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소년 코난>부터 <이웃의 토토로>를 거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표뇨>까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세대를 초월해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애니메이션을 연출했다. 자국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의 부모와 자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걸작들을 통해, 그야말로 ‘믿고 보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2013년 신작은 성인 주인공 그것도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화제가 되었다. 올해 7월 20일 일본에서 개봉한 <바람이 분다>(風立ちぬ)이다.

▲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제로센 개발자 일대기를 어떻게 봐야 할까
문제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한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인 실존인물 호리코시 지로(堀越 二郞)가 2차대전 당시 일본군 주력 전투기 제로센을 개발한 수석 연구원이라는 것. 이 때문에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미야자키 감독이 극우라는 논란이 일었다. 미야자키 감독을 오랫동안 알아온 이들이 감독의 옛 작품들과 경력을 근거로 극우논란을 반박했다. 그리고 감독 본인이 지브리에서 발행되는 잡지인 <열풍>(熱風) 2013년 7월 호에 기고한 “헌법개정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는 글이 언론에 소개되었다. 이글에서 미야자키 감독은 아베 신조의 헌법 개정 시도를 비판하며 2차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사죄·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월 한국 개봉을 앞두고 지브리 스튜디오는 7월 26일 60여명의 한국기자들을 초청해 시사회를 갖고 감독 스스로 작품에 대한 논란에 대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하지만 “당시 비행기를 만들려고 생각하면 군용기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호리코시 지로가 옳다고 생각하고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잘못했다고 쉽게 단정 짓고 싶지 않았다”(요미우리)라던가 “그 시대를 열심히 살아간 사람을 그 이유만으로 단죄해도 좋은 것인지 의문을 느꼈다”(교도 통신)라는 감독의 발언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인들에게는 쉽게 납득되는 발언이 아니다. 2차대전 당시 전투기 제로센을 제작한 기업 미쓰비시가 조선인을 강제징용했던 사실 역시 영화 <바람이 분다>의 한국 개봉에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런 논란 속에서 개인적으로 <열풍>에 실린 감독 본인의 글이 궁금했는데 지브리 측에서 해당 글을 PDF로 공개하였고(링크 , 8월 20일까지만 공개) 이 글의 한국어 번역글 역시 찾아 읽게 되었다. 아베 총리의 헌법개정 시도, 헌법 제2장 9조 “전쟁의 포기” 삭제에 대한 반대와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여러 국가에 저지른 전쟁범죄에 사과 촉구는 명백했다. 이런 인식을 가진 대가가 왜 하필이면 우익 혹은 군국주의 옹호를 의심받을 만한 소재인 전투기 제로센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의문스러웠다. 미야자키 감독 스스로 자기 내부의 모순이라고 한 '전쟁은 혐오하면서도 (전쟁) 기계는 가치중립적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 더 나아가 '당대를 열심히 산 사람들까지 단죄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을 납득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헌법개정은 당치도 않은 일”란 글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미야자키 감독이 헌법과 인권을 언급하면서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전통에는 기본적인 인권의 근거가 되는 사상이 없었다는 역사학자 호리고메 요조의 말은 인용하면서 이에 대해 시바 료타로는 가마쿠라시대의 무사들이 가진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라는 생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미야자키 감독은 "이건 좀 무리가 있겠습니다"라고 평가한다.
‘언덕 위의 구름’과 청일전쟁에 관한 시선
시바 료타로(1923~1996)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에 큰 영향을 준 소설 <신센구미 혈풍록>이나 메이지 유신의 토대를 마련한 유신지사 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를 다룬 <료마가 간다> 등 주로 일본의 역사를 다룬 소설을 썼다. 특히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대해서 비판을 넘어서 증오에 가까운 시각을 갖고 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대한 악감정은 작가 스스로가 전쟁말기에 참전하여 막장 행태를 보였던 일본군을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차대전 시기를 다룬 시바 료타로의 작품은 없다. 하지만 쇼와 시대(1929~1989) 이전의 시대인 다이쇼와 메이지 중 특히 메이지 시대(1867~1912)를 일본의 이상적인 시대로 그려내었으니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NHK에서 드라마로 방영(2009~2011))된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이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으로 우뚝 서는 일본의 모습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쟁에서 각각 육군 기병과 해군으로 복무한 아키야마 형제를 통해 그려낸 <언덕 위의 구름>. 이 작품에서 시바 료타로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들은 언덕 위의 구름을 쫓아 산을 거슬러 올라가는 진취적인 이들이었다며 찬양을 아끼지 않는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는 이런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의 미덕의 정수이며 수천년간 문화적 종주국이었던 중국과 서구 열강 중 하나인 백인 국가 러시아를 물리친 것은 기적과도 같은 통쾌한 일로 이 기적을 이룬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을 거듭 찬양한다.
