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다층적인 책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질적 수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순한 밀도, 즉 양으로 무리 없이 달성되기도 한다. 예컨대 중세의 기이한 풍습을 다루면서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지리학을 동원하는 문화사 책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은 분과 간 경계를 넘나들고, 내용은 이질적인 것을 가로지르며, 주제는 반복적으로 변주된다. 고전 의 깊이와 폭은 갖추고 있지 않아도 읽을 때마다 인상이 달라지고 초점은 변경된다. 얼마 전 읽은 <호러국가 일본>(다카하시 도시오, 김재원, 정수윤, 최혜수 역, 도서출판 b, 2012)은 그런 책이었다.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며 책이 가진 다른 층위를 발견하는 일은 즐거웠다.

<호러국가 일본>은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서 개설된 ‘호러론’ 강의의 2007년 버전을 활자화한 것이다. 교양강좌이면서 입문용 강의여서 내용이 어렵지 않다. 호러 문학이라는 서브컬처를 다루지만 작품들을 나열하고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강의는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상호작용을 묘사하며 호러문학에 대한 총체적인 시야를 지니게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진행하는 강사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며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학이론은 가시적이지 않다. 요컨대 호러소설에 약간의 흥미만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손에 들어 볼만한 책이다. 난해한 부분들을 괄호 쳐 놓는다면 가볍게 책장이 넘어가고, 재밌었다고 기지개를 펼만하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한 대상들을 겹쳐 읽는 순간 전체의 함의가 확장하는 교차점으로 책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다층적인 성격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저자의 논의는 간단하다. 92년 사회주의권 붕괴를 기점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어 있던 세계는 하나의 체제, 외부 없는 내부로 변질된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소할 대안이 사라지자,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하지만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해결불가능성에 기초한 내부붕괴의 경험’이 누적된다. 93년부터 시작된 일본 호러 문학의 전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반영이며 내부붕괴의 징후를 반복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이것이 기본적인 뼈대다.
책이 복잡해지는 것은 뼈대를 둘러싼 요소들 때문이다. 호러문학을 논하기 위해 도입된 새로운 개념들, 호러 소설사(史)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구성방식, 세계가 문학으로 변용되어 나타나는 형태, 바흐친과 카이저를 경유하여 ’호러‘의 이론적 함의를 탐구하고 기술하는 장, 개별 작품에 대한 소개와 분석, 시대와 대결하는 문학의 실천을 환기하는 발언들. 요컨대, 깊이를 강요하지 않지만 양적인 풍성함으로 서로를 가로지르고 중첩되면서 복수적 층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집어든 독자들은 1) 단순한 흥밋거리로 2) 호러 소설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할 목적으로 3) ‘호러’ 또는 ‘호러적인 것’ 에 대한 이론적인 관심 때문에 4) 문학정전의 독해 방식을 적용한 호러소설 읽기 방법이 궁금해서 5) 호러소설에 대한 총체적인 시야를 얻을 목적으로 6) 책이 제시하는 해방감의 실체를 탐색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반복해 읽으면서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나의 경우 1), 2), 3), 6) 정도였던 것 같다)
모든 읽기는 나름의 효용을 가지고 있다. 1)과 2)의 경우는 호러 문학의 계보를 추적하고 윤곽을 그려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3)의 경우 호러 또는 그로테스크한 것을 다룬 걸출한 두 권의 책을 만날 수 있으며 4)와 5)에서는 호러물이 현실을 반영하며 작동하는 리얼리즘적 전망을 확인하고 호러소설의 기법을 새롭게 인식할 기회를 제공한다. 6)은 이론적 관심과 더불어 해방감을 예시하는 작품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어느 것이든 각각의 읽기는 자신에게 합당한 주제들을 드러내며 중첩되고 교차된다. 독서는 그렇게 풍성해지는 것이다.
호러적인 것이 보여주는 삶의 가능성
격언에 따르면, 텍스트를 읽는 가장 좋은 독법은 가장 높은 위치에서 읽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각각의 읽기는 책과 조우할 독자들에게 맡기고, 높은 위치에서(물론 가장 높은 위치는 아니지만) 이 책의 함의와 한계를 읽어보자. 외견상 호러문학에 대한 개론서에 해당하는 <호러국가 일본>은 곳곳에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발언이 등장하는데, 가령 “호러적인 것이 우리를 막다른 길로 데려가기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우리 삶에 대한 근본적인 거절이며, 이제까지 관계에 대한 파멸적인 거부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삶을 향한 목숨을 건 도약, 파괴를 통한 재생이다. (p15)” 같은 발언을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호러문학을 현실의 수동적 반영이 아닌 능동적 삶의 방식으로 발언하는 이면에는 무엇이 전제되어 있을까? 다르게 질문한다면, 왜 이 책은 호러의 능동적 측면을 이론적으로 제시할 수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책의 함의와 한계는 여기서 드러날 것이다.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가 필요하다. 다카하시 도시오의 논의에 따라 우리는 호러문학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호러문학 발생 과정을 복기해보자. ‘1)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세계는 해결가능성(외부)을 상실한 내부로 변질되었다. 2) 모순이 축적됨에 따라 해결불가능성에 의한 내적 붕괴의 경험이 누적된다. 3) 내적붕괴의 경험이 일상화되자 이를 낯설게 하고, 극단화시킨 호러문학이 출현한다.’ 이 과정에는 빠진 고리가 있다. 즉 2)에서 3)으로의 이행을 담당할 주체의 실천이 생략되어 있다. 다시 말해 내적붕괴의 현실을 형상화한 ‘호러문학’의 탄생은 ‘호러문학’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런데 호러현실에서 호러문학으로 이행하도록 주체의 실천을 유도하는 기제는 무엇인가? 저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피투성이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인다.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서술을 모으면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① 현실의 문제를 접하면서 산출되는 세계 극복의 욕망
