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과 작품의 특성상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 글은 내용의 직접적인 언급을 최대한 배제한 일반론이며, 작품 내적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스포일링을 포함해 다룰 예정이다.)

▲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극장판 포스터 (애니플러스)

"진지하다. 궁서체다."

극우단체의 플래카드나 선전물 등을 보면 한가지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글에 사용되는 글꼴(font)가 늘 고딕체나 궁서체 등인 것이다. 이런 경향은 단순히 취향의 오래됨을 넘어서, '우리의 진지한 의지를 가벼워 보이는 모양새에 담을 수 없다'는 믿음에 기인할 터이다. 또 비슷한 맥락에서 올 초에는 대선 재검표 청원집회에서 북한에서 자주 쓰는 글꼴인 광명체가 사용되었다며,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이 크게 목소리를 올린 일도 있었다.

이런 경직된 신앙은 극우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딱히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예컨대 작년 '통합진보당 아메리카노 논쟁'도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의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

말하자면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인 기호에 고유한 의미가 있다는 믿음이다(아메리카노라는 입맛의 취향도 일종의 기호다). 일찍이 소쉬르가 기호는 '자의적'이라고 즉 특정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기호에 대한 이런 신앙은 여전하다. 심지어 글꼴의 경우는 더 낮은 수준의 기호, 즉 그 자체로 언어의 도구인 문자를 다시 전달하기 위한 '도구의 도구'인데도 말이다.

'진지하다. 궁서체다'라는 유행어가 유머로서 역설을 드러내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진지하다고 강조하면 할수록, 오히려 궁서체는 희화화되며 진지함과 고유한 관계가 없음을 드러낸다. 궁서체는 관습적으로 딱딱하고 경건함을 의미해 왔었기에, 오히려 더 강한 반작용을 일으키며 유머가 된다.

▲ 주인공 '카나메 마도카' (애니플러스)

'마법소녀'란 기호의 의미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이하 '마마마')가 에반게리온 이후 일본 TV애니메이션 최고의 작품으로 언급되는 것은, 마법소녀라는 익숙한 기호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동시에 동시에 그 기호의 관습적 의미를 철저하게 비틀어 배반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뛰어난 작품들이 모두 그러했던 것처럼, 비틀기를 통해 새롭게 나타난 마법소녀라는 기호의 새로운 의미는 시대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법소녀'라는 '글꼴'에 어떤 관습적인 의미가 있었는지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위문화와 무관한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10세 안팎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동경하고 즐겨보는 판타지이며, 좀더 최근 경향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른바 미소녀 캐릭터를 잔뜩 등장시킬 수 있는 '모에(특정 대상이나 매력 포인트에 집착하고 열광하는 것, 이 경우 마법소녀에 '모에'한다)'의 덩어리라고.

비단 마법소녀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위에서 언급한 마법소녀의 오래된 의미는 90년대 이전의 애니메이션의 경향에 근거한다. 이른바 권선징악의 이야기, 마법소녀의 경우는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거나 악의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였다. 이 경우 마법소녀는 동화책과 한 맥락에서 소녀들의 판타지 취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의 마법소녀 장르에는 성인남성이 점차 수요층으로 대두하게 된다. 예컨대 국내에도 유명한 '세일러문'이나 '카드캡터 체리' 등은 그 경계선에 위치하는 작품들이다. 원작자도 여성이고 분류상 순정만화지만, 오히려 남성팬에게 크게 어필할 요소를 갖췄기 때문에 그들을 마법소녀 장르로 크게 끌어들인 것이다. 앞에서 마법소녀의 모에를 이야기한 것은 이런 흐름에서의 마법소녀다. 2000년대 이후의 작품들 중에는, 정통적인 마법소녀를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 주인공들을 마법소녀로 만들어 주는 큐트한 마스코트 '큐베' (애니플러스)

새로운 마법소녀? 마법소녀의 새로움!

