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오후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거행된 김좌진함 진수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 트위터를 통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일화를 공개했다. 참여정부 시절 자신이 한나라당 원내대표일 당시 여야가 사학법으로 교착된 정국에서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요청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한길 당시 열린우리당 대표와 셋이 만난 자리에서 이번에는 야당 손을 한 번 들어줄 것을 주문했고, 김한길 대표는 당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면서 대통령에게 분명하게 전하고 물러갔다는 것이 골자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단독회담 제안을 거절한 것을 비판함과 동시에, 대통령에게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새누리당의 미적지근한 처신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질세라 박지원 민주당 의원 역시 트위터에서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일화를 공개했다. 박 의원은 1968년 2월 초선의원이었던 민주당 김상현 의원이 면담을 청했을 때에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면담을 수용해 좋은 얘기들을 많이 나눴다며, 박근혜 대통령 역시 아버지를 본받아 김한길 대표와의 단독회담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두 사람이 언급한 사례가 반드시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열린우리당이 다수인 상황에서 개혁입법을 과단성 있게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라고 평할 수 있다. 야당에게 양보를 할 수는 있지만, 그 이전에 4대개혁입법을 그런 식으로 한꺼번에 묶어서 반대세력을 결집한 것이 오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야당의 제안을 받아 주느냐와는 별개로 적어도 야당 대표와의 면담을 수용한 상황이기 때문에 현 박근혜 대통령의 처신보다는 훨씬 의회를 존중하고 정국을 책임있게 풀어가려는 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화의 경우 냉정한 역사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는 3선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을 노리는 상황에서 야당의 반발을 최소한으로 관리하기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성품과는 상관없이 장기독재를 노리던 그가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6공화국 헌법에 의해 선출된 박근혜 대통령보다 윤리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마키아벨리즘적으로 판단했을 때, 적어도 그는 자신의 딸보다는 더 야당을 ‘관리’하는 방법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 14일자 한국일보 6면 기사
정치권 관계자들은 지금 상황이 민주당이 뾰족한 해법을 찾을 수 없는 ‘외통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청와대가 이를 즐길 때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지금 김한길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야당은 성과없는 국정조사까지 거부하고 계속 강공으로 나가는 방법 밖에 없다. 그래서야 청와대나 여권이나 이득이 없는데도 김 대표의 입지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민주당의 정치적 무능과는 별개로 청와대 역시 늪 속으로 빠져드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다른 관계자는 “세제개편안을 둘러싼 해프닝에서 봤듯 박근혜 정부가 앞으로 경제분야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다”라면서 “세제개편안에서 민주당이 취한 스탠스가 우려스럽긴 했지만 이는 야당을 방치했을 때 정권과 집권여당이 취할 수 있는 곤경을 보여주는 상황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이 아무리 우왕좌왕하더라도 의석수가 120석이 넘는 야당의 협조를 구하지 않는다면 정권과 여당 역시 원만한 국정운영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별다른 통치행위 없이 그저 대통령으로서 군림만 하고 싶을 뿐이라면 이러한 상황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누차 지적해 왔듯이 이럴 경우 대통령은 그저 아버지의 ‘가업’을 계승한 것에서 만족한 이로 후세에 평가밖에 될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역시 그럴 생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야당 전체를 적대자로 모는 그 편협한 리더십은 박지원 민주당 의원의 지적대로 아버지 박 대통령에 비해서도 모자란 부분이 있다. 박 대통령이 여야가 고착된 정국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이 상황을 넘긴다면 향후 대통령의 입지는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어마어마하긴 하지만 그 정치적 자원도 무한한 것이 아니다. 임기 초에 그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임기 중 업무의 추진 동력이 달라진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박근혜 정부는 분명 우려스러운 길을 가고 있다. 보수언론이 이러한 정도를 지적하지 못한다는 점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우려스럽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포함해서, 소위 ‘조중동’이 시키는 대로만 해서 잘 된 사례가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과거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은 조중동이 반대하거나 상상하지 못했던 길을 갔을 때에야 국민들의 지지를 새로이 이끌어낼 수 있었다. 작년 총선에서의 경제민주화의 길도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집권한 대통령이 안이한 길을 가며 고집을 부리다 ‘통나무 대통령’이 된다면 본인에게도 대한민국에게도 역사에게도 불행한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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