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제 드라마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던 신의 퀴즈. 이 드라마에서 배우 류덕환이 연기한 한진우는 참 재밌는 캐릭터였다. 변사(辯士) 같은 말투로 능청을 떨거나 때론 바보 행진 같은 짓을 해 영락없이 가벼운 놈으로 보이지만 사건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만화 같았던 것이다. 경박하게 풀려있는 나사 같은 녀석이 이따금 비범한 천재성을 드러내는 장면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로선 그야말로 목말랐던 게이지를 꽉꽉 채우는 기분이었으니까.

박재범 작가의 차기작 굿닥터 역시 신의 퀴즈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차고 넘친다. 오히려 작가의 캐릭터 메이킹 범위가 한층 포괄적으로 성장해버린 느낌이랄까. 신의 퀴즈에서 주인공 한진우에게만 집중해있었던 캐릭터의 매력이 이번 드라마 굿 닥터에서는 보다 많은 캐릭터들에게 공평히 나누어졌다.

"두 가지 옵션이 있어. 첫 번째, 사리분별 못 하는 비범한 의사. 사리분별 할 줄 아는 평범한 의사. 누굴 택할래?" 김도한(주상욱 분)이 내민 두 개의 옵션은 박시온(주원 분)을 주제로 던진 말이다. 천재성이라는 비기, 그러나 열악한 사회성.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우울한 히포크라테스, 박시온을 둘러싼 찬반양론에 꽂힌 사고로 서술된다. 분명 주인공 박시온에게 종속된 인물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각개의 세계관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재밌다.

느물대는 이기주의자 우일규(윤박 분)와 고충만(조희봉)처럼 탐욕과 권력욕에 찌든 외향적 반대파가 존재하는가 하면, 의뭉스럽기 짝이 없어 도대체 어느 파인가조차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미스터리 맨 강현태(곽도원 분)까지. 특히 강현태의 캐릭터는 극과 극을 오가며 드문드문 신경을 건드린다. 온화하게 낮은 목소리로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다가 거칠게 배트를 날려 치는 폭력적 이면에는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었으니. 하필 그의 파트너가 의학드라마 '하얀거탑'의 의뭉스러운 능구렁이 김창완이라는 사실도 참 재밌다.

하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극악의 사회성으로 일명 고문관 역할을 맡아 하고 있는 박시온의 적과 흑, 주상욱이 열연 중인 김도한 교수의 캐릭터다. 주인공을 탐탁지 않아 하며 늘상 못된 말만 내뱉는 이 캐릭터는 겉모습으로 비추어 단순한 악역으로 보이지만 그저 주인공의 걸림돌이라고 말하기엔 이 캐릭터, 너무 잘 만들어졌다. 열등한 사회성으로 극히 단순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박시온과 달리 김도한의 이미지는 그가 맺고 있는 몇 명의 캐릭터와의 관계로 인해 결정된다.

"네가 날 존경하지 않는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적어도 병원 안에서는 그런 척이라도 할 수 없냐?" 절박한 선배의 목소리 앞에서도 그저 깝죽하고 고개를 숙이며 오만을 날리다가도, 그의 몇 안 되는 아킬레스건 최우석(천호진 분) 앞에서는 그 자신이 절박한 양이 되기도 한다. 부패한 의사와 타락해가는 레지던트들 앞에서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무서운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그의 도도한 연인, 유채경(김민서 분) 앞에서는 프러포즈를 속삭이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연인을 연출하기도 한다.

덧붙여 오랫동안 자신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던, 어쩐지 신경 쓰이는 여자 차윤서(문채원 분)를 향한 미묘한 여지까지. 그저 표정 없는 목석같은 이 남자가 캐릭터 하나하나에 덧붙인 사상을 하나하나 까발려보면 이렇게 매력적이고 입체적일 수 없다. 박시온이 없는 모성이라도 끌어내 안아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애처롭다면 김도한은 절로 안기고 싶을 만큼 어른남자의 매력을 폴폴 풍긴다. 안아주고 싶은 남자, 그리고 안기고 싶은 남자.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두 남자를 대하는 태도다. 차라리 굿닥터 내의 대놓고 드러난 남녀 커플의 러브라인보다는, 그들의 삼각관계가 오히려 가슴을 설레게 한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최우석을 둘러싼 김도한 그리고 박시온의 애증은 흥미롭기 그지없는데. 신의 퀴즈에서 한진우가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것은 작가가 뿌려준 밑밥이 풍성했기 때문이지만 그것을 월척으로 낚아 올린 것은 류덕환의 연기력이었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굿닥터는 텍스트 위에 써진 매력적인 캐릭터만큼이나 배우의 표현력 또한 무척이나 이상적이다.

박시온을 아킬레스건으로 내밀어 최우석의 숨통을 끊으려 하는 병원 내의 아귀들 때문에 그는 박시온을 향한 극과 극의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토록 아끼는 최우석의 약점일 박시온이 미워서 견딜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스승의 간절한 당부와 덧붙여 그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어떻게 해서든 박시온을 지켜줄 수밖에 없다. 그 이중적인 태도가 드라마 속에서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다.

굿닥터 4회에서는 그 김도한이 처음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박시온을 인질로 잡아 병원장 최우석을 무너뜨리려는 야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도대체 왜 그토록 박시온을 아끼느냐고 그를 원망했다가도 끝끝내 최우석을 놓아버릴 수 없었다. "선생님. 저한테 약속 하나만 해주십시오. 쉽게 물러나시면 안 됩니다. 버티셔야 됩니다. 허망하게 떠나시면 저 정말로 선생님 원망할 겁니다."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취한 와중에도 결연한 의지를 내밀며 소리를 쳤다.

"아니, 제가 선생님 안 떠나게 합니다! 제가."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꼬꾸라지는 한마디. "이 김도한이. 제가." 풀썩 넘어지는 김도한의 첫 망가짐이 우습기보다는 든든했던 것은 주상욱이 표현한 이 순간의 단단한 연기력 때문이었다. 주원이 미친 디테일을 연기의 스킬처럼 사용한다면 주상욱은 뭉근한 템포로 김도한이라는 캐릭터를 자연스러우면서도 인상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결점을 가진 천재가 영웅이 되는 건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야. 난 만화의 주인공보다는 소통이 가능한 파트너를 원해." 그토록 박시온을 부정하면서도 막상 그 누구보다 그의 천재성을 신뢰하는 김도한의 태도 또한 흥미롭다. 수술실에서 두 번의 집도를 하며 자신의 판단마저 아무렇지 않게 부정하며 받아들였던 것은 바로 그가 그토록 불신하는 의사 박시온의 지시였다. 박시온을 감정 없는 로봇이라 표현하면서도 막상 그의 소명의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부패한 의사를 비난하는 것도 김도한의 새로운 이면이다. 서로를 불신하고 두려워하는 두 사람이 앞으로 펼쳐낼 인간적 교감이 기대된다. 그것은 아마도 박시온이 받아들일 첫 번째 사회성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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