(원작소설 인용은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대망34(언덕위 구름)에서 했다.)
세계사상 때로는 민족이라는 것이 후세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을 연출할 때가 있는데,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에 걸친 10년 동안 일본만큼 기적을 연출한 민족도 드물다. 526p
물론 원작 소설과 드라마 속에서도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보에 따른 변명은 등장한다. 이를테면 당시는 그런 시대였다는 것이다.
인류는 수많은 불행을 겪으면서 이른바 제국주의적 전쟁을 범죄로 보기까지 진보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 당시의 가치관은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을 애국적 영광의 표현으로 보고 있었다. 268p
19세기에서 이 시대에 걸쳐, 전 세계의 국가와 지역은 타국의 식민지가 되거나 그것이 싫으면 산업을 일으키고 군사력을 키워 제국주의의 동료가 되거나, 그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후세 사람들이 환상을 품는 국가, 즉 침범 당하지도 않으며 인류의 평화만을 국시로 하는 나라야 말로 그 당시에 있었어야 할 국가였으며, 그런 환상적인 국가의 가공(架空)의 기준을 당시의 국가와 국제 사회에 대입하여 국가의 옳고 그른 모습을 정하게 되면, 역사는 점토 세공물의 점토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세계는 이미 그런 단계에 오고 말았다. 일본은 유신에 의해 자립의 길을 택한 이상, 이미 그때부터 타국(한국)에 피해를 주더라도 자국의 자립을 유지해야만 했다.
일본은 그 역사적 단계로서 조선을 고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것을 버리면 조선은 고사하고 일본 자체도 러시아에 먹히게 될 가능성이 컸다.
이 시대의 국가 자립의 본질은 그러한 것이었다. 611~612p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타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인데 그 과정을 시바 료타로는 지극히 일본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서구의 체제와 기술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여 구체제의 청나라와 일본을 얕잡아보던 러시아에 대한 통쾌한 승리 정도로 기술되고 있는데 그 과정, 특히 청일전쟁이 발발요인이 되는 한반도의 동학운동과 그 과정에서 조선정부와 일본군의 동학군 학살이나 청일전쟁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중국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일본군 병사가 자신의 일기에 남긴 동학 농민군 학살(기사 링크)은 당연히 <언덕 위의 구름> 속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시바 료타로가 청일전쟁에서 지워버린 것들
일본군이 동학군과 해당지역 양민을 학살한 사건은 조선정부 더 정확히는 민씨 정권의 관군과의 협력 하에 이뤄진 것이지만 중국 정확히는 여순을 점령하면서 일본군이 중국 양민을 학살한 사건은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대만계 일본 작가 진순신(陳舜臣)이 쓴 <청일전쟁>에는 여순에서 저질러진 일본군의 양민학살이 기술되어 있다.
요동 방면의 전투에 있어서도 적은 수의 일본군 정찰대가 청군의 공격을 받아서 퇴각한 일이 있었다. 그때 버려진 일본군의 시체에 청병이 능욕을 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여순에의 총공격 직전의 일이었다. 일본군은 복수의 일념에 불탔으며 일본군 장병은 점차 이성을 잃고 있었다.
여순을 점력하자 일본군은 청나라 군사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중국 군사가 보이면 가루로 만들려고 했고 여순 시민이 보여도 모두 살해하였다. 때문에 도로에는 시체가 가득해 행진하기에도 어려웠다. 민가에 있는 사람도 모두 죽였는데 대개의 민가에서는 세 사람에서 다섯 사람까지의 사망자를 내지 않은 집이 없었다. 그 피가 흘러 냄새가 지독했다.
이것은 병졸 쿠보다 나카무라(窪田仲臧)이 쓴 종군 일기의 한 구절이다.
여순에는 각국의 해군과 신문 기자가 있었으므로 이 대학살은 곧바로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뉴욕 월드>는 일본군이 비전투원 6만 명을 살해했다고 보도하면서 일본은 문명의 껍데기를 쓰고 야만의 뼈와 살을 가진 야수로서, 지금은 문명의 가면을 벗고 야만의 본체를 드러내었다고 논평했다.
