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언어』는 올해 4월에 출간된 『금융자본주의의 폭력』(심성보 옮김, 갈무리, 2013)에 이어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되는 크리스티안 마라찌의 책이다(원서의 출간 순서는 그 반대다). 두 책 모두 금융화, 금융위기에 대한 해석이지만,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처럼 앞서 소개된 책보다 좀 더 근본적인 논의를 다룬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포스트포드주의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사회적 노동의 성격, 그리고 이른바 신경제에서 나타나는 금융화이다. 저자는 흔히 분리된 것으로 사고되는 이 두 가지의 관계, 즉 노동과 금융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노동의 변화가 어떻게 금융화와 연계되는지, 그것이 만들어내는 양상은 어떤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열쇳말이다.

먼저 포스트포드주의에서 변화하는 노동의 성격을 살펴보자. 포드주의 노동이 개념과 실행이 분리된, 기계의 리듬에 포섭된 성격을 지녔다면,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에서는 언어와 소통이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언어, 소통적 관계가 중심이 된다는 말은 이 새로운 노동이 기계로부터의 포섭에서 벗어나 자율적 국면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과 생산의 접속이 기계에 제한되지 않고 사람들 간의 언어적 협력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 중심성, 그리고 그것이 낳은 자율적 국면은 노동시간의 측정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노동을 공장의 벽을 넘어 도시 전체로 확장시킨다. 그러니까 우리는 총체화된 노동의 시공간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노동과 노동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언어적 공동체의 모든 삶이 노동하도록 강제된다.”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 노동의 공간과 비노동의 공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이러한 상황은 삶 전체가 생산과정에 포섭되는 새로운 국면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노동의 새로운 시공간에 대한 논의이기도 하다.

노동의 새로운 시공간 속에서 일반지성의 의미는 확대된다. 저자는 일반지성에 대한 맑스의 시각이 옳지만 제한적이라고 말한다. 일반지성과 지식의 생산력이 기계에 뿐만 아니라 언어적 소통과 협력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두뇌, 언어적 재능, 상호작용적인 기술이 고정자본을 대체한다. 일반지성은 산 노동에, 우리의 신체에 각인된다. 이것은 서문을 쓴 마이클 하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 산 노동의 점증하는 자율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잠재력이지만, 반대로 ‘모든 삶이 노동하도록 강제’되는 상황일 수도 있다. 이렇게, 자본으로부터의 자율적 구축인가 아니면 삶의 총체적 포섭인가의 문제에 금융화가 끼어든다. 때문에 우리는 이 금융의 문제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노동의 등장과 금융화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저자는 생산양식의 변형에서 나타난 디플레이션적 효과에 주목한다. ‘포스트포드주의 노동의 개별화와 불안정화, 그리고 외부화는 급여와 사회적 비용(사회보장, 연금) 양자에서의 노동 비용을 직접적으로 공격했다. 이것은 은행 탈중개화를 야기하며 디플레이션과 금리의 하락으로 저축은 전 세계적으로 증권시장, 특히 미국의 시장으로 유인되었다.’ 이렇게 노동 성격의 변화가 금융화와 결합하면서 신경제가 시작된다. 전례 없는 가계 경제의 금융화 시대에 노동자들은 저축을 주식에 투자한 투자자이기도 하다. 포드주의 급여 관계에 내재하는 자본과 노동의 분리는 제거되며, 노동자들은 자본 일반과 공통의 관심사를 갖는다. 이렇게 공장의 기계를 벗어나 ‘자율적’으로 된, 다르게 표현하면, 개별화되고 불안정하게 된 노동자들은 금융시장에 새롭게 포섭되었다.

이 금융시장 또한 언어적 본성을 지닌다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주식시장의 주가는 정보에 대한 타인들의 반응을 예측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금리 조정과 같은 당국의 발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따라서 주식의 매매여부를 결정한다. 이것은 관습이라는 시장에 대한 해석 모델이 시장 참가자들에게 인지적인 압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장과 참여자는 상관적으로 구성된다. 시장은 어떤 복잡한 수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자연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아니며, 참여자들 또한 모든 정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참여자들의 어떤 믿음이 거대한 진리체계를 만들어내며 그 진리체계가 시장의 작동방식을 정의한다. 그리고 참여자들에게 그 진리체계는 다시 ‘진리’로, 어떤 보편적인 법칙으로 받아들여진다. 때문에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적 힘이다. 이 힘이 만들어내는 관습, 진리체계의 근원에는 소통행위들이 있다.

정리해 보면 노동과 금융은 공히 창조적 힘으로써 작동하는 언어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니 사실 노동과 금융은 언어의 창조적 특성이 두 가지 양상으로 발현되는 것에 불과하다. 동전의 양면이란 이야기다. 그러니까 금융은 ‘실물경제’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금융화가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양식의 디플레이션적 특징에 그 기원을 갖기 때문에, 즉 생산양식 상의 구조적 변화가 금융적 세계화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동과 금융을 연결시킴으로써 저자가 펼치는 생각은 금융에 관한 기존의 대표적인 두 시각, 즉 금융은 생산으로부터 자율적인, 자기생성적 가치의 영역이라는 부르주아적 시각과 금융은 그저 허구적인 가치들과 순수한 투기일 뿐이라는 시각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금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이제 우리는 앞의 문제로 돌아간다. 일반지성이 신체에 각인되는 새로운 노동의 시대에 모든 삶의 행위들이 노동으로 전환/포섭되는 상황 속에서,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자율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한지의 문제 말이다. 이것은 금융화와 연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금융화가 노동과 사회적 생산 일반을 통제하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시장을 다중 해방의 예시로 읽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의 문제로 말이다.

나의 부족한 이해 탓이겠지만, 이에 대한 저자의 명확한 생각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처음에 언급한 저자의 다른 책, 『금융자본주의의 폭력』에서 오히려 더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그 책에서 저자는 금융위기에 대해 재산업화는 결코 답이 될 수 없으며, 금융화의 논리를 그대로 뒤집을 것을 제안한다. 저자가 드는 예는 주택소유자지원대책인데, 지금까지 공통재에 대한 접근권이 사적 부채 형태를 취했다면, 이제는 그러한 접근권을 일종의 사회적 지대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이 하나의 예라면, 『자본과 언어』에서 제기하는 저자의 생각은 보다 포괄적이다.

어쨌든 금융화를 새로운 가능성의 장으로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언어적, 소통적, 협력적 역량에서 시작하는 것일 테다. 그것이 노동과 금융의 성격을, 다시 말해 현재의 자본주의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바랄 수 있는 건, 소통과 협력의 역량이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정해져 있는 법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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