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서적 같은 제목이다. 띠지 오른편에 박힌 저자의 사진도 그런 인상을 부추긴다. 이를테면 조엘 오스틴. 그렇다고 언제나 웃고 있는 스타 설교자의 얼굴과 다니엘 튜더의 훈훈한 얼굴을 비교하자는 건 아니다. 실례가 될 테니까(조엘 오스틴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평균 이상의 신앙심이 필요할 것 같다). 혹시라도 독자들이 놓칠까 주황색 폰트로 친절하게 적어놓은 띠지의 문구에 따르면, 다니엘 튜더는 옥스퍼드 출신으로 이코노미스트의 특파원이라고 한다.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는 그런 그가 바라본 한국에 대한 이야기다. 영성이나 구원 같은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뉴 오더와 스미스, 스톤 로지즈와 샬라탄스, 그리고 오아시스의 도시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다니엘 튜더가 한국과 사랑에 빠진 건 2002년 6월의 일이다. 아무도 손님을 맞을 생각을 하지 않는 울산의 한 호텔 로비에 선 채, 안정환의 결승골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관광객은 그날 이후 대한민국을 뒤덮은 마법 같은 분위기에 휩쓸리고 만다. 2002년 월드컵이라니, 너무 까마득해서 어쩐지 눈을 가늘게 떠야 할 것만 같은 이야기다. 어느덧 초등학교 4학년의 여름 방학을 맞이했을 월드컵 베이비를 키우고 있는 전국의 학부모님들께는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라고 해야겠지만. 아무려나. 매혹은 언제나 기묘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법. 짧은 축제의 경험은 한 외국인의 마음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고, 그 후로도 그는 거듭해서 한국을 찾는다. 영어 선생님으로, 증권회사 직원으로, 그리고 다시,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특파원으로.
'불가능한 나라'를 서술하는 그의 위치
그렇다고 아침 프로그램에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나와 한국에 대한 애정을 늘어놓는 외국인들의 흔한 간증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과연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이라는 전제가 붙은 저자 소개 문구에 따르면) ‘범생이’와 ‘사차원’ 중간 어디쯤에 속하는 사람”이자,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학·경제학·철학을 공부하고 맨체스터 대학에서 MBA를 취득한 엘리트답게 그의 야망은 원대하다. 경제적 차원은 물론이고 문화적, 정치적 측면에서도 이미 중요한 국가가 된 ‘오늘날’의 한국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것. “‘우아한’ 영미권 저널리스트가 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고 고백하는 그는, 박원순 시장에서 취업 준비생에 이르는 다양한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가능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한국 사회 전반을 아우르려 한다. 그리하여 그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오래된 오해를 대체할 새로운 별칭을 제시한다. ‘불가능한 나라(Korea: The Impossible Country)’, 바로 이 책의 원제다.
튜더는 먼저 박정희와 재벌의 탄생으로 1부를 시작한다.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그 수혜를 입은 재벌의 성장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설명하고,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자의 계보와 마침내 도래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며, 대북 정책을 통해 각 정권들의 특성을 논한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가 딛고 선 자리는 어디인가?
나의 입장은 영국적 맥락에서 볼 때는 다소 냉담하고 비정치적인 편이지만, 한국적 맥락에서는 보다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국에서 ‘진보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생각에 전부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19쪽)
말하자면 이런 입장이다. 한 독재자에 대해서는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본인은 개인적으로 부패하지 않았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과 도덕성으로 인해 이 시스템은 혼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다”(38쪽)라고 서술하고, 또 다른 독재자에 대해서는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은 극도로 부패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수십조 원에 달하는 부패를 저질러 자신의 배를 불렸다. 광주에서는 대학살을 자행했고 뇌물을 받는 일에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전두환은, 사람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대통령이 되었다”(66쪽)고 말하는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지나치게 북한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곤 하는 극소수의 국회의원들이 있다”(72쪽)고 논평하고, “노무현의 죽음은 형언하기 힘든 비극이었다”(124쪽)고 회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자리다. 그러니 각자의 자리에 따라 1부를 읽는 ‘한국인’들이 끄덕이고 또 발끈하는 지점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2부에서는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기적을 이루어냈지만, 여전히 스스로에게 ‘불가능한 기적’을 요구하는 경쟁의 다양한 양상을 분석한다. 교육에 대한 집착, 외모에 대한 집착, ‘신상’에 대한 집착, 체면에 대한 집착 등에서부터 거대한 산업이 되어버린 결혼시장과 비정상적인 영어 광풍 등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차례로 짚어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적했던 것들이고, 우리 모두가 삶으로 체감하고 있는 것들이다. 외국인이 비판한다고 새삼스러울 것도, 그렇다고 기분 나쁠 것도 없는 흔한 한국 사회의 풍경들.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아무리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던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사회적인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이 하는 똑같은 말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바꾸곤 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옥스퍼드 출신 이코노미스트 특파원’의 지적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마치 지금까지는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듯, 뒤통수를 감싸며 책을 읽어 내려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국 사회의 일상성을 다양한 접근으로 담아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한’과 ‘흥’을 통해 한국 영화와 대중음악, 밤문화 등을 소개하는 3부다. “다를 것 없이 소주만 마시는 깡소주는 한국에서 소주를 마시는 표준적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다. (…) 예컨대 삼겹살은 소주, 막걸리에는 전, 치킨에는 맥주가 따라온다. 치킨과 맥주의 조합은 현대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번화가에는 어디든 치킨과 맥주만 파는 가게가 하나쯤 있다. 원하는 사람은 독특한 한국식 소스인 ‘양념’을 치킨에 추가할 수 있다. 이 찰떡궁합을 한국 젊은이들은 ‘치맥’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치킨과 맥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합성한 말이다”(202쪽) 같은 서술을 보며 절로 군침을 삼키게 된다. 같은 주제를 다룬 수십, 수백 권의 책을 찾을 수 있는 1부와 2부의 내용과는 달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구태여 서술하지 않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활자로 보는 기분은 어쩐지 묘하다. “대체로 포장마차는 뽀글뽀글 파마머리의 아줌마나 할머니가 운영하기 마련이다”(203쪽) 같은 문장을 보며 웃지 않기란 힘든 일이며, “대부분의 경우 저녁 시간 내내 벌칙을 받는 사람이 다른 미팅 참가자에게 뽀뽀를 하거나 하는 식의 술 마시기 게임으로 시간을 보낸다”(161쪽) 같은 설명을 보며 옛 추억에 잠기지 않기도 쉽지 않다는 말이다. 노래방과 클럽, 나이트클럽과 ‘성인 콜라텍’ 등에 대한 짧지만 디테일한 서술 또한 인상적인데, 소주 가격이 대체로 4천 원 정도라고 밝힌 부분을 통해서는 그가 주로 출몰하는 지역을 추측할 수 있다(적어도 우리 동네에서는 놀지 않는 게 분명하다).
