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라는 공간은 인간이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약육강식의 법칙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자연계의 축소판이다. 누군가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열심히 도망쳐야 하고, 둥지 안의 새끼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선 열심히 사냥을 해야 한다. 숲에선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 장대하게 펼쳐진다.
자연계가 먹느냐 먹히느냐의 이분법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에픽: 숲속의 전설>의 세계관은 산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담고 있다. 숲의 생명력을 관장하는 타라 여왕이 선의 영역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맨드레이크가 있다. 맨드레이크의 손길이 닿는 곳에는 푸르른 숲의 생명이 꺼져가는 반면에 티라의 손길이 닿는 곳에는 꺼져가던 생명도 다시금 생기 있게 되살아난다.
타라와 맨드레이크가 대립하는 숲에서 인간은 사실 선와 악 그 어느 영역에도 개입하지 않는 ‘타자’다. 거대한 타인에 불과하던 인간 소녀 엠케이가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요정의 크기만큼 작아진다는 건, 엠케이가 다시 인간의 크기만큼 커지기 전까지는 숲 속에서 선의 영역과 악의 영역 가운데 택일해야 하는 상황과 맞닿는 걸 의미한다.
덩치가 인간의 크기였을 때에는 숲의 세계관과는 아무 상관없는 거대한 타자에 불과하겠지만, 몸의 크기가 작아짐으로 말미암아 엠케이는 어쩔 수 없이 숲 속 피조물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에 휘말리게 되면서 동시에 숲의 여왕인 타라가 꿈꾸던 숲 속 공동체의 재건에 개입하게 된다.
<에픽: 숲속의 전설>은 <공주와 개구리>와 맥락을 같이 하기도 한다. 두 애니메이션의 공통분모는 ‘피부색’이다. 타라와 <공주와 개구리> 속 티아나의 피부색은 기존 애니메이션에서 권력을 가진 여주인공의 피부색이 백인의 흰색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한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를 각성하게 만드는 모피어스의 피부색이 유색인 것처럼 <에픽: 숲속의 전설>에서 숲의 여왕이 유색인종이라는 설정은 <공주와 개구리>에 이어 유색인종이 권력자로 작동하는 서사 구조를 이어가고 있다.
기존 애니메이션에서는 백인이면 백인, 유색인종이면 유색인종의 인종적인 프리즘이 한 가지로 작동한다. <뮬란>이나 <공주와 개구리>에서 백인은 서사의 주인공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디즈니의 대다수 애니메이션에서는 유색인종이 서사의 주요한 인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에픽: 숲속의 전설>은 기존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던 피부색이라는 문법과는 조금은 다른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에픽: 숲속의 전설>에서는 유색인종과 백인이 공존한다. 비록 백인인 엠케이가 주인공이고, 유색인종 캐릭터인 타라 여왕의 역할이 작다 하더라도 엄연히 그녀는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캐릭터다. 백인이 주인공이지만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는 건 유색인종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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