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편지 형식으로 자주 글을 써왔던 터라, 뭐 좀 색다른 형식이 있을까 고민했네. 허허, 별 수가 없구먼. 하긴 편지가 얼마나 괜찮은 매체인가? 최근 김응교가 쓴 <시인 신동엽>이라는 책을 봤네. 시인이 자기 애인에게 쓴 편지, 그게 모두 나중에 시가 되더구먼. 어찌 그런 공력을 쫒을 수 있겠나만, 그래도 마음 둔 사람에게 쓰는 각별한 글이라고 받아 봐줬으면 좋겠구먼.

7월 4일 촛불집회 끝나고 그 근처 술자리였었지? 경상도 사투리로 말해 뭐랄까 좀 ‘포시럽게’ 생긴 한 놈(?)이 있는데, 딱 보니까 기자 같더라고. 근데 왜 그렇지. 기자 그러면 별로 가깝게 다가가고 싶지 않아. 재미없어 보여. 기자들이 나 같은 교수를 봐도 뭐 그런 거겠지? 그렇게 미적거리다가, 역시 술김에 내가 다가갔던 것 같아. 어쩌고저쩌고. 그리고 자넨 내게 물었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는데, 누구시더라?

▲ 미디어스 화면캡쳐.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도 김 기자를 TV에서 처음, 총리의 ‘대국민’ 담화발표 기자회견 때 딱 한번 밖에 못 봤네. 하도 인터넷에서 ‘김연세, 김연세’ 열호해서 뒤늦게 동영상으로 찾아봤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 처음 보는 얼굴이더군. ‘제법인데, 누구야?’ 싶더군. 아무 것도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작심했나? 아니면 덤터기를 썼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 커밍아웃? 양심선언?

그러고는 솔직히 잊어 버렸어. 5월, 6월, 그리고 7월 우리 모두 너무 바빴잖은가? 나도 그래. 촛불에 홀라당 타고, 광장에서 소실되는 느낌이었어. 그 사이에 김 기자는 <코리아타임스> 스포츠부로 발령 났고, 그에 항의해 사직서를 제출해버렸더군. 지난 7월 1일의 일이었나?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내린 1개월 출입정지 결정이 풀리고, 그래서 원래처럼 청와대를 출입하고 있다가 벌어진 일이라 당황스럽던가?

<미디어스> 안영춘 기자와의 취중 대화를 읽어보았네. 역시 술이 빠지지 않는구먼. 젊은 시절 미국 유학을 꿈꾸던 7년차 범생이 기자로 소개되고 있더군. 9.11때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청와대를 출입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고, 결국은 대통령이 기쁘게 웃으며 쇠고기 협상 타결 소식을 전하는 그 간담회의 어처구니없는 풍경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기자로서 심한 자괴감이 들었다고 적혀 있더군. “담화문 발표장으로 가면서 그는 결심을 굳혔다. 자로 그은 듯한 삶의 궤적이 꺾이는, 생의 첫 스타카토가 될 거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손을 들었다. 마이크가 넘어왔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말로 옮겼다. 그 순간 그는 기자였다.” 안영춘 기자는 이런 명문으로 당시의 정황, 자네의 심경을 표현하고 있더군.

솔직히 잘 모르겠네. 그 순간 김 기자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또 이후 어떤 일들이 주변에서 벌어졌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도리가 없네. 동료 혹은 선배 기자들과는 훨씬 깊은 이야기를 나누겠지만, 그 날의 그 짧은 술자리 이야기로 난 김 기자의 생활과 생각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네. 가까이 지내다 보면 천천히 좀 더 잘 알게 되겠지. 어떤가, 우리 한번 깊이 사귀어 볼 텐가?

그렇다면 다음 말에 귀 기울여 주길 바라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자넨 아직 멀었어. 그 정도의 서비스로 한국사회에서 저널리스트로서의 복무를 다할 셈이었나? 대체 권력이자 권력에 속한 기자로서 그런 ‘한건’ 정도 사고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물론 김 기자의 용기는 칭찬하는 바이네.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네. 고맙네. 그렇지만 그걸로 다될 수는 없다는 것일세. 할 일이 아직 한참 남아있다는 것이지.