한편 영화를 소개하며 김기영과 하길종을 언급하고, 대중음악을 말하며 신중현과 김민기, 서태지와 홍대 인디 밴드들, 그중에서도 3호선 버터플라이를 짚고 넘어가는 부분은 한국 문화에 대한 튜더의 풍부한 지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래의 평범한 한국인보다 오히려 신뢰할 수 있는 취향을 가졌다고 해야 할까. 1980년대 음악에 대해 “포이즌이나 화이트 스네이크 같은 서양의 키치 밴드들이 소개됐고, 그 영향을 받아”(233쪽, 강조는 인용자)라고 말할 때에는 ‘매드체스터’의 기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류와 케이팝 열풍에 편승하는 정부 정책에 대한 그의 우려는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화라는 게 정부의 지원을 받고서도 여전히 쿨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국이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대중가요와 감상적인 드라마를 만드는 나라로만 알려지는 게 좋은 일일까? 필자가 중국인 스무 명에게 한국에 대해 떠오르는 것을 대보라고 했더니, 절반 이상이 “하나같이 성형수술을 받은” 가수들과 배우들의 이름을 거론했다. 한국처럼 긴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가진 나라가 그렇게 얄팍한 곳으로 비치는 것은 다소 우려스럽다. 어떤 영국인도 영국이 스파이스 걸스의 고향으로 인식되기를 원하진 않을 것 같은데, 한국 정부는 한국이 아이돌의 나라로 알려져도 괜찮은 모양이다. (252쪽)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정情의 정서와 주거문화 및 식문화를 다루는 4부와, 무속신앙과 불교, 유교, 기독교 등 한국인의 정신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준 다양한 기원을 다루는 5부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읽기엔 다소 지루한 편이다. 고등학교 때 사회과 과목을 좋아한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내용일 것이다. 6부에서는 유교적 전통과 방어적 국가주의에서 벗어나 변화하고 있는 한국의 오늘과 내일을 다문화와 동성애,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서술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다른 마지막 장. 튜더는 제법 감동적인 연설로 책을 마무리한다.
확고한 목적의식과 치열한 노력을 통해, 식민지였던 한 나라에서 출발해, 전쟁과 굶주림을 극복하고, 이제 발전되고 안정된 민주국가를 만들어낸 한국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이제 소파에 편히 앉아 한 잔의 샴페인을 맛볼 자격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역설이 있다. 수많은 과제를 극복해온 ‘불가능한 나라’ 대한민국은, 이미 손에 움켜쥔 것 너머에 있는 행복과 만족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기적을 꿈꿔보기로 하자. (450쪽, 강조는 인용자)
하지만 또 하나의 기적을 꿈꾸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 권의 책에 대한 서평을 마무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교양과목 교재로 적합한 책의 미덕과 한계
짧지 않은 책을 읽으며 다니엘 튜더가 그리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 나라를 부정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싫어서도 아니다(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또 다른 문제라고 해야겠다). 그저 별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 대한 책이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설령 아무 관심 없는 나라에 대한 책이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낯선 것을 알아가는 기쁨이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책이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니엘 튜더는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맨체스터 대학의 2학점짜리 교양과목 ‘한국 문화의 이해’(라는 게 있다면 말이지만)의 교재로 쓰일만한 책을 썼다. 훌륭한 일이다. 영어권의 친구(그런 친구가 있다면 말이지만)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된다면 사정은 다르다. 역자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를 읽는 것은 일차적으로 한국인인 독자에게 신선한 자기객관화의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인인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는 그의 시야와 통찰은 실로 놀랍다”(453쪽)고 쓰고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튜더의 미덕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지식과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이지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는 시야와 통찰’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3부에서 그런 것처럼 예상 밖의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성실하고 충실한 소개에 그친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다시 한 번 소개하는 일은 새삼스럽다. 물론 그것이 ‘옥스퍼드 출신 이코노미스트 특파원’ 다니엘 튜더의 잘못은 아니다.

금정연

이런저런 매체에 책에 관한 글(90%)과 책에 관한 글이 아닌 글(10%)을 납품하는 소규모 자영업자이자 LG 트윈스 팬. 지은 책으로 <서서비행>이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