영국의 친일적인 국제공법학자인 홀란드 박사도 여순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일본군의 만행을 엄중하게 비난했다. 708p
사료를 철저히 수집한 작가로 소문났고 스스로를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 遷)를 본받기를 원한다는 필명(司馬 遼太)을 쓴 시바 료타로지만 <언덕 위의 구름>에서는 메이지 시대의 긍정을 위해 청일,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의 긍정적인 모습만 추려내었다.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청일전쟁을 준비한 일본정부의 움직임 역시 누락되고 오직 청나라의 조선 왕실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따른 일본의 합당한 대처 정도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처의 기반에는 "세계는 이미 그런 단계에 오고 말았다. 일본은 유신에 의해 자립의 길을 택한 이상, 이미 그때부터 타국(한국)에 피해를 주더라도 자국의 자립을 유지해야만 했다"는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청일전쟁의 배경에는 일본정부 특히 당시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와 육군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 차장을 비롯한 일본 극우세력의 치밀한 주도가 있었으며 전쟁을 일으키는데 방아쇠처럼 작동한 주요 사건이 김옥균의 사망과 동학운동이었음을 여러 역사적 정황이 증언하고 있다. 진순신 역시 저서 <청일전쟁>에서 그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김옥균의 일본 망명시절 처지와 일본 정부의 핵심들이 그의 죽음을 이용하여 청나라에 대한 일본 극우들의 반청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이 자세히 적혀있다.
김옥균이 현양사 열사들의 속셈을 알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 개혁과 독립의 달성을 위해서는 현재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민씨 정권을 쓰러뜨려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김옥균은 가뭄 날 비 기다리듯 '무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정부에 접근했으나 반응은 냉정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은 김옥균을 만나려고 하지조차 않았다. 결국 김옥균은 독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현양사의 미끼에 달려들었다. 317p
겐요샤(玄洋社, 현양사)는 명성황후 시해를 비롯한 일본의 한국 국권침탈과 초기 중국 혁명을 지원한 일본의 극우단체다. 일본정부의 냉대 속에서 김옥균은 결국 일본 극우단체의 지원에 기대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 청국, 일본의 3국이 연합해서 구미 열강들의 동아시아 제패에 저항"하는 삼화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삼화주의는 맨 처음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제창되었으나 탈아시아론자가 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삼화주의는 곧 "3국의 평등한 연합이 아니고 일본이 열강의 하나로 조선과 청국에서 패권을 잡는다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김옥균은 3국의 평등한 연합이라는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처음에는 일본정부에 그 다음에는 일본 극우단체들에 의지하다가 결국에는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삼화주의를 설파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다. 그리고 김옥균의 죽음은 일본과 청의 합작품이라는 설이 도처에서 진술된다. 진순신의 <청일전쟁>에도 그 부분이 언급되어 있다.
김옥균의 암살, 적어도 그 후속 조치에 대해서는 리훙장과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 간에 합의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추측은 당시부터 강하게 떠돌았다.
이 추측이 맞는다고 해도 두 사람의 생각이 각각이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리훙장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의 강화를 노려 조선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실제로 부여 주려고 했을 것이다. 김옥균의 유해가 일본으로 송환된다고 하면, '뭐야! 청국은. 항상 조선을 '속국'이라고 하면서도 그 속국의 모반인이 자기 나라에서 살해되었는데도 그 시체를 일본으로 인도했다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라는 얘기로 권위가 떨어질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의 요청을 들어 유해를 조선으로 송환시켜야만 했다.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노우에 가오루 편이 리훙장보다 한 수 위였는지도 모른다. 각종 정보, 군사 정탐의 보고 등에서 일본의 군비가 청국을 상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시기였다.
(중략)
이미 일본은 국민 개병제를 실시하여 모든 계층에서 징병하고 있었다. 군인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데는 전 국민적인 적개심을 군사들의 배후에 집결시킨 후 그것을 터뜨리게 한다. 그러한 때 일본에 10년 가까이 망명하고 있던 김옥균이 청국에서 살해당했다. 유해를 정중히 일본으로 옮겨온다면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도 어울리지 않는다.
'놈들이 김옥균의 시체까지 빼앗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상황이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훨씬 유리했다.