어느 쪽이 되었든, 마법소녀물이라는 장르는 수십 년 이상의 역사를 쌓아왔고 나름의 문법과 규칙이 있다. 처음 접하는 작품을 백지상태에서 선택할 때, 주어진 정보의 하나로 장르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감독에 대한 기대, 배우에 대한 기대, 시놉시스에 대한 기대 등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장르에 대한 기대를 뒤집으면 이런 결론도 가능하다. 즉 마법소녀물에 대해 '어린 여자애나 보는 것' 또는 '오타쿠가 하악하악대며 보는 것'이라는 편견 아니 상식이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수요 흐름이 역으로 수요자를 한정 짓고, 작품에 대한 천시와 무시를 낳는 것이다. 물론 마법소녀물의 역사적 흐름이 대개 그래왔기 때문에, 이런 인식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마마'는 그러한 장르적 한계를 오히려 추진력으로 이용하는, 비범한 시도에 성공한 작품이다. 장르적 색채를 흐리게 해 다른 수요층을 조금이라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시작부터 적극적으로 마법소녀물임을 강조한 것이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살행위였다.

사실 '마마마'의 스토리는 많은 고전을 차용하고 있으며, 순수하게 독창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평이한 면도 있다. 그런데 정작 감상 중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인 전개로 강한 임팩트를 끊임없이 준다. 마법소녀물의 장르적 특징이 이야기의 힘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마법소녀물의 클리셰들 예컨대 기적, 마법아이템, 마스코트, 악의세력 등이 의미를 부여받으며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기대되는 영역이 전혀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아니 효과가 새롭게 생겨난다.

요컨대 '마마마'는 마법소녀물이라는 장르 자체, 즉 작품이 속하는 상위 개념을 이야기의 장치로 만들어버린 작품이다. 이렇게 장르와 작품의 상하구조를 비틀어 버렸기 때문에, 이 작품을 과연 마법소녀물이라고 분류해야 할 것인가 자체도 문제가 된다. 마법소녀물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성립 가능하지만, 작품의 내용은 마법소녀물이라고 규정되는 것, 기대되는 것과 전혀 다르다.

▲ 인기 넘버 원 '아케미 호무라' 호무호무! (애니플러스)

전복의 가능성

이 점에서 '마마마'에 대한 기대, 마법소녀의 두 가지 의미는 각각 배반된다. 어린 소녀가 기대하는 판타지로서의 기능은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달려간다. 이런 첫 번째 의미에서 완전한 배반이다. 반면 성인 오타쿠들이 기대한 모에의 덩어리에 대한 기대는 충족하고 있다. 문제는 모에를 가지고 그려진 그림이 예상과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두 번째 배반이 일어난다.

뛰어난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 시대를 깊게 각인하고 있는 작품이다. 말하자면 감상자에게, '맞아, 이 세상은 이렇지'라고 자기도 모르게 납득시키는 작품이다. '마마마'의 두 번째 배반은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귀엽고 발랄한 기호로' 잔혹한 현실을 사정없이 그려낸다. 사용되는 기호가 내용과 워낙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효과는 더욱 강조된다.

'마마마'는 하위문화가 자신이 갖춘 재료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 가능성을 한 차원 더 열어젖힌 작품이다. 즉 기호의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음을, 나아가 뻔해 보이고 예상이 쉬울수록, 즉 타성에 젖어 있는 것일수록 그 배반 효과를 통한 기호의 힘이 극대화됨을 보여준다. '전복(顚覆)'의 가능성은 가장 그럴듯하지 않아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다. 진지함을 강조하는 궁서체가 더 큰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 조은상 하위문화평론가
'잉여'나 '덕후'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왔다. 감격스러운 일이다. 주류 언론에게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던 이들이 이제는 하나의 유의미한 집단으로 부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시선은 잉여/덕후의 정치적 가능성, 사회경제적 위치 등에만 쏠려있을 뿐, 정작 그들의 정체성과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 하위문화(sub-culture)에는 무관심하다.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등을 비롯해 하위문화는 지금 경계선에 서 있다. 수적으로는 이미 다수의 위치를 넘보고 있지만, 사회적 위상은 여전히 바닥에 있다. 물론 인간이 그러한 것처럼, 문화에도 왕후장상에 씨는 따로 없다고 필자는 믿는다.

이 연재에서는 주류언론에서 거의 다루지 않으나 유의미한 향유집단을 가지고 있는 하위문화 콘텐츠 등을 소개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편파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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