② 현 세계를 파괴하려는 욕망
③ 파괴(내적붕괴)를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욕망
편의상 욕망으로 지칭하고 구분해 놓았지만,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 ①/②/③은 현실에 의해 촉발된 동시적인 감응에 가깝다. 각각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가 작동되면 나머지가 동시적으로 활성화되는 메커니즘을 이룬다. 이를 적용한다면 호러문학의 발생은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다. ‘1) 내적 붕괴의 현실과 경험의 누적 2) 누적된 경험을 통해 구성원 사이에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이 공통적으로 형성.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 ①) 3)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에 의한 문학적 실천으로서 호러문학 발생.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 ②,③)‘ 과정을 이렇게 요약하면 왜 저자가 호러를 삶의 양태이자 실천양식으로 파악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파괴와 살육이 반복되는 호러소설을 쓰고/읽는 행위는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 ②‘의 발현이지만, 동시에 현 세계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윤리적 실천(③)이면서, 폐색된 현 세계를 넘으려는 욕망의 충족, 즉 ’자유와 해방‘(①)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테마는 책 전체에 걸쳐 반복되며 나타난다. 호러는 해방이자 자유다(p28~34), 시대와 불화하는 피투성이 상상력(p64~65), 근대의 지식체계를 무력화하는 절대 타자로서의 호러(p92~94, p107~115), 호러적 파멸의 자기 윤리(p138~140), 은폐의 총력전에 저항하는 실천으로서의 호러(p171~175). 요컨대, 이 책은 호러를 경유한 혁명론이다. 그리고 저자 다카하시 도시오는 혁명가로 나타난다.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은 그의 무기이며 호러문학은 혁명의 동지들을 집합시킬 각성의 망치다. 목표는 내부로 변질되어 폭주하는 자본주의이며, 붕괴는 지식체계를 마비시키며 저항할 수 없이 진행된다. 혁명에 동참한 대중은 피를 뒤집어 쓴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의 살인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게 아니라면 좀비로 나타나든가 코뿔소일 수도 있겠지만.
'호러문학 혁명론'의 내재적 문제
세계 변용 또는 극복의 전망을 호러와 접목시킨 새로운 혁명론은 여러 측면에서 논의 가능하겠지만, 나는 내재적 문제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 호러한 혁명론의 한계 중 하나는 호러적인 것을 통해 구체화 될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을 자동적으로 가정한다는 점에 있다. 즉 저자 다카하시 도시오는 폐색된 세계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을 가지게 된다고 전제하고 있는데, 해결 불가능한 내부 세계를 마주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세계 전복의 열망을 품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부정적 시스템 내에서는 부정적 시스템에 저항하는 사람만큼 시스템을 옹호하고 보호하며 기생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는 부정적 세계에 대한 혁명으로 흘러넘쳐야 한다. 그러나 폐색된 세계가 본격화 된 2000년대가 1960년대에 비해 혁명의 목소리가 낮고 실천이 부진한 시대인 까닭은 무엇인가? 만약 스플래터 이매지네이션이 보편성을 담보할 수 없다면, 호러문학의 혁명적 가능성도 축소될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 호러문학은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을 촉구하는 혁명의 가능성으로 읽히겠지만, 그런 사람의 숫자만큼 다른 사람에게는 킬링타임용 소설일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러문학을 반드시 ‘시대의 증거이자 극복’의 문학양식으로 ‘읽어야 한다’면 기계적인 혁명 문학론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회귀하게 된다. 그러나 (혁명 문학론의 현실적인 가능성을 떠나) 이는 호러문학이 가진 혁명성을 제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호러가 위력적인 것은 근대의 지식체계를 거부하는 절대적 타자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리얼리즘이라는 계몽의 기획 안에 포섭시킨다면 호러는 지식에 의해 재단될 것이고, 이해되고 설명되어 실천방식으로 기능하는 역할 외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새로운 삶을 향한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하는 혁명의 도구로는 실격이다. 저자 자신이 적극 반대하는 개혁의 도구로 유용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호러의 능동적 측면을 이론적으로 제시할 수 없었던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책에 제시된 혁명론은 아직 가설적인 수준이며, 보완을 필요로 한다. ‘호러론’ 뒤에 연결되어 진행되는 ‘괴물론’을 접할 수 없는 상태여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런 점을 한계로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러국가 일본>은 재미있다. 노학자의 탐구가 집약된(?) 강의를 지칭하기엔 무엄한 면이 없지 않지만, 호러 문학을 엮어가며 시대와 주체를 탐구해가는 강의록은 생각 없이 읽어나가도 재미있고, 좀 더 깊은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도, 새로운 것을 탐색하는 지침서로도 좋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깊이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양적인 풍부함으로 다채로운 독서를 담보하는 이 책은 여러 가지 이유로 권할 만하다. 다만 한 가지. 혹시 이 책에 제시된 ‘호러를 통한 혁명의 전망’에 매료되어 SNS에서나 술자리에서 떠들지 말 것.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 없는 혁명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하여 헛소리라고 욕먹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말이다.
고덕영
2006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용돈이 궁한 탓에 한 번 사면 오래 읽을 수 있는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사서 뒤적거리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그런 책들을 오독하다 보니 ‘인문 딜레당트’로 ‘전락’하여 이런 저런 책을 뒤적뒤적하며 나락에 빠진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로 인문 쪽 책을 건너다닌다. 한 아이의 아빠이자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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