김옥균은 사실상 일본에게는 짐이었다. 그래서 냉담하게 대했지 않은가? 없애버리는 것이 좋지만 일본에서 죽는다면 외교 문제상 어렵게 된다. 청국으로서는 우선 친청의 자세를 보이는 현 조선 정권의 모반인이므로 김옥균은 죽이고 싶은 인물이다. 비록 일본 정부로부터는 냉대받고 있지만 민간에서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고, '친일파'라고도 불린다. 청국으로 보면 김옥균이 언젠가 친일 내각을 만들려고 할 것이므로 곤란하다. 죽여버리는 편이 좋다.
김옥균을 죽이려는 것도, 유해를 놓고 벌이는 처치 문제도, 청일 양국은 동상이몽이었다.
408p
과연 일본 정부는 망명시절과는 달리 김옥균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추모하며 일본 극우의 청나라에 대한 분노를 북돋는다. 청일전쟁의 배경에 이미 이런 일본정부의 책략이 존재했다는 설은 진순신같은 대만계 일본 작가의 소설뿐 아니라 일본의 유명 만화가인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만화에도 주요한 소재로 다뤄졌다.
‘왕도의 개’, 지워버린 것들을 복원해내다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 1947~ )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걸작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의 작화를 맡은 애니메이터, 캐릭터디자이너,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소설가로 1989년 이후 애니메이션에서 손을 떼고 전업만화가가 되면서 주로 시대극을 그렸다. 특히 일본의 근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가감없이 그리면서 일본 극우를 강하게 비판했다. <왕도의 개>(王道の狗, 1998~2000)는 시바 료타로가 긍정적으로 서술한 메이지 시대와 청일전쟁의 어두운 일면을 가감없이 조명한다.
메이지 유신을 통한 근대화는 웅번이라고 불리는 일부 지역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타 지역은 그들이 주도하는 근대화에 끌려갔다. 타국을 식민지로 삼기 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지역이 타 지역을 식민지 삼아 가혹한 내부 착취를 진행했고 그 이익은 일부지역과 일부계층에게 돌아갔다. <왕도의 개>의 주인공 카노 슈스케는 이러한 메이지 정부에 맞서 일어난 자유민권운동에 투신한 젊은이로 결국 체포되어 홋카이도에서 강제노역을 하게 된다.
천신만고끝에 탈출에 성공한 카노는 운동의 지도자들이 빠르게 정부에 회유되는 것을 보고 좌절하고는 홋카이도에서 일본인들에게 노예취급되는 일본 내 소수민족 아이누인 편에 서게 된다. 특히 아이누인과 공존하고자 하는 무사출신 일본인 토쿠히로 마사테루에게 감화된다.
토쿠히로 마사테루 : 삿초 파벌(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 초슈번)이 실세 쥔 작금의 정부가 어진 정치를 펴지 않는다면,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해서라도 살아가야만 해.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데에 아쉬움이 없도록 함이 곧 왕도(王道)의 시작일지니."
카노 슈스케 : '맹자'로군요?
토쿠히로 마사테루 : 그래. 백성들의 삶을 편안히 하여 먹고 살 걱정도, 죽어 묻힐 걱정도 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 왕도를 걷는 정치의 시작이지. 이를 위해 지나친 벌목을 삼갈 것. 물고기 남획을 삼갈 것 등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노라고 맹자는 말했지만, 아이누 인들 같은 경우 원래부터 그런 지혜를 타고났다네. 배우기는 오히려 그동안 분명 맹자를 계속 읽어왔을 터인 우리 일본인들이 배워야 해. 맹자를 읽었으니 마땅히 왕도에 의거하여 덕으로 다스리고 인을 행하며 의를 보여야 할 것인데, 정작 일본인들 중에는 온통 덕도 없고 인의도 모르는 자들밖에 없지 않나!
1권 191~192p
아이누인들에게 일본식 이름인 화명(和名)을 강제하는 일본 관리들에게 자신의 본명을 밝히지 않고 아이누식 이름인 쿠완을 고집하는 카노는 합기유술(合氣柔術)의 달인 타케다 소가쿠에게 유술을 전수받는다. 유술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당시 홋카이도를 방문한(사실은 일본정부에 의해 유배된) 김옥균의 보디가드가 되는데, 일본인을 믿지 않는 김옥균은 카노를 아이누인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참된 사람을 관철한다는 의미의 이름인 츠라누키 마히토(貫眞人)를 지어준다.