▲ 김연세 <코리아 타임스> 기자
기자와 저널리스트를 좀 확실하게 구별토록 하세. 권력이 주는 메시지를 넙죽 넙죽 받아먹고, 그냥 그 이야기를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나불대기 바쁜 그런 기자 질이야 대체 누가 못하겠나? 기자와 리포터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도 없어 보이네. 진실을 추적하고, 권력과 교전하는, 저널리스트야말로 이와는 전혀 다른 별종이지. 래디컬한 사회적 존재, 진정한 언론인이지.

푸코가 말하는, 진실의 용기를 지닌 자야. 파르헤시아스트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지. 두려움 없는 발언의 권리, 자유언론의 의무를 행사하는 역능적 주체지. 파르헤시아스트는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며, 그의 담론은 바로 지금 현재의 특수한 상황에 준거하지. 그가 속한 곳은 다름 아닌 대중의 광장이고. 그는 바로 그 광장에서의 공적 발언으로 말미암아 가능할 수도 있는 단절의 극단적 긴장을 겪게 되지.

이제 알겠나? 김연세가 바로 그 파르헤시아스트로서 나선 걸세. 권력(의 의사)에 반해, 솔직하게, 비판함으로써, 위험을 감수하는, 의무를 감수한 거지. 자네 개인의 결단인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선택이야.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루소가 말한, “일치에 가담하기를 거절하는 단 한 사람, 그 일치에 불리한 단 한 사건, 그 일치를 방해하는 뜻밖의 단 한 가지 정황”으로서 신자유주의 자본국가의 선전적 일체를 수포로 만들어버린 거야.

국가/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진장 분통터질 일이지. 게임의 규칙을 깨버린, 정말로 싸가지 없는 놈일 거야. 그래서 왕따가 된 걸세. 권력으로부터 징계·퇴출된 거야. 간단해. 냉정한 거야. 권력은 권력에 확실하게 귀의하고, 그 명령에 착실하게 순종하는 것들만 품는 법이네. 우리와 그들, 내외를 철저하게 구분하지. 배신자 김연세도 권력 안전망으로부터 서둘러 제거된 것일세. 결국 먼저 사직서를 낸 것이지. 삶은 갑작스레 불안해지고.

참 많이 미안하네. 그러나 ‘사직’이라고 했나? 우리 말조심하도록 하세. 다니던 직장은 때려치울 수 있지만, 권력에 의해 쫓겨날 수는 있지만, 저널리스트의 사직(辭職)은 절대 안 되네. 이 정도 일로 민주주의, 사회진보의 위임된 직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나? 역사는 자네를 자유언론/언론자유의 할 일로부터 아직 해방시켜주지 않았네. 권력에서도 분명 멀어졌지만, 김연세가 낙타처럼 걸어야 할 사막의 길도 한참 머네.

그렇다네. 그래서 제대로 사자의 일성을 날리는 거지. 권력을 두려움에 오싹 떨게 하는 거지. 아무나 다 하는 기자 질을 관두고 멋진, 그러나 외롭고 힘든 저널리스트가 되는 걸세. 저널리즘의 길에 나서는 것일세. 자기 이름으로, 자기 언어로써, 권력과 쟁투하고, 진실을 후벼 파며, 그래서 대중과 동거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그런 솜씨 뛰어난 저널리스트로 만나고 싶네. 그렇게 사회에 봉사하고 역사에 기여하기 전에, ‘사직’은 터무니없는 짓이네.

현장에 언제 복귀할 건가? 준비는 잘 되어 가는가? 서두르게. 선수들과 더불어, 대중과 함께, 신화를 걷어치우고 선전을 타파하는 힘겨운 싸움이 한참 남았네. 역사를 거꾸로 빗질하는 변태로서 토론의 거리, 언론의 광장에 함께 하세. 그 진한 수고의 시간을 다하다보면, 기분 좋게 인사동이나 광화문에서 어울릴 기회가 오지 않겠나. 힘들 때면 옆에서 열심히 응원하실 부인과 예쁜 아이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웃의 동지동무들을 돌아보세. 나도 있네.

지금처럼 '비평의 무기'를 예리하게 연마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까?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 결을 거스른 감수성의 대패질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한 저널리스트로의 변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이 나의 상대다. 가끔 참패당하고 때로는 붙잡고 버티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왼손펀치 한방을 가진 선수로 남고 싶다. 인민은 착하고 또 무섭다. 이들과 함께하는 비평 말고 그 어떤 것이 후기근대, 후기자본의 불모지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목청 낮춘 채 예의주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삶, 이들의 언어에 스며들어 비평의 유격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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