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정직하게 보여주는 가장 객관적인 전달수단이라는 믿음은 믿음에서 그친다. 프레임에 담을 대상을 선정할 때부터 주관적 선택권이 개입한다. 당겨 찍을지 밀어 찍을지, 높게 올려 찍을지 낮게 내려 찍을지를 결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3차원의 움직이는 피사체를 2차원 안에 가둬 정지시키는 것 자체가 ‘있는 그대로’를 불가능하게 한다.

사진은 오히려 가장 주관적인 전달수단이다. 카메라가 어느 쪽에 서있고 어느 쪽을 향하느냐에 따라 메시지는 달라진다. 아예 뒤집어지기까지 한다. 물리력이 충돌하는 집회 현장에서 렌즈가 경찰 쪽을 향할 때와 시위대를 향할 때, 같은 프레임 안에서 선과 악은 뒤바뀐다. 사진은 ‘정치적 전달수단’의 숙명을 안고 세상에 태어났다.

사진, 주관적 전달수단이자 이미지 권력

▲ '사진 연출'을 사과한 중앙일보 7월 8일자 2면
객관적 전달수단이라는 신화와 주관적 전달수단의 현실 사이에서 사진은 권력화된다. 청문회에 출석한 증인이 내내 큰소리를 치다 잠깐 물을 마시는 모습은 초조함에 쫓기는 이미지로 재현된다. 몇 시간 동안 단 한 번 하품을 했어도 그의 전날 밤은 의심받게 된다. 김영삼 정부 초기 환경부 장관을 지낸 황산성씨는 국회연설 과정에서 치마 호주머니에 잠깐 손을 넣었다 뺀 순간이 카메라에 잡혀 (여자가) 국회를 무시했다는 비난을 샀다. 그는 곧 실각했다.

그렇기에 사진기자는 사물을 더욱 객관적으로 담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도로 위에서 성능 좋은 자동차를 모는 것과 같다. 자칫 긴장을 늦추면 과실치사상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의 본능은 질주다. 교통경찰과 과속 감시 카메라가 없으면 모범운전자도 제한속도를 조금 웃돌 만큼은 가속 페달을 밟는다. 사진기자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다양한 위반을 한다.

신문 속에 숨어 있는 일상적 연출

부동산 투기 현장은 대개 허허벌판이다. 사진은 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벌판을 가리키는 농민의 뒷모습은 기시감(데자뷰)을 일으킬 만큼 일반화된 연출이 되었다. 농민은 현장에서 섭외된다. 신상품을 소개하는 경제면 사진에는 거의 대부분 직업 모델이 등장한다. 사진기자와 취재원 양쪽의 필요가 만나서 이뤄진 적극적 합의 연출이다. 촛불집회 현장에서도 포토타임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절차가 되었다.

모든 사진 연출이 저널리즘의 규범을 위반했다고 말하는 건 옳을 수는 있으나, 타당하지는 않다. 자잘한 연출은 메시지의 전달력을 높이는 데 필요악인 경우가 많다. 이런 ‘선의’의 연출을 의도적인 조작과 한통속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이다. 길을 걷다가 발끝에 닿는 여린 생명을 피하지 못하는 것과 인종 학살 범죄를 ‘반생명’이라는 문제 설정 위에 함께 올려놓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오류다.

아사히 사진 조작, 사장·편집국장 사퇴로 마무리

1989년 일본 <아사히신문>은 1면에 ‘지구는 어떤 색깔?’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오키나와에 있는 거대한 산호초에 누군가 영어 머리글자로 낙서를 새긴 사진을 크게 물렸다. 상징적인 환경파괴 현장을 생생하게 고발한 이 기사는 오키나와의 산호초를 개발열풍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환경운동 캠페인과 맞아떨어지면서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사진의 시각적 전달 효과는 대단했다.

한 달이 뒤 문제의 낙서가 기자의 카메라로 새겨넣은 것이라는 사실이 들통났다. 아사히는 진상 조사를 거쳐 기자가 촬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낙서를 더 깊게 긁어낸 것으로 파악하고 지면을 통해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 산호초에는 처음부터 낙서가 없었던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현장기자가 새로 낙서를 새겨넣은 것이다. 결국 아사히 사장과 편집국장은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아사히와 중앙, 닮은 점-다른 점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이 사건은 결코 범해선 안 되는 사진 조작의 반(反) 전범 사례로 통한다. 그리고 이젠 사진기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더는 낯설지 않게 됐다. 중앙일보의 지난 5일치 9면 ‘미국산 쇠고기 1인분에 1700원’ 사진 덕분이다. 이웃나라에서 2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은 닮은꼴이다. 애초 설정한 메시지 목표에 눈이 멀어 취재 단계에서 가공의 ‘사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연출이 아니라 조작이다.

그러나 공통점은 현장 기자의 ‘취재윤리 위반’에서 멈춘다. 조작된 기사가 보도되려면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데스크와 국장단, 최종 교열자의 눈까지 속이거나 그들의 공모가 있어야 가능하다. 아사히의 경우, 현장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만 놓고는 다음 단계에서 조작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물론 공모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다르다. 사진에 등장한 인물은 자사 기자였다. 신문사의 업무 방식과 모든 정황에 입각해 볼 때 다음 단계에서 조작 사실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참조 : 중앙일보 사진 조작은 '조직 범죄'?)

PD수첩에 십자포화 퍼붓던 기개로

▲ 중앙일보 6월26일자 1면.
저널리즘에서 좋은 조작과 나쁜 조작은 구분될 수 없다. 다만 저널리즘의 장을 벗어나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아사히가 환경 파괴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조작이었다면 소설이나 영화 속의 반영웅(안티 히어로)적 면모를 희미하게나마 읽어낼 수 있다. 중앙일보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사진을 조작한 것이라면 어떤가. 이 소설과 영화에서도 반영웅은 존재하는가?

문제의 사진은 중앙일보가 “주저앉은 소를 광우병과 연결한 건 왜곡”이라며 <PD수첩>에 십자포화를 쏟아붓기 시작한 지 열흘도 안 돼 보도한 것이다. 또 이날 같은 장 반대 페이지에는 ‘PD수첩, 취재 원재료 제출 거부’라는 PD수첩 때리기 기사와 ‘“대통령 암살하자” 인터넷서 선동’이라는 과장 기사를 나란히 게재했다. 뻔뻔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시범이라도 보이는 듯이.

중앙일보는 9일 지면을 통해 “연출사진 게재 경위를 금명간 밝히겠다”고 했다. ‘연출’이라는 표현으로 다른 수많은 연출사진들을 욕보이지 말기 바란다. 차라리 황우석 박사처럼 ‘인위적 실수’라고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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