<왕도의 개>에 등장하는 김옥균은 진순신의 <청일전쟁>에 묘사된 김옥균과 거의 동일하다. 관철시키기 힘든 이상을 품고 동분서주하면서 수시로 좌절과 희망을 오가는 풍운아. 조선, 청, 일본 삼국의 평등한 동맹을 골자로 하는 삼화주의를 주장하는 김옥균에게 한때 개화의 스승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패권만 고집하며 싸늘한 태도로 일관한다. 약육강식을 추종하는 패도(覇道)에 도취된 무쓰 무네미쓰와 일본 정부 내 강경파는 김옥균의 목숨을 청일전쟁의 방아쇠로 사용하려한다.
김옥균에게 츠라누키라는 이름을 받은 카노는 청일전쟁을 반대하는 메이지 정부의 원로 가츠 카이슈(勝海舟)의 지원을 받아 일본정부의 김옥균의 암살 방조 계획과 일본우익의 동학운동 지원을 막아내려 한다. 일본정부는 동학운동을 청과의 전쟁의 구실로 삼기 위해 현양사와 같은 우익단체를 통해 동학군에게 무기를 지원하고 조선정부 측에는 동학군을 진압하는 병력을 지원하는 양동작전을 전개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청일전쟁을 망설이다가 강경파에게 끌려가는 우유부단한 이로 그려진다)
하지만 카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쓰 무네미쓰와 일본 정부의 계획대로 김옥균은 이홍장의 방관 하에 상하이에서 암살되고 그 시신은 조선 측에 넘겨진다. 일본 내에서는 청과 조선에 대한 적개심이 만개한다. 조선으로 건너간 카노는 동학군의 지도자 전봉준을 만나 일본우익과 일본군의 게획에 대해 경고한다. 카노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불신하다가 그의 진심을 알게 된 전봉준은 카노의 망명 제안을 거절하고는 작품의 주제가 되는 질문 하나를 던진다.
"나라의 이득이나 겨레의 형편을 넘어서는 도리가 있음을 자네는 믿는가?"
4권 228p
전봉준과 동학군의 뜻과는 달리 결국 동학운동은 일본정부의 게획대로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패도를 추종하는 무쓰 무네미츠의 뜻이 이뤄진 것이다. 카노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패도의 원흉 무쓰를 직접 암살하기로 결심한다.
<왕도의 개>에 등장하는 여러 실존 인물 중 카노는 가상의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행보는 메이지 시대 일본 우익들이 주변국가로 뻗쳤던 그 계락의 손길과 많은 루트를 공유한다.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패도를 추종하던 어두운 과거를 왕도를 추종하는 가상의 인물 카노를 통해 바로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시각 앞에 군사정권에 잠식된 2차대전의 일본은 "귀태"(鬼胎)였지만 메이지 시대만큼은 긍정할 만하다는 시바 료타로의 시각은 곧 흩어질 구름처럼 허망하다. 그 귀태의 모태는 결국 메이지가 아닌가.
왕도를 아는 자라면 패도를 막도록 노력하거나 적어도 가담해선 안된다는 <왕도의 개>의 메시지 앞에 체리피킹으로 과거를 편집해 내놓는 작품은 어떤 의미와 무게를 갖는가. 당대의 한 개인을 단죄하지 않는 것과 그 개인을 분명한 역사에서 따로 떼어내어 그 개인의 역사에 대한 책임은 소거한 채 단지 아름답게만 그려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비단 타국을 침략한 제국의 역사를 가진 일본의 창작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역사와 시대를 소재로 창작하는 이들에게 자기가 속한 국가/지역/집단/씨족의 어둠을 외면하고 아름다움만을 취해 묘사하고자 하는 유혹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 유혹을 딛고 "우리"의 어둠을 똑바로 주시하는 용기를 가진 이들, "나라의 이득이나 겨레의 형편을 넘어서는 도리가 있음을" 믿고 창작하는 이들에게 국경과 세대를 개의치 않고 뜨거운 지지를 보낸다.

최원택

드라마 잡지 <드라마틱>과 장르소설 잡지 <판타스틱>의 기자를 거쳐 책 만드는 일을 하다가 곧 자유낙하가 멀지 않은 자유기고가가 되었다. 허영에 휘둘려 책장을 넘기고 마우스를 클릭하다가 깜냥을 확인하는 것도 우직하게 반복하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