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엄마는 다급히 전화기를 들고 나와 딸에게 신고하라고 한다. 딸은 그런 엄마에게 신고를 잠시 미루자고 한다. 그리고는 장태산이 설치해놓고 간 감지기를 바라본다. 덕분에 장태산의 바뀐 인상착의는 경찰에 알려지지 않았고 무사히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러나 장태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죽음이었다. 이번에는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장태산을 걱정해주는 후배 고만석이다. 경찰보다 빠르게 도청을 통해 장태산이 집으로 올 것을 알아챈 문일석의 킬러 김선생의 짓이다. 장태산도 위험에 처했으나 형사 임승우(류수영)에게 걸려온 전화벨 소리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장태산에게는 또 하나의 누명이 씌워질 것이다.

그렇게 수진이에게 많이 가까워졌지만 디카의 행방을 알고 있는 만석이 죽었고, 그 죽음의 누명까지 덮어쓰게 될 장태산의 탈주는 더욱 무거워졌다. 다만, 부장검사를 통해 국회의원 조서희가 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결정적 심증을 갖게 된 것은 박재경(김소연)에게도, 멀게는 장태산에게도 희망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수진이는 또 다시 희망을 품고 달력날짜 하나를 지웠다. 이제 12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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